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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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읽을 때, 이야기 초반에는 괴로운 전쟁이야기를 다루긴 해도 동료들의 이름대신 별명으로 부르고, 운명의 책을 만났을 때의 설레임과 감동을 이야기하는 도리고를 보면서 적잖이 공감도 하고 피식 웃어가며 괜찮은 소설을 만났음에 기뻐했다. 좋아하는 여인을 만나는 연애사도 등장한다. 소설 끝까지 그의 연애사와 동료 병사들과 가족과의 이야기들이 계속 반복되지만, 도리고의 신분이 촉망받는 외과의가 아니고 포로군 장교로서 전쟁 한가운데에 서있는 동안 나의 표정은 굳어져가고 두눈과 페이지를 넘기는 손의 긴장만 커졌다. 잊고 지내던 다키 가디너의 구타사건을 기억해 가는 과정이 그랬다.

오랫동안 다키 가디너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그의구타사건을 글로 쓰려고 했을 때에 비로소 그를 떠올렸으니까. 76

노년의 도리고가 여전히 여성편력으로 인해 부도덕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결국 전쟁이란 씁쓸한 것이구나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인 줄 알았다. 후반부에 가면서 그가 잊고 있던 다키 가디너의 구타장면이 등장하면서, 일본인들의 을 위해 인간과 짐승의 을 잃어버린 전쟁의 참혹함을 마주하는 순간 이 책을 괜히 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다키의 구타장면이 수십페이지에 걸쳐 등장하는 내내 내 마음속에는 그의 죽음만을 바라는 고통스러운 싸움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보통 전쟁이나 혹은 범죄상황에서 왠만해서는 피해자가 살아남길, 신체 부위 어느 하나 망가지더라도, 설사 회복불가능한 상태가 되더라도 살아만 주기를, 바라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눈을 껌뻑였다라는 문장이 등장할 때 마다, 힘없이 손을 내저었다고 할 때마다 제발, 이제 그만 제발 다키를 죽여달라고 저자가 아닌 누군가에게 빌기 시작했다. 나의 바람과는 달리 다키는 그 구타에서 살아남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도리고 에번스의 마음속에서 뭔가가 변하고 있었다. 삼백 명의 사람들이 자신이 아는 사람을 세 명이 망가뜨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 이렇게 지켜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동의했고, 저 진동에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365

종교와 무관하게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하던 상황을 성서가 아닌 영화를 통해서라도 접했을 것이다. 마치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청하듯 군중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오늘 먹을 저녁에 대해, 자신들의 굶주림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애쓰는 병사들의 심리가 이해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결국 우리가, 책을 읽는 독자중에 하나인 나조차 동조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굶주림이 오스트레일리아 병사들을 은밀이 따라다녔다. 병사들의 모든 행동, 모든 생각 속에 그것리 숨어 있었다. 그것을 상대로 그들이 내밀 수 있는 것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지혜뿐이었지만, 사실 그 지혜는 그들의 배보다 더 텅 빈 말에 불과했다. 그들은 오스트레일리아인다운 건조함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욕설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추억과 오스트레일리아다운 동료애로 힒을 합쳐 이겨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는 이와 굶주림과 각기병 앞에서, 도둑질과 매질과 점점 늘어나기만 하는 노동시간 앞에서 갑자기 의미를 잃어버렸다. 71

고통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를, 누구인지를 잃어버린다. 이성을 잃고, 기본적인 인간성마저 상실한 그 자리에서 다키의 구타사건은 모든 나약한 인간의 본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곳에서의 자신의 삶이 어찌 영웅이 될 수 있을까 도리고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내어준 스테이크 한 덩어리는 다른 병사들에게는 인간성 마저 상실하게 만든 굶주림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 그가 자신들에게 해주길 바라는 것에 대한 무언의 강한 요구로 버틸 수 있었기에 그 요구가 사라진 전후의 삶은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현상유지를 했었어야 할 도리고에게 가족은 어떤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아슬아슬한 선 위를 걸어야 했던 그를 팽팽하게 당겨주던 선이 사라졌을 때, 그 곳에 있지 않았던 가족들이 어떻게 그를 위로하고 이끌어줄 수 있을까.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며 함께 살아온 두 사람의 고통과 절망, 함께 살면서도 함께 하지 못하는 삶, 애정과 질병과 비극과 농담과 수고로 이루어진 음모, 결혼생활, 기묘하고 무서운 인간 존재의 한없음. 가족. 523

