올 하반기에 내가 가장 기대한 영화가 있다면 장예모 감독의 연인. 바로 이 영화였다. 얼마나 기대를 했는가 하면 개봉 첫날이었던 8일날 일이 많아서 이 영화를 못보게 되자 마음이 다 쓰릴 지경이었다. 내가 원래 장예모 감독의 팬이었던 것은 아니다. 연인의 전작 영웅 때문에 나는 장예모 감독을 좋아하게 되었다. 국두나 귀주이야기 붉은 수수밭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내 입맛은 아니었더랬다. 영웅을 너무나 재미있게 봤던 나는 당시 극장에서만 그 영화를 3번 봤고 비디오로도 2번을 봤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너무너무 학수고대하며 기다렸었다. 허나 결론을 미리 말 하자면 이 영화 코메디였다.
전작 영웅의 경우도 스토리가 아주 훌륭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충분하게 납득이 가는 스토리에 무엇보다도 비주얼이 뛰어났었다. 인물들의 감정과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분배한 색의 향연들. 그리고 같은 사건이었지만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확연하게 달라지는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은 모두 최고의 찬사를 받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 영화의 경우. 지나친 비주얼의 강조로 인해 오히려 영화가 우스꽝스러워져 버렸다. 거기다 스토리는 비주얼을 도저히 따라잡지 못해서 겉돌기만 했고 뒷쪽으로 갈수록 관객들은 폭소를 터트리거나 야유를 보낼 정도로 이야기가 한심해져만 갔다.
내가 생각하기에 멋진 액션이란 무릇 그에 응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주인공이 아무리 똥폼을 잡고 멋드러지게 싸운다고 해도 대체 왜 싸우는지를 모르면 액션이 멋질수록 비주얼이 화려할수록 우스꽝스럽게만 보일 뿐이다. 연인은 스토리가 따라주지 않으면 아무리 근사한 화면과 그림엽서같은 구도를 쓴다고 해도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올 상반기.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가 있었다면 하반기에는 바로 이 영화 '연인' 이 있다.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 하고자 했던것은 사랑이었다. 그런데 대체 그들이 왜 사랑하게 되었는가에 관한 설명이 전혀 없다. 더구나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새롭게 싹트는 사랑은 관객들로 하여금 '저 인간들이 왜 서로 사랑하고 난리지?' 라는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나중에는 하다가 안되니까 스토리 뒤집기를 시도하지만 그걸로 이미 틀어진 영화의 감정선을 이끌어내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반전이랍시고 엎어친 스토리들은 관객의 실소만 자아낼 뿐 영화에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한다. 심지어 막판에는 감독이 노망이 났거나 지가 찍고싶은대로 마구 찍은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엄하기 짝이 없는 눈밭 위에서의 결투씬. 그리고 거기서 죽은줄로만 알았는데 느닷없이 살아나는 장지이는 이 영화의 장르가 코메디라고 온몸으로 외치는듯 했다.
각자 배우로써 입지가 탄탄한 세 명의 배우.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서로 작당이라도 한것처럼 평이한 연기를 한다. 장지이의 경우 나는 아직 그 배우가 주인공을 맡아서 스토리를 이끌어갈 만한 힘이나 카리스마는 없다고 생각한다. 전작 영웅에서 장만옥이 보여줬던 연기와 비교를 하자면 그야말로 낙제점수이다. 물론 무희로 나오는 그녀가 춤을 추는 장면이라던가 맹인 연기는 칭찬을 해줄만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녀는 무용을 전공했기 때문에 춤을 잘 추는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고 맹인 연기도 그다지 눈에 띌만큼 훌륭했던것은 아니다. 거기다 반전의 키워드를 쥐고 있는 그녀인데 표정 연기가 영 심심하다. 모든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만큼 좀 더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를 써야 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금성무. 극중에서 감정의 변화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역을 맡았다. 사랑때문에 모든걸 희생할 수 있는 남자로 나오는데 관객들은 보는 내내 금성무의 감정선을 따라잡지 못한다. 물론 극중에서 그는 끊임없이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강조를 하니 관객들이 그 영혼을 이해하지 못하는게 당연하다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셋 중 가장 오래 연기생활을 한 유덕화. 유덕화가 맡은 캐릭터는 배신을 하기도 하고 또 배신을 당하기도 하는 이중적인 인물이다. 특히 배신을 당했을때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껴서 모든걸 다 망가뜨리려고 하는 역활인데 두 배우보다 조금 낫기는 하지만 그의 연기생활을 돌이켜 볼때 그다지 자랑스러운 작품이 되지는 않을것 같다. 무엇보다 유덕화의 경우는 연기를 못해서라기 보다 도저히 극중 인물을 이해하지 못해서 어떻게 연기를 해야하는지 몰라 우왕좌왕 하는게 너무 눈에 두드러졌다. 나머지 두 배우들은 그냥 이해를 못해도 연기를 하면 그만 이라는 식이었지만 그나마 연기를 좀 오래한 유덕화는 인물을 이해하고 몰입하려고 하는 눈치였는데 그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들의 연기력에 문제가 있었다기 보다 스토리와 캐릭터의 설정 자체에 문제가 있지 않았나 싶다. 마치 여러명의 작가가 모여서 한 사람의 인물을 창조한것 처럼 인물들은 일관성도 없다. 그리고 그 부족한 일관성을 '알고 보니 그는 이런 사람이었던 것' 으로 때우려고 한다.
아까 위에도 언급했었지만 영화에서 훌륭한 비주얼은 좋은 스토리를 만나야 빛이 난다. 영화는 개판인데 볼꺼리만 화려하다고 해서 우리는 그 영화에 결코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전작 영웅이 훌륭했던것은 그 화려하고 멋진 볼거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극중 배우들의 좋은 연기와 괜찮은 스토리가 관객들로 하여금 멋지다라는 찬사를 불러 일으킨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 연인은 엄청나게 겉멋이 든 감독이 꼴에 본건 많아가지고 만든 영화처럼 한심하기 짝이없다. 택도 없는 스토리를 아무리 멋진 앵글로 잡은들 뭣하겠는가. 영화는 비주얼이 전부가 아닌것을. 극장을 나오면서 어떤 관객이 명대사를 날렸다.
'장예모 감독 쪽팔리지도 않냐? 저런걸 해외까지 개봉하게.'
참. 금성무는 여기서 활을 무지하게 잘 쏘는데 반지의 제왕의 레골라스 이래로 최고의 활솜씨를 보여준다. 근데 그게 멋지다기 보다는 좀 웃긴다. 어느 정도껏 잘 해야지 너무 잘 해버리면 웃길수도 있다는걸 나는 이 영화를 통해서 배웠다. (실은 레골라스 정도의 활 솜씨도 너무 훌륭한나머지 충분하게 웃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