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의 여자들
캐롤라인 무어헤드 지음, 한우리 옮김 / 현실문화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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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노벨문학상 소식을 접한 후 그녀의 작품 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읽고 전쟁속에서 늘 군인들에게 짓밟히고 당하기만하는 약한 존재가 아니라 사상의 옳고 그름을 떠나 주체적으로 참전했던 여성들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몇 달 뒤 캐롤라인 무어헤드의 이 책 <아우슈비츠의 여자들>를 만나게 되었지만 이런저런 프롤로그만 읽은 뒤 해를 넘겼고 이제는 계절마저 지나 영화<나는 부정한다>관람을 계기로 이제서야 다 읽어냈다. 읽었다가 아니라 읽어냈다라고 표현해야 맞을 것 같다. 분량도 분량이지만 겨우 진정된 가슴이 다시금 먹먹해졌기에 특히 어느 독자의 말처럼 페이지를 넘길수록 '여자들'의 시련도 커졌기에 소설을 읽듯 페이지를 넘기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유령들의 이야기를 믿어야 하죠? 돌아오기는 했지만 어떻게 돌아왔는지 설명하지는 못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17쪽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출판사에서 소개한 것처럼 아우슈비츠에 있었던 유대인도 아닌데다 남성도 아니었던 제 의지로 독일 나치에 대항했던 여성들 중 생존자들 혹은 그들의 유족들과 만나 나눈 이야기들과 관련 문헌을 정리했다. 초반에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하게 된 계기를 개별적인 사연과 함께 들려주고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졌던 참상 또한 함께 이야기 한다.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목격된 경우도 있지만 그마저도 그저 '연기가 되었다'라는 표현처럼 사망했음을 짐작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부끄러웠던 것은 프랑스 여자들을 떠올릴 때 '파리지엔'을 떠올릴 뿐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여성들을 그 뒷전으로 생각했던 것이고, 고민이되었던 부분이 제국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반유대주의가 같지도 않지만 서로 대립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에서 그리고 남한에서 나고 자란 내게 공산주의는 부정되는 것이고 제국주의역시 부정되는 것이며 동시에 반유대주의도 마찬가지로 부정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 책을 읽다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고 어느 순간 무엇이 과연 옳은것인지 그 판단을 명확하게 내리기가 애매해졌다. 다만 한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가만히 있는 것' 이 결코 옳지 않다라는 사실이었다. 레지스탕스로 활동하게 된 여성들의 사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모의 영향을 받은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이웃나라 혹은 이웃에게 가해지는 납득될 수 없는 폭력에 반하여 자신의 의견과 모두가 잘사는 사회를 위해 자신의 목숨은 물론 가족의 안위마저 내놓고 투신하는 여성들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은 내가 살아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살아 있지 않다. 나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482쪽


결국 자신들이 어떻게 돌아왔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저자의 말처럼 어느 누구하나 '혼자'서 살고자 했던 것이 아닌 '함께'살고자 했던 그 마음이 그들을 아우슈비츠로 이끌었으나 같은 이유가 역시나 그들을 그 지옥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위의 발췌된 생존자 샤를로트의 '나는 살아 있지 않다.'라는 말이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그녀를 살아있지 않게 만드는 것이 과연 나치인가, 아니면 또 다른 그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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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 사건 소시민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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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 사건] 소설은 성장소설?


우선, 과거의 고바토와 소시민이 되기로 한 고바토의 이야기가 중심이라고 생각하면 이 소설의 장르는 성장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등학교에 입학함과 동시에 과거의 '명석한' 고바토가 아닌 누구와도 그럭저럭 잘지내는, 결코 드러나거나 튀지 않는 소시민이 되기로 결심한다. 동병상련의 계기로 오사나이 역시 서로 방패가 되어주기로 약속한다. 얼핏 보면 결국 이 이야기는 고바토와 오사나이가 소시민으로 무사히 성장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과 대답으로 이어지는 성장소설로만 보이지만 다음의 두 번째 대립구도를 보면 성장소설이자 추리소설인 이유를 알 수 있다. 


​평범한 일상도 두 사람에게 일어나면 사건이 되는 추리소설?


이 두 사람은 이유가 있어 '소시민'이 되기로 결심한 '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의 목적은 결코 튀지 않고 별일 없이 사회의 소시민으로 자리잡는 것이지만 어째서인지 순탄하지만은 않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이렇게만 적으면 소설이니까 당연히 사건과 갈등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고 할테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가령 겐고의 집에 놀러간 두 사람은 세 잔의 코코아를 컵이나 별도의 용기를 사용하지 않고 따뜻한 우유를 섞어 '맛있는 코코아'로 탄생시키는 이유를 찾아내기도 한다. 사실 이런 일들은 소설에서만 등장하지 않는다. 분명 수술한 적이 없는데 방학동안 몰라보게 예뻐진 친구들을 볼 때 우리도 그들처럼 '관찰'과 '추리'를 해볼 수 있다. 아, 그럼 이 소설은 추리소설이구나 하고 정의내리고 싶겠지만 여기서가 끝이 아니다.


