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에서 애거서 크리스티 원작, 존 길러민 연출의 1978년작 [나일 살인사건]을 방영한단 소식을 접했다. 추리소설 광이던 어린 시절 원작 소설을 꽤 흥미롭게 읽었지만 애거서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에 비해 뛰어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더구나 티비 브라운관으로 두 차례 접했던 영화는 제인 버킨, 베티 데이비스, 올리비아 핫세, 미아 패로우 등 당대의 여배우들이 총출동한 호화 배역진에 비해 작품 자체는 맥빠진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번 방영 소식에 다시 한 번 볼까 고민 중이나 아마도 거듭 보진 않을 듯한데 다만, 그로 인해 [나일 살인사건]과 인물 구도 및 플롯이 거의 겹친다고 할 수 있는 같은 저자의 [끝없는 밤]이 연상됐다.(역시 영화화 됐으나 원작 특유의 나른하고도 음습한 분위기만 답습했을 뿐 영화적으론 평작에 그쳤다.) 아니, 정확히는 [끝없는 밤] 중에 인용된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전조] 혹은 [순수의 예언]이 떠오르더니 도무지 머릿 속을 떠나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표면적으로 볼 때에 [나일 살인사건(Death on the Nile, 1937년)]과 [끝없는 밤(Endless Night, 1967년)]은 시간과 공간적 배경 차이 뿐 두 여성과 한 남성의 삼각관계로 진행되는 중심 줄거리부터 트릭 구성 및 살인 음모의 배후와 결말까지 비슷하다. 허나 추리소설로서의 완성도 뿐 아니라 작품의 몽환적인 분위기, 장르소설을 넘어서 인간 내면의 음울한 본능과 욕망 그리고 타락과 파멸을 예리하게 들춰낸 문학적 품성 측면에서 [끝없는 밤]이 몇 수 위라고 할 수 있다. 30년 늦게 출판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크리스티 여사가 애정을 갖고 있던 [나일 살인사건]의 플롯을 한층 완숙해진 필력으로 문학적인 야심까지 곁들여 자기 리메이크 삼아 완성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 매일 밤 또 매일 아침 어떤 이는 불행으로 태어나고 매일 아침 또 매일 밤 어떤 이는 달콤한 기쁨으로 태어나며 누군가는 끝없는 밤으로 태어난다 ...' 애거서 크리스티의 대표작 [끝없는 밤]에 모티브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여러 번 중요하게 인용된 시 [순수의 전조] 전문을 남겨둔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상을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기 위해

그대 손 안에서 무한을 붙들고

찰나 속에서 영원을 붙잡아라

 

새장 속 붉은 가슴 울새 한 마리가

온 천국을 분노케 하고

산비둘기 가득한 둥지 하나가

지옥 구석구석까지 떨게 한다

 

주인집 문간에서 굶어 죽은 개

한 나라의 멸망을 예고하며

길 위에서 혹사 당한 말 한 마리가

천국에서 인간의 피를 요구한다

 

사냥꾼에게 잡힌 토끼의 울부짖음

갈기갈기 뇌를 찢고

날개에 상처 입은 종달새는

천사의 노래를 멎게 한다

 

무기를 다듬은 싸움닭이

떠오르는 태양을 위협하며

늑대와 사자의 울부짖음

지옥으로부터 인간의 영혼을 고양한다

 

여기저기 헤매는 들사슴은

인간 영혼을 근심에서 지켜주며

혹사 당한 어린양은 반목을 일으키나

백정의 칼을 용서한다

 

저물 무렵 활개치는 박쥐

믿음 없는 이성에서 비롯되며

밤을 노래하는 올빼미는

신심 없는 자들의 두려움을 얘기한다


작은 굴뚝새를 해하는 이

인간의 사랑을 받지 못하며

황소를 분노케 하는 자

여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날파리를 죽인 어린 소년

거미의 증오를 받으며

풍뎅이의 정령을 괴롭히는 자

끝없는 밤에 침실을 엮는다

 

나뭇잎 위 애벌레는

그대 어머니의 슬픔을 반복하니

나방과 나비라도 죽이지 말라

최후의 심판이 가까이 왔다

 

전쟁을 위해 말을 훈련하는 자

극지대를 통과 못하니

거지의 개와 과부의 고양이를 먹이면

그대가 살찌리라


여름 노래를 부르는 각다귀는
험담하는 혀에서 독을 얻느니
뱀과 도룡뇽의 독은
질투의 발에 난 땀이며
꿀벌의 독은
예술가의 질투이리라

 

