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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평점 :
개미가 있는 소설, 당신의 아주 먼 섬 / 정미경 장편소설
사랑하는 연인 태이를 오토바이 사고로 잃고 이우는 극심한 불명증에 시달린다. 이우의 엄마 연수는 고향친구 정모가 사는 바닷가로 내쫓듯 연수를 내려보낸다. 바닷가는 연수가 지금의 이우나이 만할 때까지 살던 곳이고, 그시절 그곳에는 연수와 정모 그리고 태원이 셋이서 함께, 언제까지나 행복하고 즐거운 날들만 계속되리라 믿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의 바닷가는 방황하는 딸의 요양을 위한 장소이자, 도심으로부터 도망치듯 내려오게 되는 도피장소이기도 하고 아버지의 삶의 방식이 싫어 떠났다가 결국 그에게로 되돌아올 수 밖에 없는 '살기위한 무덤'같은 곳이 되어버렸다. 그런 장소가 끊임없는 생명력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은 바다를 뜨겁게 비추는 태양과 쉴새없이 일러이는 파도, 그리고 바닷바람이 가지고 있는 자연과 아들 셋을 내어주고도 여전히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삐 할미'와 그녀의 손에 이끌려 정붙일 사람, 장소를 얻게 된 '판도'와 같은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바닷가의 생물 못지 않게 이 세사람의 '양식'이 되어주는 책이 있었다.
판도는 이런 순간이 좋다. 마치 누군가가 나 대신 써놓은 일기장을 우연히 집어든 듯한. 그냥 잃어나가다가 어떤 한 문장에 붙들려, 그 문장의 무엇에 붙들렸는지도 알 수 없는 채로 몇 번이나 다시 읽게 되는. 59쪽
판도나 이우 둘 모두 책을 자주 읽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어린시절 부터 책을 좋아하던 정모가 소금창고를 도서관으로 만들자고 결심한 후, 지인들에게 부탁한 책이 바닷가로 들어오고, 그 책들이 정모의 손을 통해 판도에게로 전해질 수 있었다. 무심하게 건넨 책이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을 염두해두고 고른 책이라는 것을 판도가 느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조언을 하고 싶거나 도움을 주고 싶을 때, 특히 그 상대가 나보다 나이가 적거나 많을 때 '책'만큼이나 좋은 도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만으로는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사람에게는 책보다 그 자체로 더할나위 없이 좋은 '작품'인 사람이 필요하다.
이우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다 그랬다. 판도 앞에서 오만 가지 얘기를 스스럼없이 다 한다. 이삐 할미도, 정모 아저씨도, 어판장 오씨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거기 나오는 갈대숲 같은 걸까. 나는. 내 갈대숲은 어디인가. 84쪽
벙어리인 판도가 도심에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당장 진학문제부터가 힘겨운 싸움이었을 것이다. 더더군다나 그 싸움을 대신해 줄 부모의 자리가 판도의 표현을 빌자면 '구멍'이니 하루하루 투쟁 혹은 좌절의 날들이었을 것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중학교 때까지 공부를 잘하던 이우가 1등만 모아놓은 고등학교에서 아웃사이더가 되버리는 것만 봐도 그렇다. 다행히 편모가정이라고는 해도 엄마의 자리가 구멍이 아닌 이우는 이렇게라도 바닷가에 내려와 요양이라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익명성이 도심의 장점아닌 장점이라면 도심이 아닌 지역의 장점은 인간을 그저 먼지에 지나지 않은 작은 존재로 만들어주는 자연의 위대함이다. 그 자연에서 난 것으로 우리는 허기를 달랜다. 심지어 마음 속 허기까지도.
너무 잔인해. 이걸 어떻게 먹어! 불쌍하게..... 발을 동동거리는 이우에게 아저씨가 노릇하게 익은 걸 하나 먼저 집어주었다. 후후불더니 바슬바슬 소리가 나게 씹으며 울 듯 그랬다. 이렇게 맛있는 걸 왜 이제야 해주는 거야. 한 소쿠리 튀긴 걸 셋이 한자리에서 다 먹어치웠다. 113쪽
정모, 이우 그리고 판도의 삶은 도시의 그 또래들의 삶과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소쿠리의 게튀김을 먹는 이 하나의 장면을 통해 '행복'을 떠올리게 한다. 위 문장에서 누가 웃었다거나, 만족감을 느꼈다거나 감사함을 느꼈다는 표현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저 세사람이 적어도 저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행복이란 것이 반드시 타인에게 내보일만큼 화려하거나 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야말로 화려하지 않지만 깊은 맛을 주는 개미를 가진 소설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개미'의 의미는 소설에서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아저씨, 개미가 뭐야? 탱자 할미가 이게 개미가 있대. 개미를 몇 마리 넣은 건 아니겠지?"
"개미. 그게 설명이 쉽지 않은데. 감칠맛? 오묘한 맛? 화려하진 않지만 깊은 맛? 그런 게 있어." 142-3쪽
어쩌면 도심은 책, 사람 그리고 자연 이 세가지를 잃기에 좋은 장소인지도 모른다. M시로 나가 악착같이 돈을 모으기 위해 타인의 눈물과 자존감을 악랄하게 빼앗는 태원의 아버지 영도의 죽음은 얼핏 봐서는 '당연하게'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은 늘 반대편이 존재한다. 그에게 돈을 받고 학교를 다녔을 오씨의 아들이나 어쨌든 그돈으로 유학까지 다녀와 다시금 그 밑으로 들어간 아들 태원만 보더라도 그의 '죽음'이 마냥 기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우의 엄마 연수의 삶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스스로 미리부터 적어놓은 자서전에 맞는 삶을 살기 위해 걸림돌이 되는 이우에게 냉정하게 대하는 모습은 마치 영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연수에게는 동정심이 생긴다. 그것은 딸이 아닌 타인의 영혼에 상처를 주는 모습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연수에게 일순간 모성애를 엿본 판도는 이우를 질투하기까지 한다. 결국 혼자서만 잘 사는 듯해보이는 그 누군가도 또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고, 그런 관계만이 인간의 삶을 끊임없이 흐르게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만약 영도가 책, 사람 그리고 자연 중 하나라도 제대로만 부여잡고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속 끓일 거 없다. 지나고 보니 아픈 것도 낙이고 힘든 것도 낙이야."
앞뒤 없는 그 소리에 목이 컥 메었다. 176-77쪽
사실 위 문장을 읽는 순간 뒷부분의 이우가 목이 메었다는 부분이 나오기도 전에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게도 게튀김을 먹으며 행복해 했던 순간이 있지만 동시에 이삐 할미의 아픈것도 힘든 것도 낙이란 말에 목이 메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미경 작가의 남편인 김병종 화가는 책의 발문에서 해당 소설이 작가가 이전에 쓰던 글과는 달리 미완이었을거라 말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소설은 개미가 있다. 만약 작가가 이 소설을 두 어번 더 고쳤썼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어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계속 떠오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여전히 도심에 살며 자연과 멀어지고 조금씩 사람과도 멀어지려는 지금 부단히 노력할 수 있는 까닭도 작가에게는 미완이었을지라도 내게는 분명 감동을 준 '책'을 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김병완 화가의 '미완은 미완인 채로 의미가 있다'라는 말에 적극동조하며 늦게나마 고인이 된 작가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