고바토와 오사나이는 과연 무슨 사이일지 궁금해지는 로맨스 소설?

고바토와 오사나이는 분명 성별이 다른 '협력자'이지만 묘하게 그 둘의 관계가 조금씩 의심스러워진다. 분명 소시민이 되기 위해 방패로만 삼기로 한 약속과는 달리 기분이 울적하다던가, 화가났을 때 오사나이가 찾는 친구는 '고바토'며, 마초적인 남자를 두려워 하는 오사나이가 의외로 겐고로부터 초대를 받았을 때 망설임없이 수락하는 것을 보면 묘하게 삼각관계가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 싶은 '로맨스 소설'같은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과장되어 표현하자면 때때로 한정판에 목숨을 걸 때가 있다. 그때가 아니면 취할 수 없기 때문인데 그런면에서 책은 일단 출간을 한 뒤로는 언제든 볼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 표지나 판형만 달리할 뿐 내용이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 책을 읽을 때 우리의 마음이 달라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봄날의 내가 이 책을 읽고 장르를 추리하는데 열을 올렸다면 언젠가 사람이 힘들어 삶이 힘들어질 때면 '소시민'이 되려는 고바타의 마음의 위로를 얻게 될 지도 모른다.

결국 소설이란 늘 '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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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
가쿠타 미츠요 지음, 박귀영 옮김 / 콤마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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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하나하나가 다 이어지는 거야. 생각해 보니 재미있네. 당신한테 프로포즈를 못 받아서 뭔가를 해 보자는 결의가 생기고, 다음에 만난 사람한테 요리를 못한다는 타박을 받아서 어디 한 번 봐라 하고, 다 이어져 있던 거야. 하나가 없으면 다음 하나도 없고, 또 전혀 다른 데로 흘러가기도 하고. 171쪽

총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된 가쿠다 미쓰요의 <평범>. 사실 첫 번째 작품을 읽고서는 '불륜'을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불쾌해 읽다가 멈추고 며칠을 다시 펼쳐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배우자가 형편없더라도 폭력으로 이혼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면 충분히 결혼생활을 끝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무능력해서, 남편도 바람을 피니까 라는 비겁한 변명으로 똑같이 행동하는 것에 대해 조금의 동정심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작품은 친구의 불행한 결혼생활이 조금이라도 위로 받을 수 있다면 설사 그것이 불륜일지라도 어느정도 이해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후미코가 제일 나쁜 사람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후미코의 남편 마사토시의 생각은 나와 유사했기 때문에 저자의 생각이 후미코와 반드시 같지는 않겠구나 싶었고 그런 생각으로 두 번째 작품을 다시 읽기 시작했을 때 마지막 작품까지 다 읽을 때까지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흔히 이런 표현은 장르가 추리 혹은 스릴러일 때 해당되겠지만 사실이 그러했으니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만약 그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때 차라리 이혼했더라면 하는 식의 가정이 기혼자들이 하는 생각이라면 반대로 마흔이 되도록 결혼하지 않은 나와 같은 사람들은 그들과는 조금 다르게 '그때 그냥 결혼했더라면'이라던가, '끝까지 매달렸더라면'식의 가정을 하게 된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비단 결혼과 관련된 부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읽으면서 마음이 참 아팠던 마지막 작품 <어딘가에 있을 너에게>처럼 소중한 친구나 가족을 잃었을 때 하게되는 '만약'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아침밥을 먹여보내기 위해 몇 분 늦게 출근한 아들이 사고로 죽었을 때 수천번 혹은 수만번 자신을 책망하고 만약이라는 가정을 해야했던 '요다'의 사연은 앞서 등장했던 그 어떤 '만약'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 아마도 그랬기 때문에 마지막에 실려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당신이 그와의 헤어짐에 가슴아파도, 그때 이루지 못했던 꿈 때문에 절망스러워도 자식을 잃은 것 만큼은 아닐테니까 말이다. 헤어진 연인에게 잘 보이기위해 행복한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한 선택을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행복한 척하는 <오늘도 무사 태평>의 사토코의 모습은 SNS를 열성적으로 하는 사람들이라면 여러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곳에 있을 무수한 '나'에게 행복한 나를 보여야 했다. 불행해졌으면 하는 것은 아사히가 아니라 아사히와 함께해 온'만일'에 멈춰 서 있는 또 하나의 나다. 134쪽