선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걷던 도리고가 하이쿠 시인의 마지막 작품을 통해 깨달은 것은 유한한 인간의 삶의 허무였다. 인간의 삶이 결국 허무일 수 밖에 없음은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이전에도 많았지만 이 작품이 다른 소설과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도리고 스스로가 허무라고 깨닫는 그 이전까지 그의 삶을 어느 누구도 감히 허무하다라고 할 수 없었다는 데 있다고 본다. 도리고는 열심히 살았다. 부도덕했던 어찌했던 그는 열심히 살았다. 가족을 구하러 불길속을 뛰어 들어갔고, 떠밀리듯 그랬다 할 지라도 동료 병사를 구하려고 노력했고, 지켜보기만 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상황에서는 자신이 가장 먼저 그 상황을 받아들였음을 인정했다. 그랬기에 독자 중 누구도 감히 그 삶을 허무하다고 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뭔가가 시들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점점 위험부담을 파악해서 최대한 제거한 뒤, 지루한 새 세상으로 바꿔놓을 것이다. 그 세상에서는 시를 읽는 일보다 음식의 조리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더 감동적으로 느껴질 것이며, 직접 뜯어온 풀로 끓인 수프에 돈을 내면서 사람들은 기분이 들뜰 것이다. 103

시 한 줄 보다 맛있는 케이크 한 조각 먹기를 주저 하지 않는 우리의 삶은 분명 허무할 지도 모른다. 총 포탄이 사방을 오가는 장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는 누구가가 어느 순간 돌변 해 나를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 세상은 허무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이 허무하지 않게, 우리 사회가 허무하지 않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도리고가 다키 가드너의 구타사건이 그 뿐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 기억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기억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인지 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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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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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가 있는 소설, 당신의 아주 먼 섬 / 정미경 장편소설

사랑하는 연인 태이를 오토바이 사고로 잃고 이우는 극심한 불명증에 시달린다. 이우의 엄마 연수는 고향친구 정모가 사는 바닷가로 내쫓듯 연수를 내려보낸다. 바닷가는 연수가 지금의 이우나이 만할 때까지 살던 곳이고, 그시절 그곳에는 연수와 정모 그리고 태원이 셋이서 함께, 언제까지나 행복하고 즐거운 날들만 계속되리라 믿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의 바닷가는 방황하는 딸의 요양을 위한 장소이자, 도심으로부터 도망치듯 내려오게 되는 도피장소이기도 하고 아버지의 삶의 방식이 싫어 떠났다가 결국 그에게로 되돌아올 수 밖에 없는 '살기위한 무덤'같은 곳이 되어버렸다. 그런 장소가 끊임없는 생명력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은 바다를 뜨겁게 비추는 태양과 쉴새없이 일러이는 파도, 그리고 바닷바람이 가지고 있는 자연과 아들 셋을 내어주고도 여전히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삐 할미'와 그녀의 손에 이끌려 정붙일 사람, 장소를 얻게 된 '판도'와 같은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바닷가의 생물 못지 않게 이 세사람의 '양식'이 되어주는 책이 있었다.

 

판도는 이런 순간이 좋다. 마치 누군가가 나 대신 써놓은 일기장을 우연히 집어든 듯한. 그냥 잃어나가다가 어떤 한 문장에 붙들려, 그 문장의 무엇에 붙들렸는지도 알 수 없는 채로 몇 번이나 다시 읽게 되는. 59쪽

 

판도나 이우 둘 모두 책을 자주 읽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어린시절 부터 책을 좋아하던 정모가 소금창고를 도서관으로 만들자고 결심한 후, 지인들에게 부탁한 책이 바닷가로 들어오고, 그 책들이 정모의 손을 통해 판도에게로 전해질 수 있었다. 무심하게 건넨 책이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을 염두해두고 고른 책이라는 것을 판도가 느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조언을 하고 싶거나 도움을 주고 싶을 때, 특히 그 상대가 나보다 나이가 적거나 많을 때 '책'만큼이나 좋은 도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만으로는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사람에게는 책보다 그 자체로 더할나위 없이 좋은 '작품'인 사람이 필요하다.

