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 영토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 대립에서_대화로
와다 하루키 지음, 임경택 옮김 / 사계절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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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와 나라 간의 영토분쟁은 낯선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독도를 가지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지만, 이웃나라 일본은 독도 문제 외에도 러시아와 쿠릴 열도 문제, 중국과 센카쿠 열도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가지 대립구도는 전부 구조가 다릅니다. 일본이 인접한 국가들과 모두 영토분쟁을 가지고 있는 것은, 2차 세계대전에서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남아있다는 뜻이기도 하며, 혹은 냉전의 잔재가 아직 남아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자 와다 하루키는 이런 상황에서 4개국이 관련된 동북아시아 영토문제의 해결을 대립에서 대화로 변화하고자 하는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러시아 간의 쿠릴열도 문제는 2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추축국의 일원이던 일본과 연합국의 일원인 소련은 대립구도상 전쟁을 벌여야 하는 관계였지만, 일본은 중국과 미국, 영국전에 신경써야 했고 소련은 독일전에 신경써야 했기 때문에 서로 건드리지 않는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은 소련측에 일본전에 참전해줄 것을 계속 요구했고, 소련은 얄타 회담을 계기로 대 일본전에 참전하게 됩니다. 이 회담에서 소련은 참전 조건으로 쿠릴 열도를 받기로 했습니다. 일본이 항복하게 된 계기가 원자폭탄인지 소련의 참전인지는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결국 소련의 참전은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내는데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결국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하면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게 됩니다. 이는 영토문제에 대해서 혼슈, 훗카이도, 규슈, 시코쿠로 일본의 주권이 한정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그 밖의 작은 섬들에 대해선 연합국 결정에 따른다는 의미였습니다.

2001년 유엔 연간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100여 곳에서 해양경계선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다. 해양경계선 문제는 아주 민감한 사안으로 이웃국가 간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할 만큼 중대한 문제다 -《심해 전쟁》p.93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2조에서 러시아가 받게 될 쿠릴열도가 논의되었는데, 이 조약에서는 쿠릴열도에 대해 일반적으로 확정된 지리학적인 상식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미국이나 영국, 소련은 쿠릴 열도는 북태평양의 22개 섬의 고리로 인식했으며, 일본도 이를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약이 비준된 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포기한 쿠릴열도의 정의에 에토로후 섬과 구나시리 섬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궤변을 펼칩니다. 이러한 일본의 궤변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냉전이라는 현실 아래 미일관계에서 비롯된 산물이였습니다. 미 국무성은 1952년 쿠릴 열도의 하나인 하보마이 군도의 한 섬에서 격추된 미군기 사건에 대해 항의문을 보내고 배상을 요구하면서 일본과 소련의 교섭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미국은 이 항의문에서 평화조약과 얄타회담에서 말한 쿠릴열도에 하보마이 군도의 일부인 유리 섬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소련은 하보마이 군도를 놓고 일본의 주권 행사와 미국의 원조에 따른 방위 수행을 방해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미국의 지지 하에 일본은 2도 반환설을 계속적으로 주장할 수 있게 됬습니다.

