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평점 :
읽기 전까진 제목이 너무 낯설다기보다는 아,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국어공부를 다시해야 하나, 어째야하나. 암튼 사놓고는 몇 달을 그냥 언젠가는 이라고 하면서 놔두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낯설다 만큼 적확한게 없는 듯 싶다.) 하루키의 소설 제목은 물론 내용이 늘 맘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 <여자없는 남자들>의 경우는 읽자마자 바로 헌책방에 가져가 팔았다. 암튼 1Q84 이후로는 줄곧 하루키의 에세이만 읽었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라든가, 잡문집이라든가 등등. 그러다 이래저래 이별이 많았던 1월의 마지막 주, 작정하고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었다. 내 처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마치 일기장을 보는 듯 했겠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아, 물론 내 배우자가 외도를 했다던가, 내가 그림으로 밥벌이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도 그랬다.
"제 말 들으시죠. 이대로 안락사시키는 게 좋습니다."라는 것이다. 한 달 반 동안 길 위의 생활을 함께하고 12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주행거리를 새긴 푸조와 헤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두고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나 대신 자동차가 숨을 거둔 거라고 생각했다. -'현현하는 이데아' 57쪽-
푸조는 '나'를 대신하여 죽었지만 다행이라고 해야할 지 확신할 수 없지만 나의 OO은 다행히 죽음은 면할 수 있었다. 확신 할 수 없다는 것은 위의 문장처럼 '안락사 시키는게 좋았을 수'도 있겠다는 말을 주변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면 그렇게 방황하던 '나'가 친구 아버지인 일본화의 대가인 '아마다 도모히코'가 머물던 집에 머물게 된다. 물론 글의 흐름은 '나'가 그곳에 머물던 시절을 추억하는 내용이다. 스포가 될 수 있겠지만 1Q84와 마찬가지로 이 책도 미완처럼 느껴지는 완결인 것 같다. 암튼 일본화 화가인 도모히코가 숨겨둔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을 주인공인 '나'가 발견하게 되면서부터 기묘한 이야기도 함께 시작된다.
어쨌든 그랬던 이 책이 그렇게나 맘에 들었던 까닭은 '나'와 상황이 비슷해서 였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가 가장 애정하는 그의 전작 <태엽감는 새>와 유사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난 사실 지금도 밤새워 태엽감는 새를 몇 번이고 읽을 수 있다.) 1Q84도 좋았고, 색채를 읽어버린 ~ 그 작품도 좋았고, 무엇보다 하루키 월드로 입장시켜준 <상실의 시대>도 좋았지만 역시나 태엽감는 새 만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암튼 스무 살에 태엽감는 새를 읽고 참 많은 생각을 했던 것 처럼 마흔을 앞두고 읽은 <기사단장 죽이기>는 '나'를 내 입장에서 보던것을 '상대'의 입장에서 보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책속의 '나'처럼 무작정 차를 몰고 여행을 하듯 방향을 잃고 집안에서 정처없이 방황하던 나를 멈춰준 작품이기도 하다.
나는 줄곧 그렇게 느꼈다. 사람에게 마흔이라는 나이는 하나의 분수령이다. 그 고개를 넘어가면 더는 예전과 같을 수 없다. -'현현하는 이데아' 84쪽-
예순에도 새 인생은 시작되고 120세 시대를 향한 요즘은 '인생은 80부터!'라고들도 하지만 역시나 마흔의 벽은 높기만 하다. 물론 마흔을 넘기고서도 청년들보다 훨씬 더 청춘처럼 사시는 분들도 계시긴 하지만 어쨌든 내게도 '마흔'은 웃으며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후덜덜하게 하는 나이인 것이다. 그 마흔을 '나'는 4년이 남았다면서도 조바심치는 데 나는 만으로 계산해도 그보다 절반에 못미치게 남았으니 책을 읽는 내 맘이 이 부분에서는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 읽을 수 밖에 없었냐면,
일본 애니메이션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요괴세상, 도무지 현실성이 없는 듯한 시공간을 넘나드는 다차원 세계의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속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나의 고민과 상황이 오버랩되고 위로받을 수 있다는 점이 정말 놀라운 것 같다. 게다가 <태엽감는 새>때도 그랬지만 전쟁이란 상황을 만들어내는 악마도 '사람'이고 그 악마들 틈에서 다시 삶을 되찾는 존재도 '사람'이며 끝끝내 돌아오지 못할 만큼 여린 존재도 '사람'이라는 사실이 역시나 느껴져 가슴이 아팠다. 이단을 바라보는 하루키의 시선도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어 이런저런 이유로 여러부분에서 밑줄을 긋게 만들었다.
"위장한 축복. 모습을 바꾼 축복. 언뜻 불행처럼 보이지만 실은 기뻐할 만한 일이라는 뜻이야. Blessing in disguise, 그리고 이 세상에는 당연히 그 반대도 있을 테지. 이론적으로는." -'현현하는 이데아' 157쪽-
이제와 지난 삶을 돌아보면 위장한 축복이었던 것도 있고, 당연히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문제는 지금껏 그렇게 생각했던 일들이 또 내 나이 예순쯤에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면 반대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알고보니 축복이었다고 느껴지면 다행인데 그러면 정말 다행이지만 아니라면? 지금 이 방황이 축복을 위장한 불행인 줄 알고 버텨가고 있었는데, 이 시점에 이 작품을 읽은 것이 위로가 되었다고 느꼈는데 아니라면? 하고 불안해하며 책을 읽고 있는 데 마치 이런 어리석은 내게 작가가 혹은 누군가가 들려주고 싶었던 한 마디.