 

이우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다 그랬다. 판도 앞에서 오만 가지 얘기를 스스럼없이 다 한다. 이삐 할미도, 정모 아저씨도, 어판장 오씨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거기 나오는 갈대숲 같은 걸까. 나는. 내 갈대숲은 어디인가. 84쪽

 

벙어리인 판도가 도심에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당장 진학문제부터가 힘겨운 싸움이었을 것이다. 더더군다나 그 싸움을 대신해 줄 부모의 자리가 판도의 표현을 빌자면 '구멍'이니 하루하루 투쟁 혹은 좌절의 날들이었을 것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중학교 때까지 공부를 잘하던 이우가 1등만 모아놓은 고등학교에서 아웃사이더가 되버리는 것만 봐도 그렇다. 다행히 편모가정이라고는 해도 엄마의 자리가 구멍이 아닌 이우는 이렇게라도 바닷가에 내려와 요양이라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익명성이 도심의 장점아닌 장점이라면 도심이 아닌 지역의 장점은 인간을 그저 먼지에 지나지 않은 작은 존재로 만들어주는 자연의 위대함이다. 그 자연에서 난 것으로 우리는 허기를 달랜다. 심지어 마음 속 허기까지도.

 

너무 잔인해. 이걸 어떻게 먹어! 불쌍하게..... 발을 동동거리는 이우에게 아저씨가 노릇하게 익은 걸 하나 먼저 집어주었다. 후후불더니 바슬바슬 소리가 나게 씹으며 울 듯 그랬다. 이렇게 맛있는 걸 왜 이제야 해주는 거야. 한 소쿠리 튀긴 걸 셋이 한자리에서 다 먹어치웠다. 113쪽

  

정모, 이우 그리고 판도의 삶은 도시의 그 또래들의 삶과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소쿠리의 게튀김을 먹는 이 하나의 장면을 통해 '행복'을 떠올리게 한다. 위 문장에서 누가 웃었다거나, 만족감을 느꼈다거나 감사함을 느꼈다는 표현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저 세사람이 적어도 저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행복이란 것이 반드시 타인에게 내보일만큼 화려하거나 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야말로 화려하지 않지만 깊은 맛을 주는 개미를 가진 소설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개미'의 의미는 소설에서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아저씨, 개미가 뭐야? 탱자 할미가 이게 개미가 있대. 개미를 몇 마리 넣은 건 아니겠지?"

"개미. 그게 설명이 쉽지 않은데. 감칠맛? 오묘한 맛? 화려하진 않지만 깊은 맛? 그런 게 있어." 142-3쪽


어쩌면 도심은 책, 사람 그리고 자연 이 세가지를 잃기에 좋은 장소인지도 모른다. M시로 나가 악착같이 돈을 모으기 위해 타인의 눈물과 자존감을 악랄하게 빼앗는 태원의 아버지 영도의 죽음은 얼핏 봐서는 '당연하게'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은 늘 반대편이 존재한다. 그에게 돈을 받고 학교를 다녔을 오씨의 아들이나 어쨌든 그돈으로 유학까지 다녀와 다시금 그 밑으로 들어간 아들 태원만 보더라도 그의 '죽음'이 마냥 기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우의 엄마 연수의 삶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스스로 미리부터 적어놓은 자서전에 맞는 삶을 살기 위해 걸림돌이 되는 이우에게 냉정하게 대하는 모습은 마치 영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연수에게는 동정심이 생긴다. 그것은 딸이 아닌 타인의 영혼에 상처를 주는 모습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연수에게 일순간 모성애를 엿본 판도는 이우를 질투하기까지 한다. 결국 혼자서만 잘 사는 듯해보이는 그 누군가도 또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고, 그런 관계만이 인간의 삶을 끊임없이 흐르게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만약 영도가 책, 사람 그리고 자연 중 하나라도 제대로만 부여잡고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속 끓일 거 없다. 지나고 보니 아픈 것도 낙이고 힘든 것도 낙이야."