시간이 흘러 일본과 소련은 국교 정상화를 하고자 교섭을 하게 됬습니다. 이 평화조약을 맺기 위해 소련의 흐루시초프는 일본이 원하는 쿠릴열도의 2도를 넘겨주는 인도안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냉전시대에 미국은 일본과 소련의 국교 정상화를 견제하고자 했고, 교섭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으로 하여금 4도 반환을 요구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맞춰 일본은 북방 4도는 쿠릴열도가 아니라 일본의 고유영토였으며, 이런 일본령이 된 4도를 제외한 18개 섬이 쿠릴 열도였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소련으로서는 4도 반환은 받아들일 수 없었고, 2도 인도안을 계속적으로 주장했습니다. 흐루시초프에 이어서 러시아의 실권을 장악한 고르바초프, 옐친, 푸틴까지 평화협정의 조건으로 2도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계속해서 4도 반환을 요구했고, 일본 내부에서도 2도 인도안을 지지하는 국회의원을 반역자로 낙인찍으며 감옥에 가두는 등, 러시아 측에서 보면, 일본은 러시아와의 영토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이어졌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독도문제 역시 2차 세계대전 시절부터 시작됩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에 주권국가라는 개념이 도입된 이후 한국과 일본의 국경 획정되었는데, 1876년 일본 내무성은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령이며 일본령이 아니라는 결론을 냈습니다. 그러나 러일전쟁 당시 독도는 망루를 세우고 무선 또는 해저 전신을 설치해 러시아의 발트 해 함대를 감시할 수 있는 유용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때문에 러일전쟁을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 일본은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선언하게 됩니다. 5년 뒤엔 경술국치가 일어나게 됩니다. 때문에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독도의 병합은 한반도 전역의 강제병합 전조이며 서곡임으로 인식됩니다. 이러한 인식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독도 관련 담화문에서도 나타납니다.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그냥 우리 땅이 아니라 40년 통한의 역사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는 역사의 땅입니다. 독도는 일본의 한반도 침탈 과정에서 가장 먼저 병탄되었던 우리 땅입니다. 일본이 러일전쟁 중에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편입하고 점령했던 땅입니다. (중략) 우리 국민에게 독도는 완전한 주권회복의 상징입니다. 야스쿠니신사 참배, 역사교과서 문제와 더불어 과거 역사에 대한 일본의 인식, 그리고 미래의 한일 관계와 동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일본의 의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입니다. - 노무현 독도 담화문 中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의 연합국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는 1946년 SCAPIN 제 677호를 발표해 일본이 정치, 행정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역과 할 수 없는 지역을 지정했는데, 일본의 범위에 제외하는 지역으로 맨 처음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1947년 대일 강화 준비를 위해 평화조약안을 작성하기 시작하면서 조선 독립의 승인에 제주도와 거문도 및 울릉도를 분명히 언급했지만, 독도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이 3도와 독도는 나란히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독도가 일본령이라고도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이 참여하지 못한 이 회담에서 나타낸 미국의 애매한 입장태도는 일본이 독도를 자신의 고유영토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됬습니다. 분명히 확실한 것은, 독도는 일본이 1905년 이래로 40년간 이 섬을 영유했으며, 일본의 패전 이후 연합국군이 일본의 관리에서 제외했으며, 1954년부터 한국이 경비대를 보내 오늘날까지 실효지배를 계속하고 있다는 점이며, 한국의 실효지배는 해방 직후부터의 영유권 주장에 근거한다는 점입니다. 그 주장의 핵심은 1905년 1월 일본의 독도 영유는, 조선의 침략을 시작하면서 5년 후 강압적인 한국 병합의 전조로 행해졌다는 점에 있습니다.

일본에서 이 주장을 논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주장에 따른 독도 지배는 한민족이 존재하는 한,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절대 철회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한국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상의 상황을 생각하면 조선 식민지 지배를 반성하는 일본으로서는,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이고, 한국의 지배는 불법 점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도의라고는 전혀 없는 행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독도에 이어 한민족의 소중한 국토, 한반도를 불법 점령하여 자국의 영토로 삼아 버리고, 끝내 35년 뒤에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이 실효지배하는 독도에 대한 주권 주장을 일본이 단념하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이 결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이룰 전망이 없는 주장을 계속해서 한일관계, 일본인과 한국인의 감정을 점점 더 악화시키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 pp.264~265 

일본 외무성이 영토문제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고유영토'론은 한번도 외국의 영토가 된 적이 없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고유영토는 교섭의 용어가 아니라 싸움의 용어입니다. 레이코프가 지적했듯이, 고유영토란 언어에는 불법 점거, 불법 점령이라는 프레임이 들어 있으며, 최후 통첩적인 요구, 군사 행동을 불러올수도 있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논리는 일본의 극우파와 일본사회가 우경화되면서 많은 지지를 얻었지만, 저자는 이 논리가 허점투성이일 뿐만 아니라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합니다. 일본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깔끔하게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며, 당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서둘러 해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일본의 전후 정치와 체제 모두를 다시 검토해야 하며, 영토문제의 논의에서 정신혁명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저자 와다 하루키는 한국과 일본이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서로 협력하고, 그 협력을 발판으로 북한과 중국이 민주주의로 나아가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시작은 바로 영토문제를 대립에서 대화로 해결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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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 미워하는 진짜 이유 - 불안형 내셔널리즘의 시대, 한중일 젊은이들의 갈등 읽기
다카하라 모토아키 지음, 정호석 옮김 / 삼인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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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발이, 춍(チョン), 되놈, 가오리방쯔(高麗棒子), 르번구이쯔(日本鬼子)... 이것은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주로 인터넷상에서 서로를 비하할 때 사용하는 용어들입니다. 전세계적으로도 이웃나라끼리 친한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한중일이 서로 으르렁대는 것은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2차 세계대전의 여파를 직접 체험한 세대는, 역사적인 이유로 이웃나라 사람에 대한 혐오 증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기존 일본 논단에는 한국이나 중국의 민족주의가 반일 감정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식의 논의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민족주의는 단지 다른 나라를 비판하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저자 다카하라 모토아키는 민족주의의 해석을 타국을 비판하기 위한 도구로밖에 보지 않는 일본 우파 논단의 정반대의 관점을 취합니다.

