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구의 삶, 사랑의 말 -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
양효실 지음 / 현실문화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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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전에 맥긴리의 사진은 도발, 청춘이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은 맥긴리의 사진을 통해 그 어떤 말보다 '자유'와 이를 표현해낸 그들에게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용은 전혀 우습지 않지만 제목만큼은 눈에 확들어오는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책이 있다. 천 권도 아니고 이제는 만 권 정도는 읽어야 스펙으로서의 독서량을 인정받는 시대에 다분히 유혹적인 책제목이다. 하지만 이런 책을 읽지 않더라도 대략적으로 타이틀을 통해 그 내용이 짐작되는 책이 대부분이다. 당연한 소린데 굳이 언급하는 까닭은 양효실 교수 [불구의 삶, 사랑의 말]은 적어도 내게 있어서 만큼은 제목에서 짐작했던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기 보다는 조그만 구멍가게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창고형 마트안에 들어와 있음을 깨달은 수준이었다. 그것도 세계 최대 규모의 마트.


'불구의 삶'이란게 무엇인가. 사실 자주 접하는 기도문 내용중에 '정신적 불구'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부분을 입에 올릴 때 마다 나이들어 신체도 완전치 못하지만 정신과 영혼 역시 불구인게 맞구나 싶을 때가 많았다. 저자는 비행청소년, 우울증환자, 예술가들의 삶들을 불구의 삶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삶은 평균, 평범, 보통이라 퉁치는 '사회성' 을 갖춘 사람들과 비하면 불구자가 맞다.


앞서 계속 이야기해 왔듯이 좋은 행동에는 개인의 존재와 욕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사회를 위한 것이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56쪽


스스로 만들어낸 불구의 삶 뿐 아니라 사회 혹은 제도가 만들어준 '불구'의 삶도 피폐하기는 마찬가지다. 사회성을 갖추고 그 속에서 '성공'도 했지만 상대에 대한 배신감과 여자로서 벗어날 수 없는 억압이 정신적 불구의 삶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신체적 불구와 정신적 불구 중 그 어느 것이 더하나 덜하다 논할 가치도 없다. 둘 모두 '불구'인 삶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방법이 '사랑'밖에 없고 저자는 바로 그 사랑이 왜 필요한지, 왜 그것만이 치료약이 될 수 밖에 없는지를 이미 있었던 작품들 속에서 꺼내온다. 그 사랑의 표현은 물론 과격한 퍼포먼스가 될 수 있고 사회에 대한 거친 욕설이될 수도 있다. 표현의 방식의 제재가 필요한 것은 맞지만 그 근원이 결코 사랑의 반대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기적을 일으키고 기적을 보는 사람이다. 사랑은 눈을 멀게 하고 죽었던 몸을 일으킨다. 사랑은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서든 잠들 수 있게 한다. 248쪽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말한다. 명민한 독자라면 분명 책속에 등장하는 음반, 영화, 책들을 하나하나 찾아보게 될 것이라고. 명민해서가 아니라 나이 마흔이 다되어가는 데도 여전히 호기심천국의 뇌를 가진 나는 300페이지도 안되는 이 책을 읽는데 몇 주가 걸렸다. 이름만 대충 알았던, 타이틀곡만 알고 들었었던 앨범과 뮤비는 물론 언급한 시인들의 시집을 들춰보고 사진집을 들여다보고 보았던 영환데 내용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아 러닝타임 2시간이 넘는 영화를 다시 봐야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놓쳤던 놓칠뻔 한 내용들을 알게 되는 기쁨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수익은 이제 그만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쇠퇴되기 전에 우선 성장부터 해보자고 스스로를 괴롭혔던 내게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불구의 삶이면 어떠랴. 타인으로 부터 듣지 못하는 사랑이면 어떠랴. 내가 나를, 그리고 저자가 애써 찾아내준 '멋진불구'동료들이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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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온기 - 내가 먹은 채소에 관한 40가지 기억
김영주 지음, 홍명희 그림 / 지콜론북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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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가 따뜻하다는 사실을 알려준 책, 채소의 온기

