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의 미친 여자> 잠시 쉬다가 다시 읽기 시작.

4부는 샬롯 브론테다. 9~12장까지. (9장 <교수> 10장 <제인 에어> 11장 <셜리> 12장 <빌레트>) 그 중 11, 12장의 밑줄들을 추려서 가져온다. 읽을 때보다 밑줄로 옮길 때, 긁어서 가져올 때보다(스캔 등의 형식으로) 일일이 타자를 치면서 다시 볼 때 새롭다.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4부 11장 굶주림의 기원


"... 이 게걸스러운 목사들은 많은 브론테의 비평가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단지 지방색이나 무의미한 이탈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장면 덕분에 이 소설은 부자들의 비싼 진미, 외국인의 독특한 요리, 공업 도시에서의 식량 반란, 군인들에게 가야 할 많은 식량, 어린이 노동자들의 불충분한 저녁 바구니, 그리고 실업자들의 굶주림에 대한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배고픔은 착취당하는 이들을 영국 사회에서 독립적인 성공적 삶에서 배제된 모든 사람들과 연결시킨다. 한 노동자는 "굶주리는 민중은 만족할 수도 없고, 정착할 수도 없다."(chap.18)고 명료하게 말한다. 그리고 『제인 에어』에서처럼 배고픔은 반항과 분노에 불가피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이 시대 비평가들이 『셜리』에서 커러 벨(Currer Bell, 샬롯 브론테가 자신이 작품을 처음 발표했을 때 사용한 필명이다.)의 여성 정체성을 발견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 작품의 전지적 시점과 의사擬似 남성적 시점에도 불구하고, 샬롯 브론테의 세 번째 작품은 이전의 두 작품보다 훨씬 더 의식적으로 "여성 문제"를 이야기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1811년부터 1812년까지 영국의 중상주의 경제가 쇠퇴하던 시기의 전시 위기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노동자들의 분노가 모든 피착취자들에게, 특히 (이 장의 제사들이 암시하고 있듯이) 자신들의 삶에서 목적의식을 가질 수 없었던 여자들에게 어떻게 파괴적인 역할을 하는가를 묘사하고 있다.

......

사실상 『셜리』에서 브론테는 어떻게 여자의 배고픔이, 디킨슨의 말로 하자면 "창문 밖 사람들의 / 방식"인지를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왜 "[창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욕망을 "없애 버리는" 방식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남자를 유지시켜 주는 음식과 허구는 정확하게 바로 여자를 병들게 하는 음식과 허구이기 때문이다. 이 "사도의" 목사들이 내뱉는 말은 바로 여자들이 굶주려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리하여 브론테는 여기에서 성경적인 낙원의 신화에 대한 페미니스트적인 비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

633~635


흠, 디킨슨의 비유가 확. 욕망을 없애버리는 방식. 배고픔. 배고픔의 기원. 여자의 배고픔. 요즘 자주 생각하는 것. 배가 고파올 때마다 생각남. 그러나 아직 정리는 안 됨. 배가 고프면 그저 이제는 뭐라도 먹어야 겠다는 생각. 참으로 일차원적이나.




" "모든 남자는 개인으로 보면 대체로 이기적이고, 집단으로 보면 심하게 이기적이기" 때문이다.(chap.10) "

643


무릎 탁!! 




"『제인 에어』가 일련의 알레고리적·가부장적인 위험에 직면해 승리해야 하는 모든 여자들에 대한 하나의 우화인 것처럼, 캐롤라인 헬스톤의 사례는 시련의 진정한 원인이 바로 여성의 의존적인 위치에 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643



"브론테는 바이블이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자에 대한 착취가 어떻게 상업 자본주의를 영속화시키며, 또한 그 상업 자본주의가 인간성과 육체의 본성에 대한 강제적인 통제를 어떻게 영속화시키고 있는지를 폭로하고 있다. 그러나 브론테의 인물들은 성경적 신화의 구속을 피할 수 없다."

651



"이제 (여자는 먹는 것 때문에 저주받았다는) 그 기원의 신화가 여성에 대한 남자의 증오와 자신을 유지하거나 강하게 만드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공포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가 더 분명해진다. 캐롤라인은 먹지 말라는, 말하지 말라는, 그리고 나서지 말라는 명령을 내면화했다. ... 다시 말해서 캐롤라인의 조용하게, 그리고 천천히 진행된 자살은 그녀가 남자의 신화에 의해서 희생되었던 모든 방식을 함축하고 있다.

