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트 베어스 - 곰, 신화 속 동물에서 멸종우려종이 되기까지
글로리아 디키 지음, 방수연 옮김 / 알레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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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의 곰종이 서로 매우 다른데도 불구하고 현재 곰 여덟 종은 모두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을 고유하고 있다.

함께 곤경에 빠져 있다. (프롤로그 중에서)

기후위기로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북극곰은 삶의 터전을 잃기 시작했고, 결국 멸종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어릴 때 부터 동물원에 갈 때면 북극곰 만큼은 내 손으로 카메라에 담아오던 내게는 끼니를 거를 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안타깝고 속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멸종위기의 곰이 북극곰만은 아니었다. 남은 종들을 포함 해 그 수가 다시 정상적으로 회복된 미국흑곰과 대왕판다 외에는 다른 여섯 종 모두가 위험에 처한 상황이었다. 책 제목을 그림책이나 어린이 동화에서 봤더라면 귀여운 여덟마리의 새끼곰의 재롱이었겠지만 이 책은 안타깝게도 저자가 긴 시간 만나거나 만남을 가지려했던 곰들의 진짜 이야기가 담겨있다. 처음 그가 곰의 생태를 조사하기로 맘먹었던 계기는 기후위기라기 보다는 인간과의 공존이 쉽지 않은 흑곰의 이야기였고, 그 결과는 '사살'이라는 잔인한 결론으로 이어졌다.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근처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는 이유였다. 물론 곰들의 습격으로 생명을 잃은 사건들도 빈번하게 발생했다는 점에서 무조건 곰을 보호하자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말처럼 '돌보미'라는 인간의 협조가 가능했던 것도 지금껏 곰에게서 우리가 가지는 상징이나 이미지가 '테디 베어'와 같은 귀염성과 인간과 유사하다는 의견(결론만 보자면 틀렸지만)에 기대어 살아왔다는 것도 부정할 순 없다. 실사영화로까지 제작된 안경곰 '패딩턴'만 보더라도 테디 베어와 함께 여전한 인기를 누리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왜 대왕판다를 귀여워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걸까? 187쪽

캐릭터화 되어 인기가 있는 곰이 아니라 종 자체가 인간에게 사랑을 받는 대왕판다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최근 특정 판다의 인기가 한국에서는 첨언 할 필요없이 굉장하다. 각종 굿즈에 책까지 엄청난 인기를 끄는 판다의 검은 얼룩은 '포식자를 속이려는 방어용 위장의 일부(같은 쪽)'지만 판다를 친근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다른 곰과와 달리 공격성이 거의 없다는 점과 나라의 수장이 친교를 위해 선물하는 '판다 외교'에 멸종위기에서는 벗어났지만 인공 사육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안전하다고만 볼 수 없다. 그런가하면 최근 국내 언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반달가슴곰은 '웅담' 이 특효약으로 알려지면서 다른 어떤 종보다 인간의 잔인함을 겪은 불운의 곰이기도 하다.

"기자님이나 제가 6개월 동안 겨울잠을 잔다면 몸에 남아 있는 게 많이 없을 겁니다." 담즙 내 우르소데옥시콜산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스티어가 설명했다. 우리의 근육은 쇠약해질 것이고, 겨울잠에서 깨어날 때쯤이면 뇌손상을 입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곰은 겨울잠에 들어갈 때 우르소데옥시콜산 수치가 그 증가분이 10퍼센트가 넘도록 치솟는다. 213쪽

긴 시간 겨울잠을 잘 수 있다는 점은 여전히 신비롭고 놀라운 부분이다. 물론 모든 곰이 겨울잠은 자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책을 읽고 알게 되었다. 또 이 좋은 성분을 반드시 곰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란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법이 개정되어 곰 샤육 금지법이 생겨나 이전보다는 곰 사육 산업이 저물고 있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챕터에서 다음의 문장을 보고 다시 절망하고 말았다.