기존에 한중일 민족주의의 해석은, 역사 문제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가 간의 민족주의적 응수를 마치 한 나라의 국민 모두가 단일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듯이 논의해 왔습니다. 한중일 민족주의 대립을 국민 모두가 단일한 의견으로 바라본다는 관점을 저자는 당구공 모델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당구공 모델은 한중일 모두가 경험한 고도성장기에 사회의 중추를 담당한 세대에 어울리는 개념이였습니다. 이 시기의 사회는 국가의 발전이나 국민적 통일감을 양성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였고, 이러한 관점이 민족주의에 적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도성장기가 지나고 등장한 사회유동화라는 세계적 조류는 이러한 당구공 모델의 민족주의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개인화된 시장 경쟁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고용 문제 등을 반영한 서구형 민족주의, 개별불안형 민족주의의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경우 좌파는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속죄를 일본인 전체의 해답으로 내놓은 데 반해, 이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우파는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면죄를 전 일본인의 해답이자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본 경제가 발전하면서 일본 민족주의에는 생활보수주의와 초안정사회라는 자화상이 나타났고, 민주주의를 희구하는 일본 좌파는 풍요롭고 안정된 사회를 약속하는 우파의 약속을 받아들이며 그 세가 약화되었습니다. 결국 일본의 고도성장기에는 견고한 관료제하의 사회운영을 토대로 하는 새로운 일본의 민족주의가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인간 존중의 경영이라고 알려진 일본의 회사주의는, 고도성장기의 주류 세대, 단카이 세대라고 불리는 시대적 우연 속에서만 기능할 수 있는 시스템이였습니다.

당시 일본의 고부가가치 산업화를 둘러싼 논의는, 경제 외적인 이유의 이민 유입을 거부해 온 일본의 상황을 그대로 둔 채 저임금 노동력을 자민족 내부로부터 무리 없이 조달할 것을 장려했다. 결국 젊은이들을 그 최대 공급원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렇게 편의주의적이기 이를 데 없는 일본 특수성론은 당시의 틀로 말하자면 보수 측에서 나온 것으로서, 일본 내셔널리즘과도 높은 친화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력으로부터 보건대, 당시 젊은이들 이후의 세대는 당시 그들이 상정하고 있던 '국민'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자민족의 범위를 자의적으로 구획한 다음, 나머지 사람들은 다 저임금 노동자가 되면 만사 해결이라는 식의 내셔널리즘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 p.85 

회사주의를 토대로 하던 전후 일본의 민족주의는 결국 젊은 세대에게 비용을 떠넘기고서야 가능했던 가치였습니다. 고부가가치 산업과 서비스업은 생산과정에서 대량의 저임금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데, 근면한 젊은이들이 순순히 그런 일에 종사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일본 사회에서 여전히 화이트칼라, 기업의 정사원이 되서 전철로 출퇴근하는것이 이상적인 사회인으로 인식되는 반면에 현실은 대다수 젊은이들에게 정사원은 커녕 시간제 근무 자리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정규직 아버지와 편의점 아르바이트 아들이라는 조합이 흔한 일상이 된 것입니다. 기존의 개발 체제와 사회유동화 이후의 상황이 혼재함에 따라 나타나는 젊은이들의 불안감이 과거 세대의 성공에 대한 향수를 키우는 한편, 그 연장선상에서 대중 감정으로서 반한, 반중 감정이 나타났습니다.