언어에도 온도가 있다는 이기주의 [언어의 온도]를 읽은 후로는 '온도'라는 단어자체에 조금 민감해져 있기도 했고, 나는 과연 타인에게는 둘째치고서라도 내 자신에게는 어떤 온도로 살아왔는가 깊게 생각해왔던 요즘이다. 사실 뜨근한 오뎅국물 한 모금에 꽁꽁 얼어붙은 마음이 녹는다는 생각은 이전에도 했었다. 하지만 채소는 어떤가. 아삭아삭 씹히는 오이와 싱싱할 때 한입 베어물면 달큰한 향이 입안 가득 퍼지는 당근등을 떠올리자면 채소의 온도는 늘 '시원함'이었다. <채소의 온기>의 작가 김영주 작가는 그런 좋았던 기억들이 다름아닌 따뜻한 온기를 안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독자인 나는 못이기는 척 저자의 손에 이끌려 채소와 관련된 따뜻한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평온한 일상에 실련이 주어지듯, 너무 매운 고추를 잘못 먹고 찔끔 눈물 흘리는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인생은 가끔 이 매운맛이 있어 견디고 즐기면서, 또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88쪽

위의 문장은 저렇게 떼어놓고 보면 마음에 확 와닿지만 저 말보다 더 공감했던 것은 저자가 자취했을 때 고춧가루와 관련된 일화를 들려준 부분이다. 사실 자취를 시작하고 마트에 가서 고춧가루 가격을 봤을 때 나도 엄청 놀랐었다. 차라리 라면을 사서 스프를 꺼내 활용하는 편이 경제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독립한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단 한번도 내돈으로 구매해 본 적이 없는 양념이 고춧가루다. 저자는 언젠가 직접 고춧가루를 해서 보내드리는 날도 오겠지 하며 여운을 남겼지만 난 그냥 용돈을 챙겨드리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지난 가을 고추를 말리는 수고가 어느정도인지 간접 경험을 해봤기 때문이다.



 


-본문 중간중간 혼자 or 함께 분량에 따른 레시피가 귀여운 고양이 일러스트를 만날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위의 경우처럼 공감하고 따끈따끈한 추억을 끄집어 내기도 했지만 '생강'처럼 괜시리 뜨끔거릴 때도 있었다. 저자의 말처럼 생강이 채소인건 너무나 당연한데도 생강도 채소라고 하면 새삼스럽다. 서문에 언급한 것처럼 채소라하면 오이, 상추, 당근, 토마토처럼 날 것으로 아삭아삭 씹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강은 몸에 유익한 성분도 많기 때문에 오이먹듯이 목이 마를 때 씹어먹는다면 어떨까 생각하다가 갑자기 입안에서 강한 생강향이 나는 것 같아 책을 읽다가 혼자서 당황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역시나 목이 아프거나 감기 기운이 있을 때면 맨 처음 떠오르는 것이 감기약보다 생강차인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시금치를 생각하면 뽀빠이가 떠오른다는 저자의 말에 은근슬쩍 나와 같은 세대인 듯한 묘함 친근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친근감을 갖게 된 것은 헌 책을 팔아 장을 보았다는 내용이었다. 내게도 전재산이 오로지 책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엄청 가난하고 형편이 어려웠구나 싶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책을 팔아 산 돈으로 식재료를 구입하고, 요리라 할 만한 건 못돼지만 제법 입맛에 맞을 때 느껴지는 묘한 행복감을 느껴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저자에게 시금치 무침이 그런거라면 내게는 달래무침이 그랬다. 저자의 달래무침 이야기도 책에 수록되어있지만 유사한 에피소드가 시금치편이라 해당 이야기를 언급했다.