북극곰은 이번 세기말을 넘겨 살아남을 가능성이 매우 적다. 383쪽

전반적으로 다큐를 보는 것처럼 내용과 별개로 흥미진진하게 읽었지만 가장 좋아하는 북극곰의 참담한 현실은 이 책이 널리 읽혀야 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의 말처럼 곰의 멸종속도는 엄청나게 빠르게 진행되지만 동시에 곰의 멸종을 걱정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수도 적지 않다. 특히 인류세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곰을 비롯 야생동물과 공존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이 맘에 들었다. 책의 첫 장에 담긴 추천인들의 추천사가 결코 과장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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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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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리. 소설 ’천 개의 파랑‘을 읽은 독자들은 ’콜리‘라는 단어에 이전과는 다른 의미부여를 하게 될 것이다. 기수 로봇 콜리는 아주 작은 실수에 의해 보통의 기수 로봇과 달리 질문도 하고 생각을 한다. 물론 로봇이 사고한다는 것이 맞는 표현은 아닐테지만 소설 속 콜리는 ’사고하는‘존재였다. 콜리라는 이름을 붙여준 우연재. 소설 속 배경은 현재보다 조금 먼 미래이며, 기수 로봇이 실재할지의 여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찰나의 유희를 위해 자신이 아닌 다른 대상을 잔인하게 부리는 인간의 성향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초반에는 연재와 콜리가 어떤 상황에서 만나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또 콜리가 내뱉는 로봇이 아닌 사유하는 인간에 가까운 질문과 대화들이 호기심을 자극해 미소 띤 채로 계속 읽어갔다. 그러다 연재의 언니 은혜가 등장하고, 자매의 부모와 관련된 내용이 등장 할 때면 마냥 웃을 수 없었다. 어쩌면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을지 모른다. 출산을 한 이후,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이후 모든 소설은 극을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보다 그들의 부모, 특히 엄마라는 존재에 관심이 갔다. 남편을 잃고 몸이 불편한 아이와 특정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아이를 동시에 기른다는 것은 기쁨보다 고통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장애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조금 더 ’손이 가야하고‘, '마음을 써야하는' 하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보경은 언젠가, 한강 노을을 바라보며 바퀴를 열심히 굴리는 아이들이 멈추지 않고 달렸으면 좋겠다고 소방관에게 말했다. 삶이 이따금씩 의사도 묻지 않고 제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린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벽에 부딪혀 심한 상처가 난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방향을 잡으면 그만인 일이라고. 우리에게 희망이 1%라도 있는 한 그것은 충분히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에너지가 될 것이라고. 83쪽

이런 맥락에서 콜리가 아이들의 엄마에게 접근하는 방식은 모범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 거리를 유지하고, 기다려주며 무엇보다 ’평가하거나 탓하지 않음‘이 맘에 들었다. 물론 이런 시선으로만 소설을 읽은 것은 아니었다. 콜리가 주변의 ’어른‘들과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며 영화로 더 잘 알려진 ’로봇 드림‘이나 김영하 작가의 ’작별 인사‘를 떠올리게 했다. 그 이전의 SF영화 중 손꼽히는 A.I 속 데이빗이 떠올랐다. 사실 데이빗이나 다른 로봇들의 최후가 안타까워 영화를 다시 바라보고 싶진 않지만 로봇 드림이나 ’천 개의 파랑‘속의 콜리는 그(?)들의 실존을 희망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물론 프로메테우스의 데이빗은 상상도 하기 싫다.

이 몸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었다면 애초에 생겨나지도, 태어나지도 않았을 거였다. 우주는 자신이 품을 수 있는 것만 탄생시켰다. 이 땅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가 각자 살아갈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정상의’ 사람들은 모르는 듯했다. 221쪽