앞뒤 없는 그 소리에 목이 컥 메었다. 176-77쪽

 

사실 위 문장을 읽는 순간 뒷부분의 이우가 목이 메었다는 부분이 나오기도 전에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게도 게튀김을 먹으며 행복해 했던 순간이 있지만 동시에 이삐 할미의 아픈것도 힘든 것도 낙이란 말에 목이 메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미경 작가의 남편인 김병종 화가는 책의 발문에서 해당 소설이 작가가 이전에 쓰던 글과는 달리 미완이었을거라 말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소설은 개미가 있다. 만약 작가가 이 소설을 두 어번 더 고쳤썼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어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계속 떠오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여전히 도심에 살며 자연과 멀어지고 조금씩 사람과도 멀어지려는 지금 부단히 노력할 수 있는 까닭도 작가에게는 미완이었을지라도 내게는 분명 감동을 준 '책'을 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김병완 화가의 '미완은 미완인 채로 의미가 있다'라는 말에 적극동조하며 늦게나마 고인이 된 작가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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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어처리스트
제시 버튼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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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버튼의 소설, <미니어처리스트>를 이제사 읽었다.

서두의 시작을 이렇게 아쉬움으로 적는 까닭은 예상한대로 <미니어처리스트>의 내용이 정말 맘에 들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작품의 중심인 '넬라'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시누이인 '마린'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맘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 스토리의 개연성이 없고 억지스러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적어도 내가 욕망과 신 앞에서 뜻하지 않게 오만해지는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다. 마치 답답하고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해결하는 방식이 거울처럼 과거의 나를 비춰보게 만들었으니까.



1686년 10월 중순

암스테르담, 헤렝라흐트 운하


임금이 즐기는 맛난 음식은 바라지도 말아라.

그것을 먹으면 화를 입는다.

<잠언> 23장 3절

위의 발췌문은 작품 시작에 등장하는 성경 구절이다. 지난번에 성경과 관련된 캘리그라피 책 리뷰를 적으면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문학작품에서 인용되거나 등장하는 성경은 거의 대부분 인간의 탐욕과 죄에대한 경고일 때가 많다. 사실 그런 이유로 <미니어처리스트>를 읽지 않았었다. 이부분에서 좀 오해가 있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자신의 이루지 못할 욕망, 심지어 살인까지 미니어처리스트가 되어 간접적으로 이뤄가는 내용일거라 생각했다. 다만 인간의 욕망과 죄, 다시말해 타인에게 하나쯤 숨기고싶은 잘못과 관련된 비밀을 다뤘지만 이전에 우리가 이전에 만났던  뻔한 내용과는 좀 다르다. 주인공 넬라는 네덜란드 아센덜프트의 가난한 집에서 살던 이제 겨우 열여덟 된 어린 아가씨다. 그녀에게 뜻하지 않게 암스텔담의 성공한 무역상인의 아내가 되는 기회가 찾아온다. 평소에 상상하기를 좋아하던 그녀였고, 현실에서 벗어나길 바라긴 했지만 그 방법이 나이가 이토록 많은 부유한 상인과의 결혼일 거라는 상상은 미처하지 못했다. 그녀의 결혼은 요즘 사회로 치자면 재벌에게 시집가는 것인데 너무 뜻밖이라 넬라는 독특한 상상이 아닌 누구나 하게되는 상상이라기보다는 예상에 가까운, 남편의 시중을 들고 통통한 아이들을 낳는 등의 생각만 한다. 그런 그녀의 소소한 기대와는 달리 남편 오트만의 집에 온 첫날부터 시누이 마린과 하녀 코넬리아의 태도는 넬라에게 텃새를 부리는 듯하다. 심지어 남편 오트만은 얼굴조차 잘 내비치지 않는다. 마치 '그들만의 리그'에 불청객처럼 느껴지는 자신의 처지가 무료하고 지루한데다 남편과의 관계를 비롯 무엇하나 그녀의 예상대로 흘러가는 것이 없다. 그러던 차에 오트만이 넬라가 청하지도 않은 실제집과 거의 유사한데 크기가 줄어든 듯한 미니어처들이 담긴 캐비닛을 결혼선물로 준다. 그뒤 마치 그 집에서 일어날 일들을 마치 훔쳐본 듯한 혹은 예언한 듯한 미니어처들이 넬라의 의지와 상관없이 배달되어 온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마치 미니어처리스트가 진짜 예언자 정도의 권위를 가진듯한 문구를 적어보내기도 한다.