"설령 어떤 결과가 나오든 모든 일에는 반드시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어. 유즈와 헤어진 건 네게 몹시 힘든 경험이었을 거야. 나도 정말 안된 일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 결과, 너는 드디어 너 자신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 -'현현하는 이데아' 376쪽-
그래. 왜 이미 다 아는 얘기인데 이렇게 책으로 마주하지 않으면 마치 아예 몰랐던 사람처럼 사는 걸까 싶기도 하다. 좋은 면. 나쁜 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고 할 것 없이 양쪽 모두 존재한다는 사실을 계속 염두하며 1권을 다 읽었다. 1권이 당장에 처해있던 내 상황과 화자의 상황이 닮아 몰입할 수 있었다면 2권은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이 담긴만큼 앞으로의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 힌트를 주고 있었다.
문득 동생의 손을 떠올렸다. 같이 후지산 풍혈에 들어갔을 때 그애는 싸늘한 어둠 속에서 내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작고 따뜻한, 그러면서 놀랍도록 굳센 손가락이었다. 우리 사이에는 확연한 생명의 교류가 있었다. 우리는 무언가를 내어주는 동시에 무언가를 얻었다. -'전이하는 메타포' 122쪽-
내 손을 잡아주었던, 내가 먼저 내밀어 잡았던 그 '손'들을, 그 상황들과 관계를 생각했다. 나이들면서, 좀 더 내 감정에 신중해지고 책임을 져야겠다고 느낀 순간부터 '손을 잡는'행위는 그 어떤 것보다 큰 의미를 가진다. 어릴 때 엄마손을 잡고, 아빠손을 잡고, 성장하면서 부모이자 친구이자 '언니'였던 언니의 손을 잡고, 그 이후 그 모든 것이었던 누군가의 '손'들을 잡았던 때, 그들과의 헤어짐속에서 나는 그것이 위장된 축복이었는지 그 반대였는지를 보려고 했다. 혹은 '좋은 면'은 무엇이고 '나쁜 면'은 무엇인지 분석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손잡음'은 '내어주고 얻음'의 행위였을 뿐이다. 심플한 척 하려는 것도 아니고 쿨한 척 하려는 얘기가 아니라 지나고나서 어떻다고 평가할 만한 사항이 아니라고 느낀 것이다. 결국 내게 있었던 일들이고 내가 무언가 얻었던 것이고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완전하게 '놓은'상태라는 것을 인정해야했다.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은 열심히 살 겁니다. 스스로 어떤 일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따분할 틈은 없어요. 제가 공포나 공허함을 느끼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보다 따분할 틈 없이 사는 겁니다. -'전이하는 메타포' 158쪽-
'나'와 이웃으로 사는, 돈도 많고 사연도 많고 무엇보다 '속을 알 수 없는' 멘시키가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마치 전쟁중에 자식을 잃고 남편을 잃고 어찌 사셨냐고 물었을 때 어르신들이 하시는 말씀처럼 들렸다. 너무 바쁘면 슬퍼할 겨를도 없다는 그 말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안다. 열심히 사는 것. 내가 지금 이렇게 책을 읽으며 내 감정의 바닥까지 들여다보는 것은 열심히 사는 것일까 아닐까 싶기도 했다.
1편에서 2편으로 그리고 서둘러 마지막 이야기를 쓰려는 지금, 절대 빠져서는 안되는 부분은 다음의 내용이다.
유즈가 말했다. "나는 물론 내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은 나와 상관없는 데서 멋대로 결정되고 진행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싶어. 다시 말해 나는 언뜻 자유의지를 지니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정말로 중요한 일은 무엇 하나 직접 선택하지 못하는지도 몰라. -'전이하는 메타포' 581쪽-
남편이 아닌 남자를 만나다 결국 먼저 이혼을 고했던, 어찌보면 지극히 자유의지대로 사는 듯한 유즈가 뜻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된 후 전남편이 될 뻔한 '나'에게 말한다. '정말로 중요한 일은 무엇 하나 직접 선택하지 못하는지도'모른다고. 1,2권을 읽는 내내, 주인공 '나'가 과거에 풀지못한 숙제를 마흔을 4년 앞두고, 아내에게 버림받고서야 자신의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을 먹고 나아가는 과정속에서 나 또한 그랬다. 과거에 내가 풀지못한 것은 무엇인지, 이제사 나는 나를 위해 혹은 내가 원하는 그 무언가를 위해 고민하고 있는 과정 모두가 결국 '내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가 정해놓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나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을 자유의지는 충분했고, 애초에 이 책을 사지 않을 이유도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읽었고 이런 결말에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도 유즈가 그렇듯 나역시 앞으로도 변함없이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을 할 것이고 그 결과가 기대와 다르더라도 '그럴수도 있지.'라면서 받아들이고 비우는 과정을 이 생에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런 '쳇바퀴'를 나 혼자 도는 것은 아님을 시시때때로 깨닫게 해주는 소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인가. 다만 이전의 그 어떤 작품보다 주인공이 덜 상하고 어느정도 회복도 하지만 역시나 이 미완결스러운 결말이 참 싫은 건 어쩔 수 없다. 마치 라라랜드 같다. 신나게 잘 봐놓고 결말 맘에 안든다고 투정부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