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스파이더맨 2를 봤다. 요즘 내가 자기랑 놀아주지 않는다며 한참 삐져있던 K군이 스파이더맨을 보자고 했는데 내가 미적거리자 매우 신경질을 부려서 새벽 1시 30분에 좀비처럼 극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스파이더맨 2를 봤다. 가만 생각해보니 1편 역시 당시 한참 나와 놀더 J군이 무언가로 삐졌고 내가 그걸 달래는 차원에서 함께 봤던것 같다. 흠. 이런 식이라면 스파이더맨 3편이 나온다면 나는 분명 또다른 미지의 X군과 보게 되지 않을까? (안엮여도 좋으니 다음번엔 초절정 온순 꽃미남으로 부탁한다. 위에 나열한 저인간들은 꽃미남도 아닌 주제에 성질들이 너무 더럽다.)

늦은 시간임에도 사람들은 꽤 많았고 대부분은 스파이더맨2를 보러 온듯 했다. 우리도 핫도그와 콜라를 양손에 쥐고 극장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에어컨이 너무 빵빵해서 민소매를 입고 간 나는 내내 내 팔에 돋은 소름을 손바닥으로 문질러야 했으며 나중에는 잠까지 쏟아져서 난감하기 이를때 없었다. 춥지 잠오지 영화 재미없지. 그냥 집에서 책이나 보는건데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나는 스파이더맨1편은 그럭저럭 재밌게 봤었다. 만화 영화에서나 가능하던. 스파이더맨이 건물과 건물사이를 거미줄 뿜어대며 휙휙 날라다니는 장면은 놀라웠다. 거기다 악당으로 나오는 남자도 어느 정도는 이유가 있었으며 거기다 마지막에는 죽기전에 눈물겨운 부성애까지 보여줬으니 그만하면 애초부터 '나는야 악의 화신' 이라는 설정하에 나오는 악당들보다는 감정이입씩이나 되었었다고 감히 고백하겠다. 하지만 2편은 그렇지 않았다. 1편보다 훨씬 발달한 영화 기술로 스파이더맨은 더 빠르고 더 현란한 몸짓으로 건물과 건물 사이를 날라다녔으나 샘 레이미 감독은 여기다 영웅의 인간적 고뇌, 영웅의 사랑도 모자라서 마지막에는 영웅 찬양까지 해댔다. 이블데드를 겁나게 좋아하는 나로써는 샘 레이미에게 느낀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의 재기발랄함은 헐리우드 블럭버스터가 삼켜 버렸고 더구나 그는 영웅에 환장했나 하는 느낌마저 주었다.

스파이더맨은 자신의 삶과 스파이더맨의 삶 사이에서 고민을 한다. 사람들을 구하고 악당을 물리치자니 당장 방세때문에 시달리고 학교 수업을 빠져야 하는 현실이 울고. 현실을 택하자니 늘쌍 '왜앵~'하는 싸이렌소리와 아둔한 몸집에 몽둥이들고 어딘가로 쫒아가는 경찰들이 영 미덥잖다. 허나 이런 고민도 잠시. 척추뼈에 기계 문어다리를 장착한 악당이 나타나자 스파이더맨은 고민을 집어치운다. 악당이 있으면 당연히 영웅이 있어야 하며 그 영웅은 스파이더맨 자신 뿐이니까. 만약 옆에 슈퍼맨도 있고 베트맨도 있다면 우리의 스파이더맨이 좀 더 고민을 했겠지만 불행히도 악으로 부터 지구를 지킬자가 자신밖에 없으므로 고민 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리고 1편에도 등장했던 메리제인과의 안타까운 사랑도 이어지는데 난 대체 메리제인 때문에 스파이더맨이 괴로워하는게 이해가 안갔다. 메리제인이 특별히 매력이 넘치는 여자인가하면 그것도 아니고 맨날 토라지는걸 보면 성격이 좋은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더구나 메리제인은 삼백안 (어디선가 나오늘 오늘밤은 어둠이 무써워요~ 하는 멜로디가 들렸다.) 이라서 그 몽롱하고 슬리핑스런 눈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다 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심각한 장면에서도 메리제인은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대사를 쳤으며 위로 눈을 치켜뜨기라도 하면 더 가관이었다. 예전에 브레드피트와 톰크루즈와 함께 열연한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의 그 연기 잘하던 늙지 않은 꼬마 흡혈귀 소녀라고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그녀는 밋밋하고 특징없는 연기로 일관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욱 두드러지는 특징은 바로 영웅주의에 대한 무섭도록 확고한 집착이었다. 스파이더맨이 원래 영웅이긴 하지만 여기서는 그 상태가 더 심하다. 열차를 구하는 장면에서 죽도록 고생을 해서 사람들을 살리고 쓰러진 스파이더맨. 사람들은 스파이더맨을 손에서 손으로 옮겨 자리에 내려놓는다. 쓰러졌으면 일단 그 자리에 눕힌다음 상태를 살펴봐야 하는데 마치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광신도들 처럼 나름의 의식을 경건하고 엄숙하게 치르는 그 장면에서 나는 실소를 금할수가 없었다. 거기다 메리제인도 피터의 실체가 스파이더맨 즉 영웅인것을 알고 나서는 영웅을 사귀는데 목숨이 대수냐는 식으로 나오고 악당마저도 스파이더맨이 보여주는 모름지기 영웅이란 말이지에 감탄을 해서 마지막으로 지구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 모두들 영웅 앞에서는 다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이 바보같은 영웅주의 영화에 조금도 공감을 할 수가 없었다.