모든 여자는 자신의 운명을 설계하는 건축가다.

100쪽


넬라.

튤립이 자라는 땅에 순무는 자랄 수 없어요.

273쪽



소설의 내용은 넬라가 언뜻 봐서는 평온하지만 무기력한 상황에서 미니어처리스트에게 마치 조정당하는 듯 수동적인 삶을 사는 부분과 고난과 역경이 닥칠수록, 그리고 미니어처리스트가 오히려 그녀의 삶을 조종하기보다는 스스로 개척하길 바랐음을 깨닫기 시작한 순간부터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혹독한 시련일수록 그 시련을 견디고 이겨내는 과정에서 강해질 수 있음을 넬라의 심경과 태도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만큼 그녀가 잃은 것은 엄청나지만 생각해보면 넬라뿐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으니 잃어다고는 해도 결코 잃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신'에게 우리가 원하지 않은 방법으로 되돌려드렸을 뿐.



"희망은 위험한 거야, 페트로넬라."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나아요."

353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신에 의해 이미 정해진 삶, 그안에 내재된 고통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절망적인 면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작가는 넬라가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이 희망이었음을 말해준다. 시대적 상황 때문이기도 하지만 1600년 후반, 영국이나 프랑스지역은 물론 네덜란드에서조차 여성이 사회활동을 하는데에 있어 제약이 많았다. 미니어처리스트가 자신의 성별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당당하게 시장에 나와 자신의 작품을 판매할 수 없었던 것이나 남자와 결혼해서 기대하는 미래라는 게 아이를 낳고 내조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시기에 대한 불편함과 부당성을 이토록 흥미진진하게 소설에 담겼다. 게다가 마치 누군가의 삶을 훔쳐보는 듯한 미니어처리스트나 하녀 코넬리아의 버릇이 저급하다고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가 자신 역시 실제하는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페트로넬라 오트만의 캐비닛 하우스]를 통해 자신의 상상력을 가미한 것이다. 미니어처리스트의 이름도 페트로넬라, 글을 이끌어가는 사람도 페트로넬라, 그리고 이 소설을 통해 우리도 때때로 미니어처리스트인 넬라가 되기도 하고, 그로인해 삶의 키를 놓치게 되는 넬라가 되기도 한다.


트칸 페케이런. 상황은 바뀔 수 있다. 479쪽


결국 우리는 언젠가 미니어처리스트 넬라와 만났음을 깨닫게 된다. 다만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녀와의 만남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흥미를 느낄 순 있어도 결코 누군가의 '미니어처'로 살아가서는 안된다고 말해주는거라고 느꼈다. 왜냐면 우리의 의지와 노력이 담긴 희망이 우리의 상황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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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2015년판) -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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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독서모임에서 열심히 떠든 게 엊그제 같은 데 한달이나 지났다. 다시말해 책을 읽은 시점은 한 달 이상이 지나버려 지금까지 남아있는 편린들로 리뷰를 적어야겠다. 분명 당시에 대략적으로 적어둔 리뷰를 '임시저장'해둔 것 같은 데 해당 블로그와 서점 사이트를 뒤져봐도 없는 걸 보니 아마 노트북에 적어둔 모양이다. 암튼 그래서 두서없이 생각나는 데도 적어보자면,


작가는 말한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가 헤매기 위해서라고. 고속도로를 놔두고 굳이 지방도로를 타는 것과 같다고. 여기에 사견을 더하자면, 요즘 청소년들의 독서부족과  직장인들이 자기개발서나 업무관련 서적, 인문학외에 읽지 않으려는 것도 결국 '헤매는 것을 낙오'라고 정해놓은 사회에 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해진 선로에서 벗어나서도 조금 뒤쳐져서도 안된다고 강요하는 데 어떻게 작정하고 '헤매기 위한 소설읽기' 다시 말해 문학을 읽을 여유가 있을까 말이다.