어찌보면 로봇이라는 특수적인 상황을 제외한다면 결국 인간이 인간에게, 존재가 존재에게 상처주는 이유는 ’너보다 나를‘이라는 이기심에 비롯된다. 그러니 이타적인 마음이 보편화된 사회라면 휴먼이든 휴머노이드든 크게 상관없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던져준 것 만으로도 이 소설은 추천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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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조셉 켈리 지음, 안기민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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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관심이 처음 생겼던 건 7년 전 박승찬 교수님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삶의 길을 묻다>를 만나면서다. 성인이 되어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다른 신자들에 비해 '안다고'말할 수 있는 성인이 거의 없다. 어쩌면 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마치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느님을 묘사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관심은 생겼지만 <고백록>외에 다른 저술은 읽지 못했다. 그러다 만난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는 '이제 읽어라'라는 계시처럼 다가왔다. 고백록은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의 다른 저술서를 어떻게 접근하면 좋은지, 오래전에 읽어서 흐릿해진 성인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복습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많은 책을 저술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글쓰기의 동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느님의 권능과 선하심에 의탁하는 믿음을 증명하고, 그것을 고백하고자 하는 깊은 욕구를 느꼈다. "사실 내 마음속에서, 당신들 앞에서, 많은 증인 앞에서 내 펜으로 고백하고 싶은 것이다.<<고백록 10권 1장 1절>> (48쪽)

하느님의 은총이랄까.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은 누구에게라도 그 이야기를 꺼내고 싶다. 그것이 고백과 같을수도 있고 과하면 주님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화자찬이 될 수도 있어 경계해야 하지만 순전한 마음으로 고백한다면 누구라도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될 것 같다. 다만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이야기의 중심이 '주님'이어야 한다.

지난 50~60년 동안,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학문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글들을 읽기 위한 오직 한 가지 좁은 관점에 적용한 일종의 교의적인 환원주의에 빠져 있었다. 이제 이 환원주의를 넘어 아우구스티누스가 살았고 생각했고 저술한 세상의 넓은 전망과 더 광범위한 지평을 누리기 위하여 더 많은 관점을 신중하고 협력하여 사용하려 하고 있다. 197쪽

서두에 밝힌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생애나, 마니교에서 개종한 것까지 성인에 대한 관심에서 부터 저술서를 찾아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보니 집필의도나 성인이 진실로 알리고 싶었던 부분을 놓칠 떄가 있다. 그런점에서 이 책은 그동안의 연구방향과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쉽게 쓰여졌고 무엇보다 국내에 소개된 번역서외에논문을 포함한 원서를 찾아볼 수 있는 접근성과 기회를 열어준 점에서 정말 귀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자여야만 성인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닌 종교, 유일신 그리고 유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분명 아우구스티누스와 성인의 저술은 연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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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추기경의 행복 수업
정진석 지음 / 가톨릭출판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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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디서 왔는가?" 는 인간의 근본에 관한 질문이고, "나는 어디로 가는가?" 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에 관한 질문입니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라는 물음은 자신의 부모 이외에 사람의 근원이 따로 있음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어디로 가는가?" 라는 물음은 사람의 육신이 흙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지속되는 삶이 있음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각 사람이 죽기 전에 반드시 깨달아야 할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과제입니다. 18쪽



정진석 추기경의 행복 수업은 인류 탄생의 배경과 구성요소에 대한 간략한 서술 등을 포함해 상당히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무언가를 설명할 때 배경까지 아우르는 것은 그만큼 우리와 주님의 관계가 사소한 것부터 감히 볼 수 없고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내용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많은 내용 중 가장 와닿았던 부분은 결혼 생활이었다. 사실 결혼과 관련된 수업을 혼인 전에 교리로 접하기도 했지만 현실에서 다툼이 있거나 의견차이가 발생했을 때는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사랑이란 받는 만큼 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는 것입니다. 104쪽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고 이기심이라고 합니다. 같은 쪽


얼마 전 한 신부님의 강론에서도 유사한 내용이 나왔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의미는 주종의 관계라기 보다는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다. 또 미움의 씨앗은 다름아닌 서운함, 상대에게 기대하는 만큼 받지 못했을 때 드는 그 서운함이 씨앗이 되고, 그 씨앗은 물도 주지 않고 햇빛이 없어도 무럭무럭 자란다고 하셨다. 추기경님의 책을 먼저 읽고서 들어서인지 두 분의, 두 사제의 말씀이 깊이 다가왔다. 그저 주었다면 서운할일도 없으니 미움이 생길리 없고, 포기한다는 것은 더이상 ‘우리’가 아닌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이 아니던가. 추기경님의 말씀처럼 가정이 평화로워야 그 사회도 평화로울 수 있고, 그런 사회안에서 아이들이 성장해야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아 안타까웠다. 부부가 함께 대화해보라고 하셨던 질문 중 하나를 적어보면, ‘최근에 부모를 존경하는 청소년들이 드뭅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113쪽)를 보면서 청소년기의 나를 떠올려보았다. 또 내 아이가 지금과 같은 양육환경에서 자랐을 때 과연 나와 배우자를 존경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외국어도 듣기만 해서는 배울 수 없고 자기 입으로 발음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집 밖에서 험한 말이나 욕을 들었더라도 집에 와서 그 말을 하지 않으면 결코 배울 수 없습니다. 123쪽


