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행의 리듬은 생각의 리듬을 낳는다. 풍경 속을 지나가는 일은 생각 속을 지나가는 일의 메아리이면서 자극제이다. 마음의 보행과 두 발의 보행이 묘하게 어우러진다고 할까. 마음은 풍경이고, 보행은 마음의 풍경을 지나는 방법이라고 할까. 마음에 떠오른 생각은 마음이 지나는 풍경의 한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는 일은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이라기보다는 어딘가를 지나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보행의 역사가 생각의 역사를 구체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마음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두 발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은 가능하잖은가 말이다. 걷는 일은 곧 보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보면서 동시에 본 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고, 새로운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 속으로 흡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느긋한 관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색하는 사람에게 걷는 일이 특별히 유용한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여행의 경이와 해방과 정화를 얻자면, 세계를 한 바뀌 돌아도 좋겠지만 한 블록을 걸어갔다 와도 좋다. 걷는다면 먼 여행도 좋고 가까운 여행도 좋다. 아니, 여행이 아니라 몸의 움직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제자리를 걷는 것도 가능하고, 좌석벨트에 묶인 채 전 세계를 도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보행의 욕구를 만족시키자면 자동차나 배, 비행기의 움직임으로는 부족하다. 몸 자체의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마음속에서 일이 일어나려면 몸의 움직임과 눈의 볼거리가 필요하다. 걷는 일이 모호한 일이면서 동시에 무한히 풍부한 일인 것은 그 때문이다. 보행은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며, 여행인 동시에 목적지다. "(17/648)
"걷기란 바깥, 곧 공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데, 그 공적 공간에도 위기가 닥쳤다. 기존의 공적 공간이 방치되거나 잠식당하는 경우가 있다. 모든 일을 실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기술적 편의가 공적 공간을 유명무실하게 만들기도 하고, 공포감이 공적 공간에 그늘을 드리우기도 한다. (아는 장소에 있을 때보다 모르는 장소에 있을 때 더 무서운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도시를 돌아다니지 않는 사람일수록 도시가 위협적이라고 느끼고, 도시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적어질수록 도시는 정말로 외롭고 위험한 곳이 된다.) " (26/648)
"한 장소를 파악한다는 것은 그 장소에 기억과 연상이라는 보이지 않는 씨앗을 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장소로 돌아가면 그 씨앗의 열매가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장소는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가능성이다. 세상을 두루 살피는 일은 마음을 두루 살피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세상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 다녀야 하듯, 마음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 다녀야 한다." (31/648)
"도서관에 가던 아이에게 진짜 교육, 적어도 감각과 상상력의 교육은 빗속을 걸어보는 것이 아니었을까."(25/648)
이 문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지금은 모든 것을 인터넷으로 해결하는 시대다. 특히 아이들일수록 동영상 콘텐츠를 백과사전처럼 활용한다고 한다. 세대가 다르고 시대가 다르니 이해는 하지만 용납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컴퓨터 앞에서, 스마트폰을 쥐고, 움직이는 영상에 눈을 내리꽂은 채 몇 시간이고 흘려보내는 날들이, 안타깝다. 나와 동거하는 청소년들 이야기다... 어릴 적에는 도서관에 함께 가서 그림책을 빌리고 읽고 읽어주고 했다. 잠깐 동네산책을 나가더라도 돌멩이 하나와 나뭇가지 하나만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던 아이들이었다. 기계를 손에 쥐면서 아이들은 달라졌다. 고등학생이라는 나이가 더해져 모든 것을 귀찮아하는 사람이 되었고 산책, 운동, 야외놀이 등을 멀리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려던 건 아니었다. 다만... 리베카 솔닛의 저 문장 때문에 지난 날들이 떠올랐... 우리는, 오늘날의 '기술문명'은, 얼마나 아이들을 짓밟고 있는 걸까? 나는 거기에 얼마만큼 동조하는 사람인가? 나는 지금 내가 거주하는 이 공간을 나중에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아이들은?
'바깥, 곧 공적 장소'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아졌다. 위기라는 말에도 공감한다. 외진 곳에, 밤에 다니기 무섭다고, 그렇게 된 원인을 폭력과 혐오가 판치는 세상&사람들 때문이라고만 여겼다. 그런 상황이 더욱 심각해지는 사회구조 문제라고만. 거기에 온갖 기술과 과학의 발달, 사람들의 이기심과 욕망 같은 것들이 더해져 있다는 사실까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돌아다니는 사람이 적어져서 외롭고 위험해진다는 생각은 이제껏 해본 적이 없다. 기술의 발달이 정말 모두에게 좋은가, 어떤 생활방식이 인간에게 이로운가를, 다시 어리석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강옥동 할머니(김혜자)가 수몰되어 사라진 고향 땅을 찾아가는 장면이 떠오른다. 집도 마을도 모두 물에 잠기고 없지만 고향이었던 그곳을, 온통 물인 그곳을 바라보며 옥동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땅에서 어떤 씨앗을 심었었을까. 다시 찾아간 그곳에서 그는 그 씨앗의 열매를 발견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