SNS를 하는 이유가 순수하게 타인과 정보를 교류하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오늘 하루 내가 이렇게 행복하게 잘 살았음을 자랑하기 위해서일까? 자랑한다면 사토코처럼 또다른 자신에게? 아니면 타인을 향한 허세일까? 작품의 순서가 절묘하게 배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작품에서 불륜에 관해 이런저런 생각을 갖게 하고, 두번째 작품<달이 웃는다>에서는 어찌보면 제법 무거운 주제가 될 수도 있는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시 세 번째와 네 번째 작품은 결혼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지다가 다섯 번째 작품이자 이 소설집의 표제작 <평범>에서는 과연 '평범'한 삶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생각해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읽다보면 만약이라는 가정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던 '자신'을 한없이 위로해줄 뿐 아니라 설사 앞으로도 계속 지긋지긋한 '가정법'을 버릴 수 없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아들을 잃은 요다가 그렇지 않은 또다른 자신의 모습을 친구처럼 떠올리듯 좀 유연하게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또한 평범한 삶의 일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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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시골생활은 처음입니다
바바 미오리 지음, 홍주영 옮김 / 끌레마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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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시골생활은 처음입니다

내 나이 만으로 스무살이 되기 전 부모님께서 귀농하셨다. 그게 벌써 20여년이 다 되어간다. 처음 몇 년간은 시골에서 나고 자란 아버지조차 도시생활에 이미 익숙해진 몸과마음을 농촌에 맞추시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보다 더 고생을 한 건 서울깍쟁이로 살다가 남편따라 시골로 내려간 엄마였다. 그래서였는지 10년 동안은 내게 시골로 내려오지 않겠냐는 말을 농담으로도 하시지 않았다. 그러던 부모님이 3년 전부터 도시에서 고생하지 말고 내려와 함께 살자는 말씀을 종종하신다. 그사이 주변에 도심생활을 청산하고 귀농하신 이웃분들도 제법 생겨 한 발짝 물러나 보고 있으면 보통 사람들이 이상으로 삼는 '전원생활'이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치만 막상 귀농을 결심하기에는 머뭇거려지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책 <우리도 시골 생활은 처음 입니다>의 저자 바바 미오리씨는 정말 솔직하게 전원생활의 현실을 들려주고 있다. 우선 귀농하면 삼시세끼 모두 직접 재배한 재료를 가지고 유기농 식단으로 챙겨 먹을것 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물론 직접 재배한 식재료를 많이 활용하기도 하고 이웃과 나누기도 하지만 도시에서 못지 않게 마트도 자주 들릴 수 밖에 없다. 저자가 아예 귀농하지 않고 번거로울 것이 분명한데도 도심과 농촌을 오가는 까닭도 어느 한곳에 안주하는 것 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계를 위해 반드시 농사를 지어야 하는 것과 땅의 이로움과 아이들에게 자연을 선사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땅에서 기운을 얻으면 평일 내내 도시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고 반대로 농촌에서는 반드시 모든 것을 제 손으로 일궈야 하는 부담을 주말이라는 제한적인 시간에서만 해도 되니 양쪽 모두가 휴식이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니이니와 나는 벌레를 좋아하는 편이다. 아무리 징그럽게 생긴 벌레라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감정이입이 되어 함부로 죽일 수 없다.115쪽

 저자에게 부러운 점이 있다면 벌레 혹은 인간에게 해롭다고 정의내려진 대상을 바라볼 때 두려워하거나 겁먹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완전한 귀농을 거부하는 까닭 중 가장 큰 이유가 벌레가 싫어서인 내게는 그보다 더 부러운 것은 없다. 해충제를 뿌렸을 때 몸부림치는 모습이 무서워 왠만하면 벌레와 함께 지내자는 규칙을 세우기까지 했다니 여러모로 좋은일을 하는 셈이기도 했다. 생명을 중시한다는 것은 그 어떤 보은보다 그 가치가 크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농촌보다는 그래도 도시를 더 좋아한다는 미오리씨의 큰 딸도 지렁이를 맨손으로 잡는것은 거뜬하게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지렁이를 보기만 해도 깜짝깜짝 놀래는 내게는 너무 먼 이야기다. 제인구달의 <희망의 씨앗>을 읽을 때 어린시절 지렁이가 좋아서 침대에 데려와 함께 자려고 했다는 일화를 읽을 때 느껴지는 징그러움과 부러움이라고나 할까. 사실 벌레를 무서워하지만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시골로 내려갔을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시골에 내려가면 마흔살도 스무살처럼 '아가씨'대접을 받을 뿐 아니라 새를 비롯 여러 동물들과 자연스럽게 벗으로 지낼 수 있는 신비로운 체험까지 가능하다.


