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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무사 이성계 - 운명을 바꾼 단 하루의 전쟁
서권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조선왕조 500년 시대를 열었던 태조 이성계. 타이틀만 놓고 보면 카리스마 있고 딱딱한 듯한 인상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은 “시골무사 이성계”. 한마디로 내가 알고 있는 이성계의 이미지와 전혀 맞아 보이지 않는 제목이 호기심을 자극했고, 왠지 모르게 초라하고 초췌해 보이는 듯한 초로의 남자가 말 위에 있는 모습의 표지가 인상적이어서 읽게 된 책이었다. 남자를 위한, 남자소설이라는 평론가들의 말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내가 읽고 싶은 것을 읽은 것뿐이다. 남자소설이라고 해서 여자가 읽지 못할 까닭은 없었기에…
‘운명을 바꾼 단 하루의 전쟁’ 이라 칭한 책 속의 전투는 1380년 고려 말 전라도 지리산 부근의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이겼던 “황산대첩”을 무대로 한다. 만 명이 넘는 적들, 천 명이 겨우 넘는 아군 병사들… 한때 아버지처럼 따랐던 최영이었지만 지금은 성계의 사병인 가별치들만을 이끌고 전투를 벌이라 명한 최영. 패한다면 자신도 죽고 나라가 흔들릴 터이고 이긴다 해도 천덕꾸러기의 변방 무사의 신세를 면치 못할 힘겨운 싸움이다. 중앙군을 이끌고 있는 변안열, 정몽주와는 사사건건 충돌하고, 왜군의 젊은 무장 아지발도는 강하다. 그렇다보니 성계의 처지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객관적인 눈으로 보기에 결코 이길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전투였다. 다만 전투의 와중에도 병사들에게 계속 풍등을 만들도록 하는 것이 뭔가를 암시하고 있지만 과연 풍등을 어찌 사용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직접적으로 그 내용이 언급될 때까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책을 읽으면서 거슬렸던 것이 또 하나 있었는데 책의 타이틀은 ‘운명을 바꾼 단 하루의 전쟁’, 하지만 책 속의 성계는 한 나절 만에 전투를 끝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차이가 묘하게 거슬렸었는데 그 내용은 책의 중반부를 넘어서 후반부의 후반부에 가서야 반전으로 나타난다. 등장인물 소개에서 나오듯 정도전과 이성계의 만남은 황산대첩이 일어난 1380년 이후였지만 작가는 이성계의 군사를 자처하며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는 인물로 정도전을 선택해 이야기의 흥을 더하고 반전을 이끌어낸다.
작가가 그려내고 있는 책 속의 이성계는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매력적이다. 사병인 가별치들과 함께하는 소탈하고도 정감가는 모습과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군들에게 아이를 잃고 미쳐버린 여인 하나까지도 신경을 쓰는 인간미 넘치는 모습과, 결단력과 통솔력까지 겸비한 그의 모습은 극의 후반으로 갈수록 한 나라를 건국할 수밖에 없는 운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 운명과 함께하는 것은 두란과 처명 부대를 필두로 한 이성계의 사병부대인 가별치들. 그들은 형제의 피를 나눈 자들로 결속력이 대단하여 서로를 귀히 여기며 신뢰하는 모습이 전투를 통해서 잘 그려져 있다. 그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 전쟁을 이겼을까… 이 책에는 그려져 있지 않지만 성계가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것을 한눈에도 알 수가 있었다. 그렇게 시골무사였던 이성계는 그들과 함께 왜군을 멸하고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의 내 소감을 간략하게 말해보자면 이렇다. 훌륭하다. 이렇게 재미있고, 또 장중하기도 한 역사소설 정말 오래간만에 읽었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어디를 봐서 남자를 위한 남자소설이라 말하는 것인지 모르더라. 내가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소위 말하는 남자들의 소설, 거친 표현들이 난무하고 성적인 표현도 거침없이 쓰여져 읽기가 껄끄러운 그런 소설과는 아예 그 태생 자체가 틀리다. 거친 표현 하나도 없이 여자인 내가 읽기에도 전투에 대한 흥분과 열기가 코앞에서 느껴질 정도로 정중하고 말끔한 문체들로 전투 장면을 그려내고 있는 이 책은 정말 내 마음에 들었다.
아마도 황산대첩 이후 원대한 꿈을 갖게 된 이성계의 모습이 소위 말하는 남자들의 로망이라 생각해서 그런 것이지… 싶지만 여자에게도 꿈이 있고 야망이 있다. 남자들 스스로가 여자들과 분리시켜서 말하는 원대한 포부라는 것은 남자들만을 위한 단어가 아니다. 나는 이성계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놓은 단 하루의 전쟁 이야기인 이 “시골무사 이성계”를 보면서 꿈의 실현이라는 것은 늦고 빠름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성계에게 방랑은 꿈의 연장이었다. 변방에서 말을 달리며 누렸던 자유와 인월에서 아지발도와 싸우며 품었던 꿈의 부피는 왕좌의 자리보다 훨씬 컸다.
- p.367 에필로그 中
이후 조선을 건국한 뒤 태조의 자리에 있다가 상왕을 거쳐 태상왕의 위치에 있던 시절, 이성계는 이미 늙어버린 두란, 처명과 함께 방랑을 했다고 한다. 꿈을 품고 그 꿈을 쫓던 그들에게 안락함이라는 것은 거친 변방보다도 못했던 모양이다. 뒷방 늙은이 신세를 면치 못했을 나이라는 패널티와 중앙의 업신여김까지 받으며 변방을 전전한 그가 조선이라는 500여년을 이어나갈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이유는 꿈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책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 작가분이 궁금해졌었다. 그래서 찾아본 작가의 이름은 서권. 이 책의 저자인 그는 2009년 5월 11일 이 장편 역사소설인 “시골무사 이성계”를 탈고한 후 경천 작업실에서 친구, 선후배, 지인 모두를 불러 그윽이 한잔 한 후 홀연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정말 아쉬웠다. 소설의 이성계의 나이와 작가의 나이가 비슷하다는 사실에서 의미를 찾아보지만 그래도 ‘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도 있건만 차라리 살아주지…라는 아쉬움 섞인 독백만 나직이 읍조려 본다.
PS : 가슴아픈 한가지는 책을 읽다가 바닥에 떨어뜨리면서 책이 구겨져버린 것. 정말 마음 아파 죽겠다.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꺼내 보고 싶은 책인데 이런 실수를 하다니… 나 자신이 원망스럽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