인터넷상의 혐한, 혐중의 움직임은 한국과 중국에 대한 막연한 반감을 바탕으로 보수파 잡지 및 미디어의 중국위협론 따위의 언설을 재구성하여 인터넷 공간에 유입되면서 불거졌습니다. 이러한 중국위협론 등의 이론은 처음에는 기업 경영자나 중요 관리자들을 위한 논의였지만, 이러한 논의에 젊은이들이 인터넷상에서 동의하기 시작하면서 인터넷상의 혐한, 혐중은 기득권 세대의 미디어 정보에 젊은이들이 장단을 맞추며 행동을 같이하고 있는 상태의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구조는 결국 젊은이들에게 자국의 내력으로부터 생긴 문제를 은폐하는 대신 사이비 적을 제공하며 이를 민족주의적 형태로 표출하게 합니다. 현재의 동아시아 민족주의란 필연적으로 자국의 고도성장에 대한 재검토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자국사 논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민족주의의 대외적인 공격성이 가장 눈에 띄는 형태로 보인다면, 그 내면에는 전 국민의 공통된 목표로 상정되었던 고도성장 이데올로기의 소멸, 국민들 간 입장 분열과 다원화를 일그러진 형태로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젊은이들의 존재는, 고부가가치 산업의 저임금 노동자 및 소비자로서 그네들을 적당히 조달하면 된다고 여겨 온 전후 일본의 회사주의와 문화론의 좌우 합작의 결과 같은 것이다. 지금 젊은이들이 우울을 느끼고 있다면, 이는 새로운 거처라 여겼던 문화 영역이 중간층의 상하 분열과 함께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을 그네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 p.140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일본 언론에서 쉽게 반일이라 단정지어 버리곤 하는 한국의 저항적 민족주의는, 겉으로는 반일적인 형태를 띄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자국의 개발독재에 대한 이의제기이며, 고도성장에 대한 자부심을 중시하는 국가주의와 대립적인 관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친일파 청산의 움직임을 일본에서는 단순히 반일 기운의 고조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친일파 비판의 근저에 놓인 것은 단순한 반일이 아니라 식민 통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한국의 개발주의와 친일파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저항적 민족주의 입장에서의 이의제기, 즉 나라 안쪽으로 향해 있는 비판인 것입니다. 결국 한국 민족주의란 역사적으로 생성된 반일적 형태는 여전히 영향력이 있지만, 박정희로 대표되는 군부독재 체제 아래 억압당하고 배제되었던 저항적 민족주의의 복권이라는 성격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관점에서 반일적인 형태는 이러한 주류 관점 외에도 일본이라는 기호만을 끄집어내 유희에 활용하는 취미적 민족주의도 있으며, 한국 정치사를 관통하는 민주화운동이 정권의 중추를 차지한 상황에서, 이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반대편의 국가주의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에서 비롯된 반일적인 모습도 있습니다. 민주화라는 주류가 된 혁신파에 대한 반발로 비롯된 이 계층은 통일 지향을 비판하며 예전의 반공, 반북주의를 띄게 되는데, 이러한 형태는 표면상 반일처럼 보이는 요소를 일정한 형태로 포함하고 있지만 이들 모두는 일본 자체를 향해 있다기보다는 한국의 국내 사정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원화된 민족주의의 근간에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고도성장기에서 사회유동화로 넘어가는 과정에 존재하는 젊은이들의 사회적 불안감이 동시성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다른 나라의 민족주의적 주장을, 국가 간 외교 문제의 틀을 가지고 자국에 대한 공격이라고만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라고 지적합니다. 과거의 민족주의적 해석으로는 이러한 민족주의에 내재된 내부적 구도를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전형으로 하는 취미적인 민족주의도 있기 때문에 이러한 유희적인 부분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무엇보다도 현재 한중일의 젊은이들이 점점 우경화된 태도를 보이는 행동의 근거에 사회적으로 버려진, 사회유동화와 고도소비사회 속에서 비전을 제시받지 못하는 불안감에 주목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음 세대를 향해 어떠한 이념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옛 개발주의에 대한 향수를 떨쳐내고 새 시대를 열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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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
B. R. 마이어스 지음, 고명희.권오열 옮김 / 시그마북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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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북한을 구성하는 이데올로기를 묻는다면 유교, 공산주의, 주체사상이라고 합니다. 서양 언론인들은 "조지 오웰이 그린 1984의 유교적 구현", "두껍지만 피상적인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껍질로 겉을 감싼 유교의 박물관" 이라는 표현으로 북한을 묘사했고, 김일성이 연설을 통해 소련의 문화에 찬사를 바친 부분이나 문화의 영역에서 소련 문학계의 유행어 등이 사용되는 등의 상황은 외부에서 보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소련의 위성국가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과연 북한 주민들은 유교, 공산주의, 주체사상의 이데올로기를 믿고, 자신과 주변 세계를 그를 통해 바라볼까요? 북한의 지도자는 무슨 논리로 우상화되는지, 그의 사명은 무엇인지, 그가 이끄는 국가는 어떤 운명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마이어스는 북한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공산주의, 유교, 그리고 전시용 주체사상 이론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제시합니다.