언젠가 아이들의 주체성을 훨씬 존중해주어야 하는 시기가 오면 어쩌면 우리 부부만이 미나미보소에 다니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할 수 있다면 더 먼 미래에는 손주들도 데리고 다닐 수 있기를, 180쪽

대충의 내용만 보자면 온 가족이 저자의 바람대로 따라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가족구성원간의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한다. 서두에 밝힌 것처럼 도시 나고 자란 엄마가 농촌에 처음 내려갔을 때는 불편함을 넘어선 고통이 따랐었다. 그때 엄마가 견딜 수 있었던 것도 사랑의 힘이었다고 밖에 말 할 수 없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내게 느껴진 것도 농촌생활을 통해 얻어지는 자연의 힘과 가치보다는 엄마를 이해하고 따라주는 세 아이와 힘들 때마다 의젓하게 아내의 손을 잡아주는 남편의 사랑이었다. 무작정 귀농하는 것 보다는 좀 불편하고 번거롭더라도 이 책의 저자처럼 두지역을 오고가는 방식으로 먼저 시도해보고 가족들과 조율한 끝에 결정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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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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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그 남자는 왜 그랬을까.

텔레비전을 부수거나 거울을 깨뜨리지 않고 왜 사람을 죽인걸까.

왜 더 늦기 전에 누군가가 나서서 도와주지 않았을까.

왜.

 65쪽


*



소설 아몬드는 출간 전 연재부터 챙겨보던 소설이었다. 처음에는 표지에 그려진 주인공 윤재의 모습이 너무 무표정해서 사실 윤재가 범죄를 일으키는 소설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이 책을 읽는 내내 부끄럽고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가고 있을 실제 '윤재'들에게 미안했다. 타인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윤재는 사람들로 부터 따돌림을 당한다. 하지만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공감'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공감만 할 뿐 나서서 도와주지 않는다면 아예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 싶었기 때문이다. 위의 발췌문은 윤재가 사회에 대한 분노를 애꿎은 시민들을 향해 뿜어버린 남자에 의해 엄마와 할머니를 잃었던 사고를 당하면서 느끼는 감정이다.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한다는 것은 역으로 자신의 아픔에 타인이 공감해주기를 바란다는 의미다. 실제로 유사한 사건들을 보면 피의자 자신은 엄청나게 힘들고 괴로운데 아무렇지 않게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고 순간적인 화를 참지못해 범죄를 저질렀다고 고백한다. 그런가하면 곤이의 경우는 또 다르다. 곤이는 자신의 슬픔에 공감해주길 강요하거나 그렇지 못한것에 대해 화를 내기보다는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에 화를 낸다. 그것은 마치 자해와 같았다. 강해지기 위해 악마와 다름없는 상대를 직접 찾아나서는 것 역시 그만큼 곤이가 의존적이라는 사실만 깨닫게 될 뿐 이다. 그렇다면 그나마 보통의 기준으로 정상적인 사람은 '도라'라고 볼 수 있다. 제꿈을 위해 반항도 하지만 결국 가족들의 응원을 기대하는 모습은 10대 소녀의 모습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적확한 모습이었다.


*


청소년 소설을 읽을 때면 난 늘 죄의식에 사로잡힌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화책을 읽는 것처럼 너무 웃겨서 배를 부여잡을 만큼 재미있었던 완득이도 그랬고, 우아한 거짓말 또한 읽은 뒤 한참을 방황했었던 기억이 난다. 아몬드 또한 마찬가지다. 초반에 윤재 엄마와 외조모가 윤재를 정상적인 아이처럼 보일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과정은 웃음이 날만큼 재미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어두운 내용이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윤재와 곤이의 삶 자체가 위태로워질 때즘이면 두 아이 모두를 잃게 될까봐 심장이 오그라드는 불안함마저 느끼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이나 윤재와 곤이의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은 작품속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위험인물'이 아닌 '어른들'과 '사회'다. 독자인 나는 하필이면 어른이자 그 사회의 일원으로 숨쉬고 있으니 죄의식을 어찌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몇 년 전 <우아한 거짓말>리뷰를 쓸 때 말미에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고 적었는데 역시나 <아몬드>를 읽고 난 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나를 볼 때마다 역시나 청소년 소설은 정작 읽어야 할 독자가 청소년이 아니라 어른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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