채소를 먹으면 몸에 활력이 느껴지고, 기분 좋아지곤 했습니다.

아마도, 수많은 채소와 관련한 기억과 추억, 그리고 맛있는 채소 요리를 나누었던 사람들의 온기 덕분일 겁니다.


여러분의 채소는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나요? 254쪽



사실 읽다보면 다들 알겠지만 30대 초중반 혹은 이제 막 독립을 시작해서 채소 하나하나 맛을 알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처럼 다른 채소지만 추억이 같을 수도 있고, 같은 채소에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저 건강하고 시원하기만 했던 채소가, 그 채소들의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얼마나 따뜻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깨닫느냐 일 것이다. 채소의 온기. 이 온기를 일단 한 번 느끼게 되면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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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100쇄 기념 특별판 리커버)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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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두번정도 더 읽어볼 요량으로 아직도 책상 근처 책꽂이에 꽂아둔 책..이 되어버린 <오두막>"



위의 문장은 2009년도에 오두막을 처음 읽었을 때 적었던 리뷰 내용 중 일부다. 그당시에도 한 번 읽고 마는 것이 아니라 최소 두번은 더 읽어볼 생각이라고 했던 책, 오두막.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10년가까이 흐른 2017년 5월에 오두막을 두번째로 읽었다. 그때와 지금의 내가 달라진게 있다면 나이 앞자리 숫자가 바뀌었다는 것도 있지만 세례를 받았다는 점이 아마도 가장 큰 변화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다. 윌리엄 폴 영의 후속작 [이브]를 읽었다는 사실이다. 이브를 읽던 당시에도 <오두막>과 유사한 점이 없는데도 자꾸 자꾸 두 작품이 비교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큰 변화가 있었던 만큼 감상도 역시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 하지만 자유의지에 의해 혼자라고 느끼며 평생을 괴로워하며 살아갈 수도 있고, 신 혹은 주변사람들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꼭 부여잡음과 동시에 괴로운 현실에서 탈피해 행복하게 살 수도 있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없다. 달라진게 있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신'의 사랑이 얼마나 과분하고 큰 사랑인지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2009년도에 오두막을 읽었을 당시에는 사실 반신반의했다고 표현해야 맞을 것 같다. 아무리 범죄자, 악인 역시 귀한 '신의 자녀'라 해도 어찌 부모가 제 자식이 잘못하고 있는데 그냥 놔둘 수 있는가, 그렇다면 신이 인간보다, 자기자식만 위하는 이기적인 부모들과 다른점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상처를 껴안고 살아가는 자식이 안타까워 그를 감싸주고 달래주는 정도로는 쉽사리 신이 인간을 사랑해서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없었다.


"메켄지, 당신이 생각하는 나와 실제 나는 같지 않아요. 사람들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내가 벌할 필요는 없어요. 죄는 그 자체가 벌이기 때문에 안에서부터 당신을 집어삼키죠. 내 목적은 죄를 벌하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걸 치유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죠." 196쪽


분명 2009년 당시에도 한 글자도 빠짐없이 읽었다. 결말에 이르러 감동했고 울컥하기도 했다. 그랬기 때문에 두 번정도 더 볼 요량으로 책상 근처 책꽂이에 꽂아두었다고도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 저 문장을 만났을 때 내 기분이 어떠했는지 표현할 방법이 없다. 먹먹함을 넘어선 아픔이었다. 죄를 지은 사람이 가장 괴로운 것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사람들의 비난도, 고통가득한 형벌도 결코 그의 정신까지 아프고 쓰리게 만들 순 없다. 제 자신이 죄라는 것을 인식했을 때 비로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런 괴로움을 갖게하는 것이 다름아닌 용서고 사랑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알았다. <오두막>이 왜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이렇게까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는지 지금에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해본 적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을 용서해본 사람들은 아마도 오두막 보다 더 신을 잘 이해하고, 자신의 지난날을 위로해줄 수 있는 책을 만난 적이 없었을거라고 확신한다.



