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자
정찬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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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야말로 안식이라고 누가 이야기 했는가. 여기에 죽지 않는 존재가 있다. 그에게 죽음이란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불과하기에… 환생이라고 하는 종교적이기도 하고 미신적이기도 한 장치로 인해 그는 영원을 살아간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그가 죽는다고 해도 그는 어딘가 다른 공간의 “누군가”가 되어 다시 살아갈 것이다.

주인공인 ‘나’, 케이는 보통의 사람들이 으레이 그러하듯이 환생을 믿지 않는 자이다. 객관적인 사실들을 쫓는 기자라고 하는 직업을 가졌기에 더 단단한 정신적인 무장을 한 그였지만, 종군기자로 일하던 시절 이라크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만난 이브라힘 이라는 청년을 만나면서 그 단단한 무장에 균열이 일어난다. 스스로를 죽지 않는 존재라고 말하던 청년 이브라힘. 그는 이라크 전쟁으로 죽었지만 녹음기에 담긴 그의 이야기는 ‘나’를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환생’ - 아랍인 청년 이브라힘은 자신의 수많은 전생들을 기억한다고 한다. 한 전생에서 그와 ‘나’는 살인이라는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로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십자군 이야기의 한가운데에 있던 그들은 예수의 삶을 함께했던 여인으로서의 전생의 기억을 가진 이집트 와지르의 기록관과 십자군의 사제로 만나는데 십자군의 사제였던 ‘나’는 예수가 평범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진실을 숨기기 위해 이브라힘을 창으로 찌른다. 그것이 ‘나’와 이브라힘이 얽혀있는 전생. 그리고 그들은 현재 다시 만난 것이다. 우연처럼 그들이 다시 만난데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브라힘이 말하는 전생들은 그가 죽지 않는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으로 0세기에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의 기나긴 시간을 존재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전생들 중 일부를 공유하므로 인해 아마도 이 만남이 없었다면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자신의 친모와의 얽힘을 위한 시간의 안배가 아니었을까. ‘나’의 친모는 신내림을 받고 ‘나’의 시간에서 스스로 떨어져나갔지만 친모의 넋을 기리기 위한 넋굿을 통해서 무당의 몸을 빌린 어머니와 만나서 다시한번 ‘나’의 시간과 친모의 시간이 교차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짊어졌던 과거의 짐들, 친모에 대한 원망과 슬픔을 비로소 벗는다.

이 이야기들은 시간의 파이프라인을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무척 혼란스럽다. 게다가 환생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예수, 십자군 이야기 그리고 이라크 전쟁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소설 속으로 끌어들여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를 만들어낸다. 그 운명에 저항하고자 몸부림쳤던 ‘나’의 어머니도 있다. 그렇다보니 한번 읽어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그렇다고 두번읽어 이해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느껴지는 것은 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죽음이 모든 것의 종말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원초적인 물음. 환생은 그 물음에 대한 조심스럽게 말해보는 하나의 해답이리라.

나는 환생을 믿지 않는다. 종교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 환생이라고 하는 현상이 존재하기를 바라는 인간 중 하나이기는 하다. 왜냐하면 죽음이 삶의 끝이라면 그 허무를 향해 내달아야만하는 우리의 생이 얼마나 힘에 겨울 것이겠는가- 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죽음 뒤의 세상인 ‘천국’이라는 곳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것이 정답일지는 알 수 없다.

이 책속에서 말하는 환생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우리들은 모두 유랑자일 것이다. 끝나지 않는 시간 속을 떠돌 듯이 살아가는…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서로 교차되는 순간만이 생에 대한 의미를 갖겠지. 원컨대 환생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이브라힘처럼 전생을 기억하는 일만은 절대 없기를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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