또 생각나는 부분이,

영화 한 편을 관람하고 났을 때 부정적인 의견이 상당한 데 반해 소설은 덜하다는 어떤 감독과의 이야기를 언급했던 게 생각난다. 작가는 어쨌든 영화는 상영관에 들어가게 되면 중간에 나오기가 쉽지 않다라고 말한다. (사실 앞에서 누가 왔다갔다 한다면 신경쓰이긴 한다.) 반면 소설은 끝까지 완독했다라는 것 자체가 어느정도 공감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영화를 평하는 것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고 하는 데 난 오히려 이부분이 영화가 유리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은 끝까지 읽지 않을 요소가 너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초반에 확 끌리는 무언가가 없거나, 대단한 반전을 미처 누리지 못하고 아예 읽지않게 되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한다. 반면 영화는 말그래도(단, 극장에서 관람한다는 전제는 당연하고!)일단 들어가면 진짜 미치게 싫을 정도가 아니면 일단 봐야한다. 상황을 좀 극적으로 몰자면 내가 반한 그(그녀)가 제대로 몰입한 상태라면 절대 나올 수 없다. 그런데 초반과는 달리 보다보니 나름 개연성도 있고 전체적으로 봤을 때, 혹은 그 영화를 앞서 말한 것처럼 누구와 보았냐에 따라 감상평이 확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결말을 이끌어가는 힘이 막판에 급속도로 약해지면 오히려 중반까지 느꼈던 감동을 잊어버리게 되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또 이 책을 읽고 여전히 기억나는 부분은 '거기 소설이 있으니까 읽는다'라고 했던 부분이다. 산악인에게 등반의 이유를 물었을 때 '거기 산이 있으니까'라고 답변한 것을 보고 자신이 독서하는 까닭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독서모임중 한 분은 그러니 굿즈에 혹했던, 표지에 혹했던 쌓아두기만 하는 것도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 해 위안이 되었다고도 하시던데 아마도 공감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싶다. 나의 경우는 거기 있으니까 읽는 경우는 좀 아닌 것 같다. 이 이야기를 풀자면 한 페이지가 넘을테니 대략 이 책과 관련된 리뷰는 여기에서 마무리해야겠다. 어쨌거나 혹시라도 예전에 러프하게 적어둔 리뷰를 발견하면 수정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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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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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전까진 제목이 너무 낯설다기보다는 아,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국어공부를 다시해야 하나, 어째야하나. 암튼 사놓고는 몇 달을 그냥 언젠가는 이라고 하면서 놔두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낯설다 만큼 적확한게 없는 듯 싶다.) 하루키의 소설 제목은 물론 내용이 늘 맘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 <여자없는 남자들>의 경우는 읽자마자 바로 헌책방에 가져가 팔았다. 암튼 1Q84 이후로는 줄곧 하루키의 에세이만 읽었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라든가, 잡문집이라든가 등등. 그러다 이래저래 이별이 많았던 1월의 마지막 주, 작정하고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었다. 내 처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마치 일기장을 보는 듯 했겠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아, 물론 내 배우자가 외도를 했다던가, 내가 그림으로 밥벌이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도 그랬다.


"제 말 들으시죠. 이대로 안락사시키는 게 좋습니다."라는 것이다. 한 달 반 동안 길 위의 생활을 함께하고 12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주행거리를 새긴 푸조와 헤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두고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나 대신 자동차가 숨을 거둔 거라고 생각했다. -'현현하는 이데아' 57쪽-


푸조는 '나'를 대신하여 죽었지만 다행이라고 해야할 지 확신할 수 없지만 나의 OO은 다행히 죽음은 면할 수 있었다. 확신 할 수 없다는 것은 위의 문장처럼 '안락사 시키는게 좋았을 수'도 있겠다는 말을 주변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면 그렇게 방황하던 '나'가 친구 아버지인 일본화의 대가인 '아마다 도모히코'가 머물던 집에 머물게 된다. 물론 글의 흐름은 '나'가 그곳에 머물던 시절을 추억하는 내용이다. 스포가 될 수 있겠지만 1Q84와 마찬가지로 이 책도 미완처럼 느껴지는 완결인 것 같다. 암튼 일본화 화가인 도모히코가 숨겨둔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을 주인공인 '나'가 발견하게 되면서부터 기묘한 이야기도 함께 시작된다.