같은 환경에서 자란 형제가 어른이 되었을 때,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보통은 비슷한 모습으로 성장한다. 환경이 같다는 것은 사회적인 문제도 분명 있지만 부모의 가치관이 잘못되었을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회는 구성원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를 줘야 합니다. 다만 결과의 불평등은 있습니다.’(140쪽)라고 하신 말씀이 이해가 되었다. 그러니 부모가 된 사람들, 자녀를 기를 수 있는 축복을 허락받은 이들이라면 ‘그저 주는 사랑’을 배우자 뿐 아니라 자녀사이에서도 해당되는 것 같다.


행복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지금 내가 가장 관심을 두는 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어린 아이를 양육중이며, 많은 부분 배우자와 의견의 차이를 느끼는 내게는 위의 내용들이 행복을 위한 전제조건처럼 느껴졌었나보다. 하지만 지금이 아닌 다른 때에는 교리적인 부분 혹은 고통과 질병, 사회관계에 대해 집중하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책이 답이다라기 보다는 주님 말씀에서 답을 찾는 가이드가 되어준다는 점에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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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이끄는 곳으로
백희성 지음 / 북로망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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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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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비밀스러운 번화가의 주택 그리고 요양원의 재벌 노인. 간략한 줄거리를 생략하고 키워드만 나열해도 충분히 흥미롭다. 그런데 배경이 프랑스 파리다. 직접 가본 경험이 없더라도 프랑스 주요 도시의 주택들은 개인의 바람으로 리모델링을 마음대로 할 수 없거니와 이런저런 민원처리에 있어서도 엄청나게 여유롭다 못해 속터진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파리 한 가운데 고급저택이지만 긴 시간 아무도 살지 않아 먼지가 켜켜이 내려앉은 그 주택을 매매하겠다는 사람이 등장한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다. 직업이 건축가일 것, 그리고 집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거주하던 사람들도 애정이 없어 비워둔 집을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 그것도 건축가를 찾는 것이 쉬운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워낙 위치가 좋은 주택이라 뤼미에르는 과감하게 집주인의 요구에 응하고 집주인 피터가 요양중인 스위스로 떠난다.

그곳에서 긴 시간 건축을 하면서도 ‘길’이란 사람을 위해서만 만들어진다는 편견을 깨고 자연을 위해, 작은 벌 한마리를 위해서도 길을 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나역시 마찬가지였다. 물길, 바람길 익히 알면서도 길을 열고 내는 건 인간의 특권인듯 생각해왔다.

초반에는 스위스에 있는 요양원 내의 비밀을 파헤쳐가는 추리물처럼 다가왔지만 뒤로 넘어갈수록 이 소설이 왜 그토록 극찬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빛이 강하게 들어와 사물들의 성격을 바꾸어놓듯, 이야기에 몰입할수록 소설의 장르가, 독자의 태도가 바꾸는 책이었다. 건축가가 집의 성격을 만들고, 거주하는 사람들이 이를 더 확장시켜가듯 독자인 내가 쌓아온 추억들이 어우려져 ’내면의 집‘을 지어가게 만든다. 작가와 건축가의 공통점이자 가장 큰 장점이 그대로 느껴진다.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맘에 드는 집이 있으면 우편함에 메모를 남겨두었고, 그렇게 듣게 된 이야기들이 쌓여 이 소설이 완성되었다고 말했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건축가로서, 작가로서 저자의 안목과 능력을 감히 칭찬하고 싶다. 소설인 만큼 스포를 거의 하지 않았지만 ’장르가 바뀐다‘만큼 강력한 스포는 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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