반면 캐서린 언쇼 린튼처럼, 캐롤라인 헬스톤 또한 일종의 저항 수단으로 자신의 굶주림을 이용하고 있다. 캐서린은 여자로서 "감금"당하는 것을 거부했다. 캐서린의 음식 거부는 부분적으로는 임신의 거부였다. 그러나 신경성 거식증은 처녀에게 훨씬 더 자주 발생하며, 그것은 성숙한 여자로 성장하는 것에 대한 저항으로 볼 수 있다. 스스로 굶는다는 것은 그러한 소녀들을 작은 아이의 몸 상태로 되돌려 주며, 그들이 "저주"로 간주하고 있는 월경 주기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캐롤라인의 굶주림은 또한 사회가 자양분을 주는 것으로 정의한 것에 대한 거부다. 『래크랜트 성Castel Rackrent』의 레이디의 저항처럼, 반항의 행위인 단식은 이질적인 음식으로 사는 것에 대한 거부다. 먹는 것은 자아를 유지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치욕적인 세계에서는 먹는 행위가 복종을 함축하고 있는 타협이라 할 수 있다. 브론테는 여자들은 스스로를 명명하고 자신들의 세계를 조정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해 주는 새로운 이야기가 창조될 때까지, 침묵 속에서 굶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캐롤라인의 굶주림은 탈란트를 잘 투자해야 얻을 수 있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가치가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 때조차도, 부양하는 여자와 대접받는 남자를 비판하고 있다."

659~660


무엇 하나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없구나.

아래와 같은 내용도 떠오르고.


"그러나 아름다움의 신화에서는 여성이 먹는 것이 공적 문제라, 우리가 먹는 양이 우리의 사회적 열등감을 증언해주고 강화한다. 여성이 남성과 같은 음식을 먹을 수 없다면, 공동체에서 그들과 같은 지위를 누릴 수가 없다. 여성에게 공동의 식탁에 자신을 부정하는 태도로 오라고 하는 한, 결코 남녀가 함께 둘러앉은 둥근 식탁일 수 없다. 접는 식탁을 놓고 여성은 밑에서 먹으라고 한 전통적인 위계적 식탁과 같다."

나오미 울프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 304




12장 루시 스노우의 매장된 삶


"『빌레트』는 여러 가지 면에서 샬롯 브론테의 가장 명백하고 절망적인 페미니스트 소설이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교수』와 『셜리』는 여성성의 불안에 기울이고 있는 강력한 관심을 냉정한 가짜 남성주의 외관 뒤에 숨기면서 적어도 다른 의도를 가진 체했다. 그리고 『제인 에어』는 함축적으로 반항적인 페미니스트 소설이라 할 수 있지만 일종의 동화적 구조를 이용하여 남성 사회에서의 여성의 위치에 관한 작가의 깊은 비관주의를 심지어 작가 자신에게조차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브론테의 다른 어떤 여주인공보다 더 나이가 많고 현명한 『빌레트』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루시 스노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없는(사회 바깥에서, 부모도 친구도 없는, 육체적·정신적 매력도 없는, 돈도 자신감도 건강도 없는) 여자다. 그리고 루시 스노우의 이야기는 아마도 지금까지 여성의 박탈을 다뤄 왔던 이야기 중 가장 감동적이며 무시무시한 이야기일 것이다."

672



"따라서 남성 낭만주의자들은 "매장된 삶"을 존재론적으로 미화시키지만, 브론테는 집 없음, 가난, 육체적인 매력 없음, 성적 차별, 혹은 여성에게 스스로의 매장을 강요하는 전형적인 사고와 같은 세속적 사실을 탐구한다. 아놀드와 같은 남성 시인들을 좀 더 타당한 내적 자아를 경험하고자 하는 갈망을 표현하고 있는 반면, 브론테는 단지 이런 사적인 영역에만 머물도록 제한을 받는 여성들의 고통을 묘사한다. 이런 여성들은 매장된 자아를 추구하고 찬양하는 대신, 그 매장 때문에 자신이 희생되었다고 느낀다. 대신 그들은 세상에서 자신들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

......

