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을 읽고 있으나 나는 아직 서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서문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책 미주에 있는 말들이 너무 어렵기 때문인데, 이것은 내가 ‘철학적 지식’이 전무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때로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을 때 어렴풋한 무언가가 잡히기도 하니까, 그냥 읽는다, 여러 번. 미주만 밑줄긋기하는 것도 처음이네. 일단 밑줄. 그리고 또 때로는 책을 다 읽고 서문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하니까.

책의 제목은 <행복의 약속>이고 부제는 “불행한 자들을 위한 문화비평”이다. 나는 나를 불행한 자에 놓는다. 사라 아메드여, 불행한 자를 위함이 이렇게 어렵습니까???

싹 다 이해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데 철학이론 책(아, 남성철학자들 책...)은 읽을 욕심이 안 생기는 건 무슨 조화냐.ㅋㅋㅋㅋㅋㅋ




10 느낌이 옳고 그름의 척도가 될 때 그런 접근법이 갖는 문제점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리처드 레이어드는 뭔가 그릇된 일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불행해지거나 감정이 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레이어드에 따르면 행복학은 "본질적으로" 가난한 자들과 부의 재분배를 지지하는데, 그 이유는 불평등이 불행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Layard 2005: 120-21). 하지만 그의 이런 주장에는 유감스럽게도, 만일 불평등이 불행을 증가시키지 않는다면 불평등에 반대하지 않을 거라는 뜻이 내포돼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의 노예들은 자유를 원했다. 그 이유는 수입을 더 늘릴 수 있어서가 아니라 노예로 사는 것이 주는 굴욕 때문이었다. 노예제는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고, 그렇기 때문에 노예제도는 옳지 않은 것이다"(121[170]). 노예제가 그릇된 것인 이유는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관념은 이런 그릇됨의 모델에서 무엇이 그롯된 것인지 보여 준다. 그것은 사회적 그릇됨을 개인화하고 심리화한다. 사회적 그릇됨과 상처의 관계에 대한 성찰은 내 책 ‘감정의 문화정치 (2004)의 결론과 고통과 불의의 융합에 대한 벌란트의 중요한 비판(Berlant 2000)을 참조. 특히 주목할 점은, 불의와 상처가 융합돼 생기는 문제 중 하나는, 타인의 감정에 접근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델에서는 타인에게 말할 수 있는 의식적으로 느껴지는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형태의 그릇됨도 보이지않게 된다. - P413

13 페이 웰던이 여성과 행복에 관한 저서에서 한 말을 인용해 보자. "젠더 평등을 위한 투쟁은 외모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진화를 통해서도 전해지지 못한 정의를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어떤 보상도 얻지 못한다면, 그 투쟁은 누구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그것은 당신의 턱만 발달시키고, 보톡스로도 가릴 수 없을 이마 주름을 만들며, 뷰티 플래시[안색을 밝게 해주는 화장품]를 아무리 발라도 지울 수 없을 만큼 안색을 탁하게 만든다. 전반적으로 좋은 점이 아무것도 없다"(Weldon 2006: 52). 웰던은 불행 때문에 외모가 상할 것이며 그 불행은 평등을 위한 싸움이 유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행복하다는 건 외모가 더 좋아 보이는 것이다. 웰던이 보기에 행복하려면, 더 매력적으로 보이려면, 다시 말해 여자가 더 나은 남자를 얻으려면, 평등을 위해 싸워서는 안 된다. 행복은 자기-증진의 기술이다(그녀는 이를 진화적 신체 단련이라고도 한다). 2장에서 살펴보겠지만, 행복과 여성에 대한 리서치는 전통적 여자다움의 형태로 돌아가도록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행복은 수동성과 연결되는데, 이는 행복을 능동성과 연관 짓는 기존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나는 이 책의 결론에서 행복과 능동성의 일치에 대해 논할 것이다. - P414

14 그렇다고 에우다이모니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접근법이 이런 비판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단지 현대의 행복보다 고대의 행복을 이상화하는 태도에 의문을 제기할 뿐이다. 행복을 덕으로 보는 오랜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에서의 글들은 인생에 대해 덜 배타적인 또는 덜 특정한 개념에 근거한 대안적 좋은 삶 개념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매킨타이어는그의 저서에서 덕은 "후천적인 인간적 자질로 그것의 소유와 실행은 우리가 선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며, 그것의 결여는 우리가 그와 같은 선을 성취할 수 없도록 효과적으로 가로막는다"
라고 설명한다. 매킨타이어의 무의식 개념적 분석 (MacIntyre 2004) 개정판 서문도 보라. 여기서 그는 정신분석적 모델들을 비판하며 "합목적론적으로 구조화된 삶"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 개념을 옹호한다. 그는, 신경증에 대한 정신분석적 비판은 "인간의 번영이라는 개념과 양립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런 개념을 필요로 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어서 인간의 번영을 "[인간] 특유의 잠재력의 실현이 이성에 근거한 활동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재정의하는데, 이는 그도 여전히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중시하는 배타적 모델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34-35). 이와 같은 설명을 제안해 준 데이비드 글로버에게 감사한다. - P414