북한의 사상은 일본의 가미카제 이데올로기로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일본은 3.1운동 이후 내선일체를 지배적인 슬로건으로 제시하며 두 민족은 여타의 모든 민족보다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민족주의 정책을 펼칩니다. 이러한 사상에 조선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단군신화와 백두산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일본의 천황숭배와 후지산과 대립시키는 구도로 만듭니다. 역사학자 이영훈의 말처럼 '민족 형성에 요구되는 신화와 상징도 일본의 것들을 의식하면서, 그에 저항하거나 그를 모방하면서 새롭게 만들어' 집니다. 북한의 이데올로기는 일본의 민족주의 사상에서 순수성은 그대로 계승한 반면 자신감은 배제하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즉, 조선민족은 순수한 민족이지만 그 성향은 마치 순수한 어린아이와 같아서 외세의 민족들에게 고통만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학적 성향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식의 모습으로, 너무 순수해 스스로는 살아갈 수 없는 민족상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민족상 속에서 그 순수한 조선민족을 지켜주면서 누구보다도 조선인스러운(순수한) 누군가를 갈망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김일성이며, 김일성 우상화입니다.

공산주의는 북한에서 완전히 죽어버렸다. 2010년 4월에 승인된 가장 최근의 헌법에는 공산주의라는 말이 완전히 빠져 있다. 유교와의 유사성은 그럴듯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외부인들을 위해 정권이 만들어낸 것이다. -《논쟁》p.457 

이러한 김일성의 모습은 어머니형의 이미지였으며, 그의 보호 통치하에서 어린이 민족(조선)은 마침내 건겅한 본능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는 비전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제국주의 일본의 선전선동처럼 지배적인 이원론은 순수 대 비순수, 깨끗함 대 더러움이였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구 소련의 공산주의의 사상인 대중 스스로에게 혁명의식을 고취시키는 부분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또한 1950년대 김일성은 공산주의자로 구성되어 있던 옌안파와 소련파를 숙청했으며, 더욱 민족주의적인 부분을 강화시킵니다. 이러한 성향은 극우적인 형태로 나타나며, 길거리에서 외국인들에게 돌팔매질을 하거나, 북한 주민과 결혼한 소련 여성을 지방 경찰들이 구타하는 경우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타 민족에 대한 물리적 위협은 쿠바의 흑인 외교관마저 예외는 아니였습니다. 이러한 인종차별적 요소들이 북한의 결속력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이것이 바로 정권이 원하던 것이였습니다.

1966년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중국과 북한 사이의 관계가 악화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김일성은 내부의 안전을 더욱 공고히 한 필요성을 느꼈고, 중국의 마오쩌둥이 공산주의 사상가로서 명성이 높았기 때문에 그에 대항하는 무언가가 김일성에게 필요했습니다. 독창적인 무언가를 찾던 김일성 숭배 선전자들은 주체라는 애매한 단어를 상기시킵니다. 이런 온건한 민족주의는 당시 동유럽 공산권에서도 팽배했기 때문에, 북한이나 소련에서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공산주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서양의 북한 전문가들은 이것이 북한 민족주의에 대한 대담하고도 획기적인 선언으로 잘못 해석하고 맙니다. 이러한 반응을 본 북한은 주체사상을 마르크스사상에 대한 김일성의 독창적인 기여로 요란하게 선전을 합니다. 이런 주체사상은 지나치게 진부하고 지루할 뿐만 아니라 북한 우상화 이데올로기인 부분에서 대치됩니다. 따라서, 주체사상은 외부에 보여주기식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내부의 사람들에겐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외국인 연구자들에게는 주체사상의 비일관성, 지루함, 그리고 애매함이 굉장히 진지하다는 인상을 주었으며 1945년부터 표방된 극단 민족주의가 실질적인 이데올로기라고 하기엔 너무나 단순해 보였기 때문에 이 주체 이론이 북한 주민의 삶을 지배한다는 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집니다.

북한에서 안내원을 난처하게 하는 좋은 방법은 그들에게 주체사상을 설명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 p.15 

겉으로 보이는 주체사상,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과 다르게 민족주의 국가인 북한의 모습을 여러 북한의 문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관점은 북한의 선전을 통해 북한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관점은, 모든 외국인들은 열등하다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으며 늘 비난하는 대상은 언제나 일본과 미국입니다. 이러한 반일, 반미감정을 통해 자국의 민족주의적 유대감을 결집시키고, 나아가 국가를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1990년대 이후 정보차단벽이 무너지기 시작하며 남한이 더 높은 수준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북한 주민들이 알게 됬음에도 체제유지를 할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민족주의적 결집이 큰 역할을 합니다. 심지어 남한주민의 경제적 풍요를 과장해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북한을 공산주의 국가라고 가정할 경우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미 2001년에 나온 북한의 소설에서 남한은 멋진 집과 차를 가지고 온갖 풍요로운 여가를 지내는 것으로 묘사가 됩니다. 하지만 풍요는 표면적인 것이며 물처럼 깨끗한 북한 주민과 달리 남쪽은 정신적인 부분에서 썩어있고 미국의 노예들이기 때문에 남한 사람들은 그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그리워하며, 결국 북한이 더 살기 좋은 곳이라는 논리를 폅니다.