어쨌든 그랬던 이 책이 그렇게나 맘에 들었던 까닭은 '나'와 상황이 비슷해서 였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가 가장 애정하는 그의 전작 <태엽감는 새>와 유사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난 사실 지금도 밤새워 태엽감는 새를 몇 번이고 읽을 수 있다.) 1Q84도 좋았고, 색채를 읽어버린 ~ 그 작품도 좋았고, 무엇보다 하루키 월드로 입장시켜준 <상실의 시대>도 좋았지만 역시나 태엽감는 새 만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암튼 스무 살에 태엽감는 새를 읽고 참 많은 생각을 했던 것 처럼 마흔을 앞두고 읽은 <기사단장 죽이기>는 '나'를 내 입장에서 보던것을 '상대'의 입장에서 보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책속의 '나'처럼 무작정 차를 몰고 여행을 하듯 방향을 잃고 집안에서 정처없이 방황하던 나를 멈춰준 작품이기도 하다.


나는 줄곧 그렇게 느꼈다. 사람에게 마흔이라는 나이는 하나의 분수령이다. 그 고개를 넘어가면 더는 예전과 같을 수 없다. -'현현하는 이데아' 84쪽-



예순에도 새 인생은 시작되고 120세 시대를 향한 요즘은 '인생은 80부터!'라고들도 하지만 역시나 마흔의 벽은 높기만 하다. 물론 마흔을 넘기고서도 청년들보다 훨씬 더 청춘처럼 사시는 분들도 계시긴 하지만 어쨌든 내게도 '마흔'은 웃으며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후덜덜하게 하는 나이인 것이다. 그 마흔을 '나'는 4년이 남았다면서도 조바심치는 데 나는 만으로 계산해도 그보다 절반에 못미치게 남았으니 책을 읽는 내 맘이 이 부분에서는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 읽을 수 밖에 없었냐면,


일본 애니메이션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요괴세상, 도무지 현실성이 없는 듯한 시공간을 넘나드는 다차원 세계의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속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나의 고민과 상황이 오버랩되고 위로받을 수 있다는 점이 정말 놀라운 것 같다. 게다가 <태엽감는 새>때도 그랬지만 전쟁이란 상황을 만들어내는 악마도 '사람'이고 그 악마들 틈에서 다시 삶을 되찾는 존재도 '사람'이며 끝끝내 돌아오지 못할 만큼 여린 존재도 '사람'이라는 사실이 역시나 느껴져 가슴이 아팠다. 이단을 바라보는 하루키의 시선도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어 이런저런 이유로 여러부분에서 밑줄을 긋게 만들었다.


"위장한 축복. 모습을 바꾼 축복. 언뜻 불행처럼 보이지만 실은 기뻐할 만한 일이라는 뜻이야. Blessing in disguise, 그리고 이 세상에는 당연히 그 반대도 있을 테지. 이론적으로는." -'현현하는 이데아' 157쪽-


이제와 지난 삶을 돌아보면 위장한 축복이었던 것도 있고, 당연히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문제는 지금껏 그렇게 생각했던 일들이 또 내 나이 예순쯤에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면 반대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알고보니 축복이었다고 느껴지면 다행인데 그러면 정말 다행이지만 아니라면? 지금 이 방황이 축복을 위장한 불행인 줄 알고 버텨가고 있었는데, 이 시점에 이 작품을 읽은 것이 위로가 되었다고 느꼈는데 아니라면? 하고 불안해하며 책을 읽고 있는 데 마치 이런 어리석은 내게 작가가 혹은 누군가가 들려주고 싶었던 한 마디.


"설령 어떤 결과가 나오든 모든 일에는 반드시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어. 유즈와 헤어진 건 네게 몹시 힘든 경험이었을 거야. 나도 정말 안된 일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 결과, 너는 드디어 너 자신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 -'현현하는 이데아' 376쪽-


그래. 왜 이미 다 아는 얘기인데 이렇게 책으로 마주하지 않으면 마치 아예 몰랐던 사람처럼 사는 걸까 싶기도 하다. 좋은 면. 나쁜 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고 할 것 없이 양쪽 모두 존재한다는 사실을 계속 염두하며 1권을 다 읽었다. 1권이 당장에 처해있던 내 상황과 화자의 상황이 닮아 몰입할 수 있었다면 2권은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이 담긴만큼 앞으로의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 힌트를 주고 있었다.


