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이 질문은 "왜 쓰는가"와 동격의 물음이다. 나의 삶과 글쓰기와 사회는 어떤 관계인가. 나의 글쓰기 태도는 어떤 가치관에서 나온 것인가. 비슷한 말 같지만 조금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어디에 있으며 나의 글쓰기는 어떤 사고방식 때문에 가능했는가." " (10)
바로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들이 있다. 왜냐하면... 단순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지만 그 단순함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대답은 늘, 왜, 한두 문장으로 명료하게 끝나야 하는가? 사람들과 만나고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고(반대로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듣고,도 마찬가지) 돌아와서도 계속 그 질문을 생각한다. 내가 한 대답을 떠올리고 그 대답이 충분치 않았음을, 혹은 조금 어긋났음을 깨닫는다. 아차 혹은 에잇 싶지만 그걸로 끝이다. 그 사람은 내 대답을 듣고 나에 대한 이미지 하나를 만들어 돌아갔다. 다음에 만나 다시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나라는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 그의 뇌리에 박혀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다. 내가 계속 변화하는 존재라는 걸 인식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한다(고 생각한다).
너는 왜 쓰니,라고 물을 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한참을 생각해야 한다. 정희진샘의 다른 책 제목처럼 나는 "나를 알기 위해 쓴다",가 가장 적절한 대답 같지만 그걸로 충분한가? 모르겠다. 지금은 계속 분열하는 나를 찾으려고, 살피려고,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더 잘 보려고, 나와 대화하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더 잘 보려고, 그런 관계들 속에서 내 생각은 지금 어떤지, 어떻게 변화해갈 건지를 보려고, 이해하려고, 분노하려고, 반성하려고, 그러기 위해 혹은 그러지 않기 위해 방법을 찾으려고, 좀더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내 말과 행동과 생각을 정당화하려고, 나를 나에게 이해시키려고, 조금 더 편해지려고... 이런 이야기를 '너는 왜 쓰니'라는 질문 앞에 즉각 늘어놓을 수 있나? 없다. 나는 즉답의 능력이 한참 부족해서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그런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잘 대답하지 못하는 성향이 앞으로는 나아질 거라는 믿음, 이불킥이 줄어들 거라는 믿음, 그거 없이 어떻게 살아?)
왜 쓰는가, 보다 "나의 삶과 글쓰기와 사회는 어떤 관계인가"라는 질문에 더 꽂힌다. 써야 한다는 강박 비스무레한 것이 생겨버린 지금은 책 읽고 나서 무조건 쓰기, 읽으면서도 메모하기, 지나면 잊으니까 어떻게든 기록을 남기기, 스치는 생각을 잡아채서 끄적거리기, 등등을 시전하면서 왜 보다는 어떻게를 더 고민하게 되는 듯한데 사실 이 어떻게,도 고민한다고 해서 짜잔 어떻게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무작정, 되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쓰고 있는 중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글이라는 게 쉽지만은 않아서 때로 끄적거려놓고 차마 플랫폼에 올리지 못하는 글도 있다. 어떻게든 나는 '살고' 있고, 그것을 쓰고, 쓰는 와중에 내가 속했거나 아니거나 한 사회에 대한 내 생각도 거기 들어가게 마련이니 뭐 단순하게 생각하면 셋이 불가분의 관계, 그 정도가 아닐까. 그러니까 그냥 글이 내 삶이고 사회고 뭐 그런 거지. 거꾸로도 마찬가지. 셋이 한몸 속에 들어있는 것. 조심해야 할 것은 언어의 한계와 제한성. 보여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러므로 "물질은 언어에 의해서(만) 물질, 곧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인식 행위가 존재를 가능케 한다"(12)는 정희진샘의 말은 곱씹을 필요가 있다.
"흔히 전체주의와 개인주의,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도그마와 다양성을 대립하는 사고방식으로 생각한다. 페미니즘은 다양성을 옹호하지만, 각각의 다양성이 같은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틀린 생각을 다양성이나 취향으로 옹호한다는 점에서 다양성처럼 탈정치적이고 무의미한 말도 없다. "너도 옳고 나도 옳고, 여혐이 있으니 남혐도 있고, 구타당하는 여성이 있으니 구타당하는 남성도 있다"는 말은 논리도 현실도 아니다." (20)
논리도 현실도 아닌 말을 던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답답하다. 답답하다고 느끼는 것은 정당(?)한가 하는 생각도 한다. 내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 모두 옳지 않을 수도 있지만 팩트를 팩트로 인정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한없이 한숨이 나오고 그만 절망하는 단계까지 갔다가 간신히 돌아오곤 한다. 누군가는 아예 말을 말라고 하고 누군가는 아예 관계를 끊으라고 하고.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모든 관계를 끊으면? 그것도 지향해야 하는 바는 아니지 않나? 세상은 어떻게 변할 수 있나? 스스로 깨우칠 때까지 기다리면 지구는 벌써 멸망하고 인간의 흔적은 싸그리 없어지고 없을 텐데. 그러나 스스로 각성하지 않으면 변화는 오지 않을 거고. 그렇다면 각성할 수 있게 뭐든 하나씩 던져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이 책의 다른 제목이 있다면 '공부란 무엇인가'이다. 아는 것을 버리자. 자기 입장에서 출발해 경계를 넘어서자. 우리 모두 트랜스포머(trans-former)가 되자!" (24)
아는 것을 버리는 일은 지금껏 안다고 믿었던 것들을 바탕으로 몰랐던 새로운 것을 깨닫고 지식을, 가치관을, 재정립하는 과정이라고 풀이한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내가 아는 것이 혹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내가 아는 것이 곧 변화하는 지식 혹은 의견일 수 있다... 자기 입장에서 출발, 우선 내 입장 내 위치를 깨닫는 것. 경계 넘어서기도 실천이 매우 어려운 일이고 매사 염두에 두지 않으면 자칫 내 위치를 망각할 수도 있으므로 또는 함부로 행동하게 될 수도 있으므로 주의를 요하는 일이다. 경계를 넘어서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그런데 어째서 이 어렵고 어려운 일을 '아는' 사람만 해야 하는지. 여기서부터 혹은 여기에 모든 페미니스트들의 고민이 있(었)을까?
+ 9쪽 인용구에 대해서
"페미니즘이 네 주장의 설득력을 보증해주는 것이 아니라, 너의 지식이 너의 페미니즘에 설득력을 가져다주어야 해. 페미니즘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지적으로 신뢰받을 수 있어야 사람들이 네 페미니즘도 신뢰한단다. - 장춘익 "
-> 이 구절 난 좀 맘에 안 드네. 왜냐. 이건 완전히 남성의 시각으로 보는 페미니즘이 아닌가 말이다. 페미니즘도 철학이고 가치관이고 학문이다. 이걸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 남성사회 남성지식인인데(아 가부장적 마인드를 가진 여성들 포함) 다른 영역에서도 지적 신뢰를 받으라니, 이런 황당무계한 말이? 페미니즘을 공부하려면 어차피 다른 분야도 다 공부해서 지식뿜뿜해야 되는 건 맞다. 그러니까 페미니즘 여성학자들 대체로 다 똑똑하잖아! 박식하잖아! 그걸 인정하기 싫으니 저런 말이 나온다. 그래서 나는 이 구절이 전혀 감동적이지 않고 공감도 안 됐다는. 물론 정희진샘은 여러분 공부하세요, 많이 하세요, 이걸 강조하려고 가져오셨겠지만, 그 의도는 충분히 알아챘지만. 아님 이렇게 까라고 가져오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