햇볕정책은 김정일의 군대와 핵개발에 도움을 주면서도 그를 난처한 상황에 내몰리게 했다. 그는 남한이 더 우호적인 관계를 원한다는 사실을 좀처럼 인정할 수가 없었다. 남한이 미제의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 그렇다고 남한 대통령을 계속 비난함으로써 원조의 흐름을 끊어놓는 위험을 무릅쓸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남한 선전에 쉽게 접할 수 있는 조선중앙통신으로 하여금 남한에 대한 비방을 중단하도록 했다. - p.55 

이런 민족주의적 특성은 공산주의와 다르며, 일본이나 독일의 파시즘과도 성격이 다릅니다. 자기 민족을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세계의 틀을 다시 짜려 한 일본과 독일의 파시즘에 비해 아이들같이 순수하며 외부세계에 취약하다는 세계관은 이러한 제국주의적인 성격을 나타내기 힘들게 합니다. 즉, 우리는 순수하니 다른 더러운 민족은 건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외세주의가 필요한 것은, 이런 순수한 폐쇄정책에 따른 경제적 빈곤을 해명하기 위한 적으로서 일본, 미국 등의 대상이 필요합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는 인간의 가장 저열한 본능에 호소하는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계층을 아우를 수도 있습니다. 북한의 실제 이데올로기인 한 지도자를 민족적 미덕의 완벽한 화신으로 찬양하는 것은 그를 모든 학문의 최고 권위자로 찬양하는 것(스탈린)보다 덜 황당한 것이며 반미주의 또한 다른 나라의 선전 신화보다 역사적 근거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바라볼때 북한을 위협하는 진정한 것은 군사적 위협이나 경제적 압박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외부의 시각에서 볼때 흔히 할 수 있는 북한보다 우월한 경제적 풍요를 보여주면 주민들이 동요할것이라던가, 북한 주민들이 주체사상과 같은 비합리적인 선전을 믿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마이어스는 말합니다. 북한에 대한 제대로 된 대응을 하는 것, 그것은 북한 세계관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며, 북한 세계관을 굳이 전통적인 좌우 스펙트럼상에 위치시켜야 한다면, 극좌보다는 극우 쪽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마이어스는 우리가 북한 체제를 대단히 극단적이고 병적인 우파의 현현으로 봐야 한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책을 통해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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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유작 1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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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미움받은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그의 글은 도발적입니다. 우상파괴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히친스는 타고난 논쟁꾼이며, 누구도 그의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히친스는 자신의 저서《자비를 팔다》에서 성인으로 추앙받은 마더 테레사를 거침없이 비판했고,《키신저 재판》에서는 노벨평화상을 받은 헨리 키신저를 전쟁 범죄자로 규정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용기 목사급의 영향력을 가진 제리 폴웰 목사에 대해서도 어리숙한 사람들을 등쳐먹는 사기꾼에 불과하다고 공격하는가 하면, 종교를 비판한 히친스의《신은 위대하지 않다》는 도킨스의 책과 함께 무신론의 대표적인 서적이 되었습니다.