브론테는 여성의 언어를 탐색하면서 남성 문화의 부적절성을 고찰하고 있다. 남성이 고안해 낸 예술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녀는 여성이 가진 상상력이 여성 자신에게 미칠 위험을 탁월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

676~677



"... 워즈워스의 루시는 자연의 보호("불 붙이거나 억제하는 / 감독하는 힘")을 받지만, 브론테의 루시는 자신의 개인적인 모순이 불러일으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워즈워스의 루시는, "말없는 비정한 사물들의 / 침묵과 평온"을 향유하면서, 잔디를 가로질러 새끼 사슴처럼 즐겁게 뛰노는 반면, 브론테의 루시(그녀는 인적 없는 곳에서 아는 사람 없이 살고 있기 때문에)는 바람에 두들겨 맞아 추방되어 갈 곳이 없거나, 존재가 없는 삶 속에 숨 막혀 매장될 운명이다."

697


이런 비교. 요즘은 특히 남성작가의 글을 잘 안 읽기는 하지만 간혹 접하는 글들을 볼 때 느끼는 묘한 감정들, 때로는 내가 너무 편파적인 눈으로 보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할 정도로, 아아 막 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매우 적절한 예시라고 생각하며 읽음.


"왜 브론테는 의도적으로 문제를 회피하려 하거나 독자를 오해하게 하는 화자를 선택했는가? 예를 들어 루시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온화한 날씨 속에서 쉬고 있는 돛단배"처럼 그리면서 문제를 회피하거나 독자들의 오해를 산다. "많은 여자들과 소녀들은 이런 식으로 그들의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chap.4) 왜 브론테는 허구적인 전기를 서술하기 위해서 엿보는 사람을 선택했는가? 이는 화자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더 매력적인 여자가 이야기의 중심인물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방식을 고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명 루시의 삶과 루시의 그녀 자신에 대한 인식은 여성의 삶을 규정하고 제한하는 그녀의 문화가 강요하는 문학적·사회적 전형에 부합하지 않는다. 루시는 또한 마치 자신에게는 아무 이야기도 없는 것처럼 느낀다는 점에서 괴테의 마카리를 닮아 있다. 루시는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서사 구조들을 차용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서사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루시는 자신의 경험에 맞지 않거나 부적절하거나 정도를 벗어난 것으로 간주되는 이야기들을 생략하거나 무시할 때조차도, 남자가 고안한 이야기와 이미지를 사용, 오용하고 있는(제시하고 꺾어 버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702


'문제 회피' '자신에게는 아무 이야기도 없는 것처럼 느낀다는 점' 같은 구절에 방점 팍팍 찍힌다.


"그러므로 화자로서 회피하는 방식을 택한 루시는 그녀가 (그리고 모든 여자들이) 침묵의 복종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그리고 목소리를 찾기 위해서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루시는 자신이 이어받은 모든 형태의 감금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진정으로 신화적인 일(자기 자신의 적절한 허구를 창조하고자 하는 시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빌레트』는 거의 똑같이 나뉘어진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첫번째 부분은 고해실의 에피소드까지 루시를 데리고 가며, 두 번째 부분은 마담 벡의 거처에서 나와 스스로 길을 헤쳐 나가려는 루시의 새로운 시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브레튼가가 등장하는 막간에서, 브론테는 가부장적 문화의 미학적 관습이 왜, 그리고 어떻게, 성차별적인 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제도와 마찬가지로, 여자들을 감금시키는가를 탐색하고 있다."

702~703


"거울은 실재를 반영하지 않는다. 거울은 실재를 해석함으로써 실재를 창조한다. 그러나 해석의 행위는 지각의 행위로 남아 있을 때만이 포학성을 피할 수 있다. 결국 "작은 방어들이 축적되는 곳에서만 (...)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은 확실하다."(chap.27) "