영웅주의는 어떻게 보면 몹시 위험한 발상이다. 한 사람이 전지전능한 (신도 아니면서) 능력을 가지고 있고 우리 모두는 그를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 어떤가. 왠지 어디선가 성조기가 펄럭거리는게 느껴지지 않은가? 역사가 짧아서 내세울만한 영웅이 없는 미국은 유달리 영웅을 많이 만들어냈다. 슈퍼맨도 베트맨도 스파이더맨도 모두 미국에서 제작된 영웅이다. 그리고 그 영웅은 전부 백인 남자이다. 인종우월주의까지 건드린다는건 너무 깊게 들어가는 것이므로 이쯤만 하겠지만 이것도 분명 생각 해 볼 만한 문제이다. 젊은 백인 남자로 대변되는 미국. 그리고 그 젊은 백인 남자는 인류를 지킨다. 따라서 인류는 그냥 그 영웅을 따르면 목숨도 건지고 번영과 평화와 안녕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미국이란 나라가 그토록 무모할 수 있는 것은 무식한 미국 국민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똑똑한 사람도 많겠지만 교육수준이나 문맹률같은 걸 보면 미국은 정말이지 크고 거대한 무식쟁이 같은 느낌을 준다. (물론 미국이란 나라 자체가 국민이 똑똑해지는걸 절대 원하지 않는 탓도 크다.) 국민이 똑똑하길 원하지 않는 나라. 냄새가 나도 많이 난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힘쌔고 뭐든 다 할수 있는 영웅이다. 똑같은 영웅이라도 머리가 좋아서 혹은 연구와 노력으로 인해 인류에게 도움을 주는 영웅보다는 그저 택도아닌 힘을 가진 (심지어 슈퍼맨은 힘이 넘치다 못해 지구를 거꾸로 돌리기까지 한다.) 영웅이 진정한 영웅이다. 영웅 이퀄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파워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유달리 미국은 영웅에 관한 영화를 많이 만든다. 악당이 있고 영웅이 있고 영웅은 승리하고 악당은 지며 백성들은 환호한다. 이 바보같은 공식이 계속해서 먹혀들어가고 있는걸 보면 참 미국이란 나라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재미있으려면 어느 정도는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래 그럴만해 하며 끄덕이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어떤 부분에서도 이 영화를 보며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겨우 스파이더맨 영화에 뭐가 그리 심각하냐고 그냥 잘 날아다니고 악당만 물리치면 그만이 아니겠냐고 하겠지만 그냥 무작정 파워풀한 영화를 보려면 차라리 여기뻥 저기뻥 터지는 영화를 보는게 낫지 않을까? 분명 되도안한 영웅주의를 설파하고 있는데 거기서 스파이더맨이 얼마나 날렵하게 거미줄을 쏘고 화려한 몸짓으로 건물 사이를 잘 날라다니는지. 그리고 힘이 얼마나 쌔면 기차를 다 멈추게 하나 정도만 봐야 한다고 우긴다면 그것도 무리라고 본다. 차라리 영웅주의 없이 1편처럼 만들었다면 그나마 나는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도저히 즐겨 줄 수가 없었다. 거미줄을 쏘고 건물사이를 날라다녀도 그저 삽질하고 있네 라는 생각만 들었다. 단순히 즐기는 오락영화를 욕하는 것이 아니다. 오락 영화라면 오락영화 다워야지 거기다 욕심을 부려서 이것도 집어넣고 저것도 집어넣으면 꼴만 우스워진다. (그렇게 심각하고 싶다면 제대로된 심각한 영화를 만들면 그만이다.) 나는 스파이더맨이 애초부터 말도 안되는 영화라기 보다 샘 레이미의 욕심이 망친 영화라고 보고 싶다. 그가 영웅에대한 뜬구름잡는 찬사만 안했더라도 스파이더맨은 그들의 바램대로 여름 극장가를 시원하게 달궜을지도 모른다. (근데 시원하게 달구는게 말이 돼나?)