"맥, 미시는 절대 혼자가 아니었어요. 내가 그 아이 곁에 있었으니까요. 우리는 한순간도 그 아이를 떠나지 않았어요. 내가 나 자신을 버릴 수 없는 것처럼 그 아이나 당신도 버릴 수 없어요." 294쪽



죽음앞에서 홀로 두려움에 떨었을 미시를 생각하면 아빠인 맥 뿐 아니라 독자인 나조차도 마음이 아프다. 맥과 비교할 수도 그래서도 안되는 아픔이 내게도 느껴진다. 그치만 믿고 싶다. 아주 간절하게 믿고 싶다. 미시가 결코 혼자인적이 없었을거라고. 이말은 어쩌면 나 역시 결코 혼자가 아닐거라고. 세상을 사는동안 많이 힘들고 눈물나고 가끔은 정말 그만두고 싶을 때 조차 미시곁에 예수님이 계셨던 것처럼 내 곁에도 예수님이 계신다고 믿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시간이 또 흘러서 내 나이의 앞자리가 다시금 바뀌고, 또 무언가 커다란 변화를 맞이한 10년 즘 뒤에 <오두막>을 읽게 된다면 하고 생각해본다. 그때는 조금의 의심도, 불안도 없는 완벽한 믿음의 상태가 되었으면 좋겠다. 미시곁에 예수님께서 계셨고, 내 곁에도 정말 계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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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 음식일기 - 매일매일 특별한, 싱그러운 제철 식탁 이야기
김연미 지음 / 이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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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길도 맘씨도 참 고운이의 음식일기, 365일 음식일기

제과제빵에서 출발 해 지금은 요리 혹은 식재료를 촬영하고 있는 저자 김연미님. 회화전공 포토그래퍼인 남편분의 순수함과 자신의 용기가 더해져 뜻밖의 일을 하고 있다는 저자의 이야기만 들으면 꽤나 강단있고 조금은 고집센 얼굴일 듯 싶지만 표지와 마지막 엔딩 부분에 다시금 등장하는 저자분의 얼굴을 보면 그야말로 모든 다 들어줄 것 같은 참 예쁘고 고운 얼굴이라 자꾸자꾸 표지로 되돌아오게 만들었다. 제과제빵이 전공이기 때문에 다양한 식재료를 가지고 만드는 빵, 케이크, 떡 등이 자주 등장하지만 그보다는 쉽게 따라 만들 수 있도록 레시피와 함께 기본적인 찬과 국, 단품요리등도 자주 등장한다. 365일 음식 일기라는 타이틀에 얽매이기 보다는 가족, 이웃 혹은 자주 들르는 시장 상인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내용들도 있어 읽다보면 그야말로 누군가의 '일기'를 읽고 있구나하는 마음이 든다. 블로그를 하는 저자라서 굳이 책으로 봐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우사기의 아침시간>리뷰에서도 적었을 것 같은데 PC 혹은 휴대폰으로 보는 것과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겨가며 읽는 재미는 우열을 가릴 수는 없지만 맛이 다르다. 우사기님의 책이 아침 혹은 브런치를 즐길 때 함께 하고 싶은 책이었다면 김연미님의 <365일 음식일기>는 저녁 혹은 새벽이다. 물론 책을 읽다보니 도저히 멈출수가 없어서 늦은 오후에 다 읽어버렸지만 종종 꺼내읽게 될 시간대는 분명 저녁 이후즘일 것이다.  ​

읽다보면 남편 '태영'님께서 자주 등장하시는 데 피곤한 아내분을 위한 상차림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회화전공이었다는 것을 마지막에 알게 되었지만 남편분의 사진책도 은근 기대가 될 정도로 저자가 담긴 페이지의 사진도 보기 참 좋았다. 그런 남편을 위해 정성껏 구웠다는 삼겹살 상차림 사진.


