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의 프롤로그
'스코트랜드 고지대의 춤 - 낭만적인 작은 발레'라고 해석을 해야하는가.
오늘 영국 남서쪽 바닷가 도시 플리머스의 로얄 극장에 가서 이 공연을 보았다.
한국에도 남자들만 나오는 '백조의 호수'를 가지고 순외공연을 갔던 것으로 아는데, 바로 그 매튜 번이 안무 연출한 또 다른 발레 공연이다. 나는 그 백조의 호수를 보지도 않았고 해서, 별로 특별한 정보 없이 그냥 보게 되었다.
우선은 처음 들어서자마자 영국 클럽의 지저분한 화장실을 재현한 무대장치가 이것이 '고전'발레와는 사뭇 다를 것이란 것을 예고 혹은 경고한다. 그리곤 방송을 통해 일부러 강조된 스코트랜드 사투리로 휴대폰을 꺼줄 것 등을 당부한다. 관객들은 웃는다. 하여, 영국 남쪽의 관객들은 이 지저분한 화장실이 위치한 북쪽 스코틀랜드 지방으로 순간 공간 이동했음을 받아들인다.
2. 일막
인물들은 '골반찌르기' 같은 '모던한' 혹은 '불경스런' (발레는 우아한 것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분들에게) 동작들을 선보이며, 약물, 술, 섹스 같은 정착못한 젊은이의 도피처로써의 클럽 문화를 보여준다.
주인공 제임스는 약기운인지 자신을 찾아온 정령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 자신의 약혼자와의 결혼식날 그는 신부를 버리고 정령을 따라 숲으로 들어간다.
좀 산만했다. 사실적인 표정, 몸연기와 춤이 섞여 있는데, 이게 좀 정돈이 필요하다 싶었다. 스코트랜드 체크가 온통 도배된 무대도 눈이 뱅글뱅글 돌게 만드는 요소 중의 하나였다. 좀 자제를 하지 그랬나 싶었다.
3. 이막
이막은 일막보다 보기에 나았다.
그래도 여전히 약간 정신 없는 감이 있었는데, 떼춤이 너무 많아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가끔 혼자, 둘이, 혹은 셋이 춤을 출 때 그것이 좀더 길었으면 싶었다. 관객에게 무용수의 몸과 춤 자체를 감상할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고 스토리 진행하는데만 급급한 느낌이다. 무용수들의 기예에는 자신이 없었던 것일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을 정도.
제임스가 속한 도시와는 전혀 다른 세계인 숲, 정령들의 세계에서 제임스와 정령은 사랑을 나눈다. 숲 속의 정령들은 제임스가 그들의 세계에 들어오기를 원하지만, 대신 제임스는 사랑하는 정령을 자신의 세계로 데려가려고 한다. 하여, 그 정령의 날개를 가위로 자르는데.
붉은 피. 물감이란 걸 다 알아도 이상하게 보면 끔찍하고 심장을 자극하는 강렬함이 언제나 있다.
이렇게 또 한 사람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다른 한 사람을 재단했다. 다른 두 세계가 만나서 조화할 수 있는 길은 전혀 없는가. 누구 하나 꼭 사단이 나야만 하나. 그가 그녀에게 끌린 것은 바로 자기 현실의 비루함과는 전혀 다른 그녀의 세계, 날개로 표현되는 그 환상의 매력 때문이 아니었나. 바로 그 '다름' 때문이 아니었나. 그래놓고서는 싹뚝. 날개를 잘라버리다니.
그녀는 그렇게 피를 흘리면서 생명이 꺼져버렸다. 그의 아둔함에. 이게 정말 그가 천성이 포악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아둔했던 거다. 그렇게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아둔해서. (아씨... 또 이입이 되어가지곤 감정이 좀 격해졌다. 근데, 왜 나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모두 다 아둔한 거야. 진짜.)
잃고 나선 자책한다. 그러다 정령의 죽음에 화가 난 친구 정령들의 분노를 사서 죽었다. 그리고 자신이 버린 신부와 그녀를 사랑했던 자신의 친구가 함께 살게 된 집의 창문 밖에서 날개를 파닥이며 기웃거리는 정령이 되어버린다.
4. 부연설명
좀 황당한 결말인데. 어디 글을 보니깐 이 정령이란 것이 (전설의 고향 식으로 풀자면) 죽어서 저승으로 확 가버리지 못하고 이승을 기웃거리는 그런 중간자적인 존재라고 하더라. 하여. 그도 한맺힌 귀신이 된 것이라고나 할까.
안무가 매튜가 뮤지컬도 많이 한다고 한다. 얼마전에는 런던에서 매리포핀스를 뮤지컬로 만들어서 호황 중이라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지 고전적인 발레를 기대하고 보면 황당할 것 같고, 뮤지컬과 발레의 중간에서 뮤지컬에 가까운 오락성 쪽으로 약간은 더 기운 듯한 그런 느낌이다.
5. 영국관객
관객에 대해서 한마디. 같이 간 친구가 잘 표현 했는데 여기 온 관객들 나이를 다 합하면 지구나이 보다 더 많을 것 같다고. ^^ 정말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 할머니들, 혹은 중장년 층들이 많으셨는데, 예술계의 전문가라기 보다는 모두 지역 주민분들인 것이 거의 확실했다. 가끔 이렇게 공연을 보다 보면, 영국인들에게 공연을 보는 것이 정말 친숙한 문화라는 인상을 받는다. 즐기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 편하게. 극장의 문턱이 낮다. 그들의 전통이니깐 그런가.
우리나라도 서구화가 중간에 급격히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전통적인 마당이나 시장에서 이루어지던 판소리, 탈춤, 꼭두극 등에 그렇게 친숙하게 어울렸을 지도 모르겠다. 극장에 찾아가서 어두운 객석에서 보는 서구식 공연 문화는 아직 낯이 설고, 전통의 공연은 잘 행해지지도 않는데다가 감상하는 법도 거의 잊어서 서먹하고.
한국 공연계가 안고 있는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6. 나의 에필로그
극장 앞 광장에 장이 열렸길래 살라미를 좀 사왔다. 유럽 각지에서 온 장사들이라 다양하고 재미났다. 프랑스 치즈, 독일 쏘세지, 이태리 햄, 스페인 올리브 등등.
밥 먹자. 배고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