왕자의 예복과 거지의 누더기는
불쌍한 이의 가방에 핀 독버섯이며
악의로 말하여진 진리라도
그대가 꾸며낸 모든 거짓을 이긴다

 

응당 당연한 일이니
인간은 환희와 비탄을 위해 태어난 것
우리가 이를 올바로 알 때
세상을 무사히 지날 수 있다

 

환희와 비탄은 잘 직조된
신성한 영혼을 위한 옷
모든 슬픔과 기쁨 아래
비단으로 엮인 기쁨이 누빈다


아기는 강보 이상의 존재

이 모든 인간의 땅을 아울러

도구가 만들어지고 우리 손이 태어남을
모든 농부는 알고 있다


모두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영원한 아기로 만들어줄지니

이는 여성의 지헤로 인해 간파되며
그 자체의 기쁨으로 돌아온다

 

양과 개의 우짖는 포효 소리는
하늘의 해안에 부딪히는 파도이니

채찍 아래 우는 아이
죽음의 영토에 복수를 기록하고
허공에 펄럭이는 거지의 누더기
하늘을 갈기갈기 찢는다


칼과 총으로 무장한 병사
한여름의 태양을 겨냥하며
가난한 자의 동전 한 닢은
아프리카 해안의 모든 금보다 값지다

 

노동자의 손에서 짜낸 동전 하나로
구두쇠의 땅을 사고 파니
높은 곳의 가호 아래
온 나라까지 사고 팔리라

 

갓난아기의 믿음을 조롱하는 자
늙어 죽을 때 조롱받게 될 것이며
아이에게 의심을 가르치는 이
결코 썩어가는 무덤에서 나오지 못한다

 

아기의 신념을 존중하는 자
지옥의 죽음을 이겨낼 것이니
아이의 장난감과 노인의 이성은
두 계절에서 맺힌 하나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교활하게 소곤대며 묻는 자
답하는 법을 알지 못하고
의심의 말에 답하는 이
지혜의 등불을 꺼뜨린다

 

일찍이 알려진 가장 강한 독은
시저의 월계관에서 왔으며
무(無)는 인류를 파멸시키리니
마치 갑옷의 조임쇠와도 같다


금과 보석으로 쟁기를 두르면
평화의 기술은 질투에 굴복하고
수수께끼나 귀뚜라미 울음은
맞는 답을 의심하며
개미의 1인치는 독수리의 1마일,
절름발이 철학자를 미소짓게 한다


스스로 보는 것을 의심하는 자
결코 믿지 못하리니 좋을대로 행하라
태양과 달이 서로를 의심하면
둘 다 곧 사라지리니
열정 속에 빠져듦은 좋으나
열정이 그대 안에 깃듦은 좋지 않다

 

나라에서 허한 창녀와 노름꾼이
나라의 운명을 정하고
거리를 맴도는 창부의 외침은
늙은 영국의 수의를 짜내며
승자의 환호성은 패자의 저주이니
죽은 영국의 시체 앞에 춤을 추리라

 

매일 밤 또 매일 아침
어떤 이는 불행으로 태어나고
매일 아침 또 매일 밤
어떤 이는 달콤한 기쁨으로 태어나며
누군가는 끝없는 밤으로 태어난다


우리는 거짓을 믿기 마련
밤에서 태어나 밤에 사라질 눈이니
우리가 눈을 통해 보지 않을 때
영혼의 빛은 광채 속에 잠든다

 

어둠에 드리운 가여운 영혼에게
신은 현현하고 신이 곧 빛이 되나
빛의 영역을 사는 영혼에겐
인간의 모습을 드러낸다


-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 '순수의 전조 (Auguries of Innocence)' -

 

책과 인터넷을 뒤져 봤으나 내 머리와 가슴에 자연스레 와닿을 정도로 매끄럽게 번역된 시 전문을 찾을 수 없어 직접 영한사전 뒤져가며 다듬어 옮겼다. 행여 참조하실 분들께선 여기 적힌 시가 우리나라 문학계에서 공인된 번역이 아닌, 어느 아마추어의 자의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음을 염두에 두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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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from 잿불의 기억 2016-02-18 16:36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 탄생 125주년을 맞아 영국 국영방송 BBC에서 그녀의 대표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And Then There Were None)]를 3부작 드라마로 제작·방영 중이다. 오웬이라는 익명의 인사에 의해 '인디언 섬'에 있는 외딴 별장에 초대된 각계 여덟 손님과 집사 부부의 연이은 죽음을 다룬 미스터리로, 1945년에 만들어진 영화 속 설정을 차용해서 원작에 나오는 열 개의 인디언 인형 대신 꼬마 병정 인형으로만 바뀌고 그 특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