 

 

 

엄마의 살림솜씨를 자랑하는 것은 과하다기 보다는 참 부럽고 예뻐보였다. 세상의 거의 모든 엄마는 자식들의 자랑이며 롤모델이라고 생각한다. 철들기 전에야 엄마의 삶이 너무 고단해 보이고 닮고 싶지 않다고 투정부리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엄마처럼'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일이 아니라는 것,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엄마의 모습을 닮아가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저자의 어머니가 억지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재료를 손질하고 음식에 정성을 쏟았던 것이 좋은 습관이 되어 저자에게 남아있는 것처럼 나도 혹은 다른 누군가의 딸들도 그렇게 각자의 엄마를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와 함께 열 두살 터울의 언니 이야기도 종종 등장하는 데 언니가 있어서 그런지 여러모로 공감이 많이 되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들었던 생각은 난 저자처럼 친근한 이웃이 있을까? 혹은 이와 반대로 부족하고 모자르다고 생각하는 이에게 따뜻한 이웃이 되어주고는 있는가 하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것에 대한 서글픔이었다. 그래서 더 이 책이 참 소중하고 고맙게 느껴졌다. 이웃과 마음을 나누고 정성을 나누면서도 받은 것만 기억하고 준 것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저자처럼 나도 주는 기쁨을 배워야지, 더 많이 느껴봐야지 하는 목표같은 것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나누고 싶고 주고 싶은 이에게 이 책 부터 한 권 선물해주고 싶다. 요리도 잘 못하고 글도 잘 못쓰는 내게 그야말로 '책'은 고마운 존재다. 이 책이 그사실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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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강철의 숲
미야시타 나츠 지음, 이소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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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전 부터 여러매체에 기사가 실려 독서리스트 1순위에 올려두었던 미야시타 나츠의 [양과 강철의 숲]. 기사를 읽고서는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으로도 잘 알려진 잇시키 마코토의 <피아노의 숲>을 떠올렸다. 둘다 피아노를 소재로 한 이야기지만 비단 이 작품 뿐 아니라 <양과 강철의 숲>이 이전의 피아노를 소재로 한 작품들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피아니스트가 아닌 조율사가 주인공이라는 점일 것이다. 덕분에 그동안 제대로 주목받지 않았던 조율사분들의 이야기를 도무라를 통해 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어 저자 뿐 아니라 독자인 나조차도 책을 읽는 내내 즐거웠다. 소재도 좋았고 도무라가 조율사로서 한 발 한 발 내딛어 가며 성장하는 과정도 좋았다. 이 작품을 보다 더 매력적이게 만든 것은 본문에서도 총 세번이나 언급되었던 '하라 다마키'의 다음의 문장이다.

 

 

'밝고 조용하고 맑고 그리운 문체, 조금은 응석을 부리는 것 같으면서 엄격하고 깊은 것을 담고 있는 문체, 꿈처럼 아름답지만 현실처럼 분명한 문체.'

 

 

처음 저 문장을 접하고 책을 읽는 도중에 하라 다마키의 단편집을 찾아 읽게 될 만큼 정말 멋진 문장. SNS에도 저 문장을 맘에 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아 '함께'읽고 있구나 하는 묘한 기분을 들게 해준 문장.

 

 

가즈네를 통해 가정용 피아노만 조율하는 수준에서 멈춰져 있던 도무라의 목표가 콘서트홀 피아노까지 확장되는 결말이 조금 아쉽다 싶었다. 그러나 맨처음 혼자서도 숲에서 길을 잃지 않던 도무라가 이타도리, 야나기 등의 선배조율사들과 함께 그리고 고객인 가즈네에 이어지는 과정이 비단 양과 강철의 숲 뿐 아니라 저마다의 숲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람, 혹은 관계'의 중요성과 필연성을 일깨워주는 것 같아 결말까지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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