729


"가부장적 예술을 전복시키기 위해서 브론테가 사용하는 것은 수용의 행위다. 최근에 몇몇 페미니스트들은 브론테가 그녀의 여주인공들을 수동적 인물로 그렸다는 이유로 불편해한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브론테의 작품들은 남성성을 권력과, 여성성을 굴종과 동일시하는 악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브론테는 순종의 습관이 여성에게 중요한 통찰(여성들이 저항할 때 그들의 주인처럼 되지 않도록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공감의 상상력)을 주었음을 알고 있었다. 여자들은 자신들을 대상으로서 경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죽음에서 깨어날 필요성과 깨어날 수 있는 능력 둘 다를 이해하고 있다. 그 여성들은 그 능력과 필요성은 마술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마력이며, 박해하는 고백적인 참회가 아니라 부활시키는 고백적인 예술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또 다른 타자를 그들이 탈출했던 장소에 옭아매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예술이다. 시학의 정치학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브론테는 어떤 의미에서, 현상학자(이성과 상상 사이의 간극을 공격하고, 객관적인 예술 작품의 주관성을 주장하며, 그녀 소설의 주제로 대상화된 희생자들을 선택하고, 그녀와 함께 타자화된 사람의 내면성을 경험하도록 독자를 초대하는)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브론테는 끊임없이 고통 받았던, 그리고 좀처럼 잊을 수 없는 그녀 예술의 정직성 덕분에 힘을 얻었던 모든 여성들의 강력한 선구자다."

733



샬롯 브론테 대단해, 하며 읽었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똭 정리를 해주시는 저자님들. 맞습니다, 맞고요. 왠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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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22-03-25 0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난티님 이 책 구해서 읽고 계시군요! 이 책 정말 대단하지요?

난티나무 2022-03-25 14:07   좋아요 1 | URL
네! 흥미진진해요~^^ 개정판 나올 땐 번역도 좀더 매끄러우면 좋겠어요.^^

독서괭 2022-03-25 0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브론테를, 특히 빌레트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인에어밖에 안 읽어서^^
이 책도 상당히 두꺼운 모양입니다. 휴~ 언제 읽죠?ㅎㅎ

난티나무 2022-03-25 14:09   좋아요 2 | URL
엄청 두껍습니다. ㅎㅎㅎ 저는 제본한 책이라 권 수로는 세 권이나 되고요.^^;;;
소설들 다 읽어보고 싶은 마음 저도 들어요!^^

바람돌이 2022-03-25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이런 내용이었군요. 저는 제목만 보고는 소설인줄.....ㅠ.ㅠ 절판인데 난티나무님처럼 이렇게 리뷰를 써주는 분이 자꾸 생기면 출판사에서 재출간을 하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

난티나무 2022-03-25 14:11   좋아요 1 | URL
저도 이런 책인 줄 몰랐…ㅋㅋㅋ 그러나 재밌습니다!
올해 말쯤 나온다고 들었어요. 🥳

청아 2022-03-25 1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티나무님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저도 <빌레트>너무 궁금하네요.
도서관에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빌렸었는데 두께의 압박에 놀라고 무서워 조금 읽다 반납했어요ㅋㅋㅋ 그래도 책이 재출간된다면 꼭 사고싶어요^^*

건수하 2022-03-25 12:58   좋아요 2 | URL
다락방님이 전에 이 책 재출간 소식이 있다고 하셨던 것 같아요 (전 국회도서관에서 제본한 책으로 갖고 있…)

청아 2022-03-25 13:19   좋아요 1 | URL
네 수하님! 저도 그래서 알림해놓고 기다리는 중이예요^^* 제본 갖고 계시다니 부럽습니다.재출간은 두 권으로 나눠서 나옴 좋을것 같아요!

건수하 2022-03-25 13:20   좋아요 2 | URL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지요 ㅎㅎ 펴보지 않고 새 책이 나올 것 같아요…

난티나무 2022-03-25 14:13   좋아요 2 | URL
미미님^^
얼마 전에 서재에 빌레트 바람이 좀 불었었는데 그때도 읽고 싶다 했었거든요. 아 근데 사실 안 읽고 싶은 마음도 살짝 들기는 해요.^^;;; 제인에어를 읽을 때의 마음과 마찬가지일 것 같아서 ㅎㅎㅎ

난티나무 2022-03-25 14:15   좋아요 2 | URL
수하님^^
저도 제본이에요. 반갑!!!^^
새 책 나오기 전에 읽으려고 저도 애쓰고 있습니당. ㅎㅎㅎ

건수하 2022-03-26 22:37   좋아요 1 | URL
앗 저도 세 권으로 제본이요! 반갑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