위의 사진은 마냐님의 서재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마냐님. 허락없이 가지고 와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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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04-07-09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디오나 나오면 봐야겠군요.^^ 극장에서 보지 말아야지.^^ 전 토비 맥과이어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볼까말까 망설였었는데 보고 온 분들 다 재미없다네요. ^^

마태우스 2004-07-09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이 그러는데 사진 도로 갖다놓으래요. 리뷰 잘 읽었어요. 님의 리뷰는 언제나 촌철살인에다 천하무적이며 별루년년첨록파에요.

플라시보 2004-07-09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보라빛우주님. 토비 맥과이어는 귀엽더이다. 몸더 1편보다 훨 단련된 모습이구요^^ 토비의 매력은 비디오로도 충분히 느낄수 있을것으로 사료됩니다. 흐흐.
마태우스님. 마냐님이 정말 가져다 노으래요? (뻥이면 만원주기 어때요?^^) 근데 별루년년첨록파가 무슨 뜻이지요? (뭐. 칭찬이 아닐까 하는 기대는 가지고 있지만 당최 뭔 소린지 알아야 칭찬인지 욕인지 파악을 하지요. 하하)

마태우스 2004-07-09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원빵 합시다! 마냐님은 제편이라, 5천원씩 나누어 갖기로 했답니다. 별루년년첨록파는, 대동강물이 언제 마르랴, 해마다 이별 눈물 뿌리는 것을, 이란 시에서 인용한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싯구에요.

플라시보 2004-07-09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마냐님이 님의 편이시라는 그 믿음은 어디서 온것인지요?^^

2004-07-09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머털이 2004-07-09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저는 재밌게 봤는데요~. 뉴욕의 빌딩 사이를 날아다닐 때는 꼭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 탄 기분이었는데 ^^ 그나저나 토비 매과이어는 누가 75년생 서른으로 보겠습니까? 많이 부럽더군요. (졸라 부럽다고 쓰려고 했는데 공공의 장소에서 쓰기엔 부적합한 표현인 것 같아서...)

하얀마녀 2004-07-09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감동먹으라고 강요하는 씬에선 비웃음이 저절로 나오더군요.

마냐 2004-07-09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만원빵에 동의하면..최소한 5000원은 떨어지는 장사...이거 어찌 마다해야 합니까. 흐흐.
그나저나....제 나이브하고 아무 생각 없는 감상문과 질적 차이를 현격히 보이는 엄청 예리한 리뷰입니다.
저두 '미국식 영웅주의' 엄청 싫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저는 별로 기대않고 극장 들어갈 때와 달리 나올때는 '음, 괜찮아' 하고 나왔고..시간이 지나면서 비디오로 한번 더 '휙휙 액션'을 보고 싶다는 이례적 반응까지 나왔으니...아무래도 이건 제가 일관성이 없는 탓인듯 하옵니다. 다시 한번 님의 촌철살인 리뷰에 꾸~벅.

연우주 2004-07-10 0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저도 '송인' 좋아하는데. 이런. 첨록파란 부분이 예술이지요. 그런데 느닷없이 나올 타이밍은 아닌 것 같다 사료되옵니다. ^^;

플라시보 2004-07-10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털이님. 보는 사람마다 다 다른거죠 뭐^^ 저도 이왕이면 돈 주고 본 영화 님처럼 재밌게 봤더라면 좋았을텐데 부러워요^^ 아. 그리고 토비 맥과이어가 서른인가요? 전 좀 어리게 봤었는데 저보다 한살 많은 주제에 마치 대여섯살은 어린 동생같더군요. 으흑
하얀마녀님. 흐흐. 좀 감동이 억지스러웠던것은 사실입니다. '니네 이쯤에서 감동한번 먹어줘야 하는거 아녀?' 하는 식의 감동은 이상하게 감동스럽다가도 반발심이 생기더라구요. '싫다면?' 하고 말이죠
마냐님. 하하. 역시 돈에 마음이 흔들리고 계시는군요. 그리고 저는 그때 여러가지로 상황이 안좋았습니다. 일단 표를 끊는데 시간이 너무 걸렸구요. 또 처음 앉은 좌석에서 뒤에 술먹고 온 잡것들이 하도 의자를 발로 차고 지들끼리 떠들어서 결국엔 사람없는 앞좌석에 앉아서 목뼈가 부러질뻔 했습니다...를 참는다 하더라도 스크린을 괴상한 각도로 올려보니 화면이 제대로 안보이더라구요. 그 탓도 컸다고 봅니다. 안그래도 살짜기 신경질이 발동한 상황이라 영화에 대고 마구 화풀이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뭐 그래도 건물사이를 날라다니는건 시원했습니다. 1편보다 몸이 더 날렵하더라구요. 꼭 고무인간 같이 어찌나 탄력받아 주시던지^^
연보라빛 우주님. 님도 그 시를 좋아하시는군요. (그리고 느닷없음이 마태우스님의 매력..이라고 본인은 생각하던걸요? 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