무언가를 비판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특히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을 공개석상에서 조금이라도 잘못 비판했다간 수없이 많은 반론을 받고 어쩌면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할 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히친스는 누구보다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논쟁을 펼칩니다. 전쟁범죄자라고 비판당한 헨리 키신저는 그의 책에 반박하지 못했고, 교황청은 마더 테레사의 복자 추대를 앞두고 히친스에게 가장 강력한 검증자인 악마의 대변인 역할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히친스는 진보적인 미국 잡지인『배니티 페어』에 마이너리티 리포트라는 칼럼을 연재하면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히친스는『더 네이션』,『애틀랜틱』등 여러 잡지에 글을 기고하고 책을 내면서 촘스키, 에드워드 사이드 등과 함께 미국의 외교정책, 그 중에서도 중남미와 중동에 대한 정책과 전쟁을 비판하는 지식인 논쟁의 최전선에 섰습니다.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히친스의 탁월한 논쟁은 가장 최근에 나온 이 책,《논쟁》에서도 여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미국 건국의 주역들이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게 히친스는 그들이 보고 듣고 싶어하지 않은 진실, 미국 건국의 주역들은 결코 종교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무신론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군대 내에서 극단주의 기독교인들의 개종 권유에 대해선 국가에 대한 반역 행위에 가깝다고 일침을 놓는가 하면,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대통령, 존 케네디에 대해서도 도덕적 장애자이자 정치적 재앙이라는 독설을 퍼붓습니다. 영국의 찰스 왕세자에 대해선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약해빠진 헛소리꾼이며 찰스가 수많은 영국 과학자들의 업적을 헐뜯고 있다고 말합니다. 2008년 9월 세계금융위기를 불러온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분석하면서 기득권의 욕심을 빈곤층이 메워주는 구조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히친스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들은 언제나 제국주의자, 전체주의자, 허무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지도자 숭배자, 미신을 믿는 자 등 비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인 이데올로기와 사람들이였습니다. 국가의 이름 아래, 종교의 이름 아래 벌이는 사람들이 일으킨 폐해를 직시하면서, 히친스는 책에서 언급한 대로 2001년 이후로 그가 쓴 글은 한 단어도 예외 없이, 노골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그 증오스럽고 허무주의적인 주장들만이 아니라 그 주장들을 어떻게든 변명하려는 사람들을 반박하고 물리치기 위한 것이였습니다. 히친스는 이러한 태도를 평생 유지할 수 있었는데, 바로 이 책《논쟁》이 그가 죽기 반년 전에 마무리한 히친스의 5번째 선집이자 마지막 책이기 때문입니다. 히친스는 투병중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큼 생기있는 회의주의자적인 모습을 책을 통해 보여줍니다.

 침묵은 무덤 속에서도 한없이 할 수 있으니, 논쟁과 반목을 기쁘게 찾아 나서라. 아무리 귀에 달콤해도 비이성을 경계하라. 초월적인 경험을 주장하면서 무언가에 복종하라고 말하거나 자신을 내놓으라고 말하는 이들의 말은 듣지도 말라. 남의 동정을 불신하고 자신과 타인의 존엄성을 더욱 중시하라. 남들 눈에 교만하고 이기적으로 비치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 모든 전문가를 그저 포유동물로 여겨라. 불공정과 우둔함을 절대로 방관하지 말라. 그대 가슴속에 존재하는 대의명분과 변명을 늘 의심하라. 남들이 그대에게 맞춰 살아가길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그대 또한 남에게 맞춰 살아가지 말라. -《젊은 회의주의자에게 보내는 편지》

'의심스러운 것을 의심하라'고 외치며 거짓을 폭로하고, 불의를 비난하고, 위선을 까발리는 히친스의 태도는, 때로는 너무나 과격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이기도 합니다. 그의 가시돋힌 말로 인해 때론 망나니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히친스처럼 생전에 과격한 사상가이자 망나니 취급을 받았던 한 사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권의 책으로 세계를 뒤흔든 사람, 인권이라는 개념을 모든 사람들의 상식으로 만든 남자, 바로 토머스 페인입니다. 히친스는 반대파가 만드는 의견의 불일치야 말로 개인의 진실성, 사실이 뒷받침된 논쟁, 진정한 진보, 나아가 민주주의의 앞날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웅변합니다. 히친스에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가 지독한 애연가이자 애주가였다는 사실입니다. 향년 62세라는, 미국 평균 수명보다 한참 못 미치는 생애를 살다 갔기에, 이 책을 마지막으로 그의 독설을 더 이상 들어볼 수 없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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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5-14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남자의 종말 - 여성의 지배가 시작된다
해나 로진 지음, 배현 외 옮김 / 민음인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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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석기 시대 이래 가족을 부양하는 것은 남자의 역할이였습니다. 남자가 일하는 것이 생존에 더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습니다. 저자 해나 로진은 변화하는 사회상, 여성이 일하고 남성이 가정을 돌보는 것이 결코 특별한 사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여성이 어느정도 남성을 따라잡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면에서 여성이 남성을 능가하고 있음을,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성 혁명의 결과이기도 하며, 경제적 구조의 변화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권력 상층부는 여전히 남자들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를 비롯한 여러 측면의 세력 구도가 변화하는 속도만 두고 보았을 때, 이런 상황은 시대의 마지막 유물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통계가 말하고 있는 것은, 현대 경제는 여자가 주도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의 기본은 경제 구조의 개편입니다. 과거 남성들이 지배하던 일자리들이 사라진 반면, 거의 같은 숫자의 일자리들이 새로 생겨났는데, 새로 생겨난 분야는 지속적으로 여성이 지배하는 분야입니다. 미국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9년부터 미국의 노동력의 절반 이상을 여성이 차지하기 시작했으며, 2010년엔 여성이 남성보다 더 높은 소득의 중앙값을 기록했습니다. 2011년에는 관리직과 전문직의 51.4퍼센트를 여성이 점유했습니다.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많이 일하고, 더 돈을 잘 번다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며, 미국만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미래의 인재들을 예측할 수 있는 대학 졸업률을 보면, 미국에서 석사 학위 취득자의 60퍼센트가 여성이며, OECD 34개 국가에서 여성의 대학 졸업률이 남성보다 높은 국가는 27개국에 달합니다.