문득 동생의 손을 떠올렸다. 같이 후지산 풍혈에 들어갔을 때 그애는 싸늘한 어둠 속에서 내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작고 따뜻한, 그러면서 놀랍도록 굳센 손가락이었다. 우리 사이에는 확연한 생명의 교류가 있었다. 우리는 무언가를 내어주는 동시에 무언가를 얻었다. -'전이하는 메타포' 122쪽-


내 손을 잡아주었던, 내가 먼저 내밀어 잡았던 그 '손'들을, 그 상황들과 관계를 생각했다. 나이들면서, 좀 더 내 감정에 신중해지고 책임을 져야겠다고 느낀 순간부터 '손을 잡는'행위는 그 어떤 것보다 큰 의미를 가진다. 어릴 때 엄마손을 잡고, 아빠손을 잡고, 성장하면서 부모이자 친구이자 '언니'였던 언니의 손을 잡고, 그 이후 그 모든 것이었던 누군가의 '손'들을 잡았던 때, 그들과의 헤어짐속에서 나는 그것이 위장된 축복이었는지 그 반대였는지를 보려고 했다. 혹은 '좋은 면'은 무엇이고 '나쁜 면'은 무엇인지 분석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손잡음'은 '내어주고 얻음'의 행위였을 뿐이다. 심플한 척 하려는 것도 아니고 쿨한 척 하려는 얘기가 아니라 지나고나서 어떻다고 평가할 만한 사항이 아니라고 느낀 것이다. 결국 내게 있었던 일들이고 내가 무언가 얻었던 것이고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완전하게 '놓은'상태라는 것을 인정해야했다.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은 열심히 살 겁니다. 스스로 어떤 일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따분할 틈은 없어요. 제가 공포나 공허함을 느끼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보다 따분할 틈 없이 사는 겁니다. -'전이하는 메타포' 158쪽-


'나'와 이웃으로 사는, 돈도 많고 사연도 많고 무엇보다 '속을 알 수 없는' 멘시키가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마치 전쟁중에 자식을 잃고 남편을 잃고 어찌 사셨냐고 물었을 때 어르신들이 하시는 말씀처럼 들렸다. 너무 바쁘면 슬퍼할 겨를도 없다는 그 말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안다. 열심히 사는 것. 내가 지금 이렇게 책을 읽으며 내 감정의 바닥까지 들여다보는 것은 열심히 사는 것일까 아닐까 싶기도 했다.


1편에서 2편으로 그리고 서둘러 마지막 이야기를 쓰려는 지금, 절대 빠져서는 안되는 부분은 다음의 내용이다.


유즈가 말했다. "나는 물론 내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은 나와 상관없는 데서 멋대로 결정되고 진행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싶어. 다시 말해 나는 언뜻 자유의지를 지니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정말로 중요한 일은 무엇 하나 직접 선택하지 못하는지도 몰라. -'전이하는 메타포' 581쪽-


남편이 아닌 남자를 만나다 결국 먼저 이혼을 고했던, 어찌보면 지극히 자유의지대로 사는 듯한 유즈가 뜻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된 후 전남편이 될 뻔한 '나'에게 말한다. '정말로 중요한 일은 무엇 하나 직접 선택하지 못하는지도'모른다고. 1,2권을 읽는 내내, 주인공 '나'가 과거에 풀지못한 숙제를 마흔을 4년 앞두고, 아내에게 버림받고서야 자신의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을 먹고 나아가는 과정속에서 나 또한 그랬다. 과거에 내가 풀지못한 것은 무엇인지, 이제사 나는 나를 위해 혹은 내가 원하는 그 무언가를 위해 고민하고 있는 과정 모두가 결국 '내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가 정해놓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나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을 자유의지는 충분했고, 애초에 이 책을 사지 않을 이유도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읽었고 이런 결말에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도 유즈가 그렇듯 나역시 앞으로도 변함없이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을 할 것이고 그 결과가 기대와 다르더라도 '그럴수도 있지.'라면서 받아들이고 비우는 과정을 이 생에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런  '쳇바퀴'를 나 혼자 도는 것은 아님을 시시때때로 깨닫게 해주는 소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인가. 다만 이전의 그 어떤 작품보다 주인공이 덜 상하고 어느정도 회복도 하지만 역시나 이 미완결스러운 결말이 참 싫은 건 어쩔 수 없다. 마치 라라랜드 같다. 신나게 잘 봐놓고 결말 맘에 안든다고 투정부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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