15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하는 사람은 다른 유형의 덕 있는 사람보다 외적인 재화를 덜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Aristotle 1998: 193[374]). 그가 보기에, 사색하는 철학자에게 외적인 재화는 오히려 사색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조하는 철학자로서는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는 외적인 것들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193[374-375]). 바로 이 지점이 정치경제가 개입되는 지점이다. 철학자 주체의 좋은 삶을 사는 역량의재생산은, 인간으로서 갖는 특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의 노동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노동은 철학자를 부양해 주는 노동으로 따라서 가구처럼 배경에 머물러 있게 된다. 퀴어 현상학』(Ahmed 2006)에" 있는 후설과 철학이라는 노동, 그리고 가사 노동이라는 "배경에 대한 나의 해석을 보라. - P414

18 콜브룩은 이런 구분의 예로서 다음과 같은 행복에 대한 니체의 새로운 철학적 개념화를 든다. "행복은 시간 속에서 자기만의 순간의 특수성이나 구체성을 능동적으로 긍정하며 자기 삶을 살아가는 역량 혹은 힘이다" (Colebrook 2002: 19). 그러나 이 "새로운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기존의 행복 개념들과 별 차이가 없으며, 이 책의 결론에서 이야기하겠지만, 그 개념들 상당수가 능동성으로서의 행복 관념에 입각해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새로운 것의 언어 속에 존재하는 오래된 것의 유산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을 배울 수 있다. 즉, 철학은 일상으로부터 배우기를 거부할 때 기존의 습관들을 넘어서지 못하고 자신의 습관을 유지할 뿐이다. - P415

20 나는 이 책 전반에 걸쳐, 특히 1장과 결론에서 윤리와 씨름하게 될 것이다. 정치철학적 측면에서, 아감벤이 인간을 "삶에 있어서 행복이 문제가 되는 유일한 존재이자,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정도로 삶이 행복에 할당돼 있는 유일한 존재"로 정의하고 "그렇지만 이 사실 자체가 곧 삶의 형태를 정치적 삶으로 구성한다"(Agamben 1996/2000: 4[14])라고 하면서 인간의 정치적 본성을 정의하는 데 있어 행복을 결정적인 것으로 보고 있음을 지적해 두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행복을 위험에 처해 있는 무언가로 만들면서 아감벤은 행복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의문에 부치려 한다. 심지어 이 질문은 고통스럽다. 인간에 관한 질문은 행복에관한 질문이 되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 어떻게 잘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된다. - P415

23 행복의 시기는 "반명제antithesis가 사라진 시대로 "역사의 빈 페이지"(Hegel 1837/ 1988: 29)라고 하는 헤겔의 명제와 내 주장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논평해 둘 필요가 있다. 그의 명제는 역사의 활동은 불행과 부정에 달려 있다는 의미로 보인다. 나는 개념-어concept-word인 행복의 역사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다. 즉, 행복은 사고의 지평을 제공한다. 개념어로서의 행복의 과잉결정은 행복이 역사 속에서 어떤 식으로 명멸해 왔는지와 무관하지 않다. 나는 역사 속의 행복이 공백이 아니라고, 즉 공백은 행복의 규제력을 관념으로서 유지시키는 판타지라고 주장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행복의 공백은 투쟁이나 부정성의 부재를 나타내는 표지가 아니다. 행복이 주어져 있을 때 우리는 투쟁이나 부정의 표지를 볼 수 없을 뿐이다. 행복이 공백으로 나타나는 것은 우리가 상황이 진행되고 우리가 "잘 지낼 때"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배웠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공백의 느낌을 만들어 내는 노동을 비롯해 "잘 지냄"을 나타내는 표지들에 의해 지워진 것을 탐색하는 작업이다. - P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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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4-07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공감합니다. 미주가 왜 이리 긴가요ㅠㅠ 미주 읽는데 한참 걸려서인지 진도가 계속 멈춰있어요ㅋㅋㅋㅋ

난티나무 2023-04-07 18:21   좋아요 0 | URL
흑흑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부분 어떡하나요? ^^;;;;; 미주는 또다른 책이라고 해도 될 정도네요… ㅎㅎㅎ

시에나 2023-04-07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미주도 읽으시는구나... 전 세번 읽었어도 미주는 안 읽..ㅋㅋㅋㅋㅋ

난티나무 2023-04-07 18:22   좋아요 0 | URL
악 그러시군요. ㅎㅎㅎ 격하게 안 읽고 싶어지네요.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