이는 장기적 관점에서, 현대의 경제는 여성이 규칙을 만들고 남성이 따라가는 흐름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자들은 더이상 경제적 안정이나 사회적 영향력을 위해 남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여성 스스로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섹스의 값어치를 높게 유지해야 할 동기가 없게 되었고, 일종의 성 혁명이 이루어졌습니다. 2011년에 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가 37개국에서 연구한 결과, 젠더 평등이 성적 규범의 감소로 이어졌음을, 즉 섹스를 많이 하는 나라가 좀 더 페미니스트적인 나라라는 점을 밝혔습니다. 결국 성 혁명은 여성의 태도와 행동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성들은 실험을 하고, 새로운 역할을 맡고, 더욱 적극적으로 변했고, 사회가 부여한 온갖 자유를 누렸습니다. 문제는 성 혁명이 남성을 바꾸는데는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남성의 지배적 경제력이라는 가정에 근거한, 낡은 모델은 여전히 남성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남자들은 아빠 주부 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오랜 세월 고착된 사회적 압력입니다. 부양자 역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자들은 비정상적이고 미성숙하다는 사회의 꼬리표를 달아야 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반려자를 선택하고, 직업을 구하고, 가정을 구축하지 못한 남자들에게 정신적 미성숙 또는 영구적인 청년기에의 갈망이라는 질병에 걸린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남자들은 심지어 호모섹슈얼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정신과 의사 라이오넬 오브세이는 유사호모섹슈얼이라는 분류를 새로 만들기까지 했는데, 이는 게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남성성의 표준에 순응하지 못하는 남자를 의미합니다. 이런 남자다움에 대한 사회적 압력은, 때론 호모포비아적인 반응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여성의 영향력이 강해진 지금, 이에 대한 저항으로 남성우월주의적 메시지를 내며 여성혐오 성향을 내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결국 기존의 남성다움 이라는 사고방식을 버린 새로운 남자의 정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남성이 이러한 역할을 하지 못할 경우, 여성의 입장에서는 과거에 비해 더 많이 일하게 되었지만, 육아의 부담은 덜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결혼을 회피하게 됩니다. 이는 사회의 존속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우려할 만한 현상입니다. 수십 개 국가에서 실시된 연구에서 알 수 있듯이, 기혼 남성이 미혼 남성보다 더 행복하고 건강하며 장수합니다. 기혼 남성들은 심장 질환이나 폐 질환, 암, 고혈압, 당뇨 또는 우울증이 발병할 확률이 더 낮습니다.

해나 로진이 말해주는 여성의 약진에 대한 이야기는 미국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해나 로진은 책의 마지막 장인 8장에서 아시아 여성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대표적으로 한국을 거론합니다. 한국은 지금 여성의 진출과 과거의 고정관념의 충돌로 인해 경제적, 문화적 위기를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야 하지만 여전히 얌전한 여자이자 전통적 아내로 남아야 한다는 사회의 양면적 메시지 사이에 낀 한국 여성들을 소개하면서, 한국은 현재 이런 사회적 패러다임 전환기의 한가운데에 있다고 말합니다. 연 수입 4000만원 이상, 서른 살 이상의 전문직 독신 여성을 뜻하는 골드미스의 대두는, 여자들은 이제 성공하기 위해 남자가 필요하지 않기에, 진정으로 인생을 같이 하고 싶은 남자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해나 로진은 부정할 수 없는 사회의 변화를 보여주면서 가부장제가 이미 죽었음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남성과 여성 모두가 피해자가 되지 않는 길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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