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우리는 페미니스트여야 하는가? 이 질문은 오히려 많은 것을 원점으로 되돌린다. 페미니스트여야 하는가 아닌가, 페미니스트가 아니어도 되는가 아닌가, 이것은 페미니즘을 개인이 어떤 옷을 입을지 결정하는 문제처럼 다룬다. 이건 가짜 논의다.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에, 성별·피부색·성적 지향 등 생득적인 이유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페미니스트여야 한다. 여성이라 돈을 덜 받고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되고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포기해야 할 확률이 더 높아지는 것에 반대한다면 우리는 페미니스트여야 한다. 하면 좋고 안 해도 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확장된 규칙이 아니라, 인간은 존재하는 그대로 존엄하며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가장 근원적인 한 줌의 도덕이다. 페미니즘마다의 각론과 실천의 방식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페미니스트여야 한다는 것은 문명인으로서의 전제 조건이다. 민주주의자라면, 진보주의자라면,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바란다면,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바란다면, 깨어 있는 시민이라면, 페미니스트여야 한다. 페미니즘 없는 민주주의는 말하자면 동그란 세모 같은 것이다.

의외로 여성들도 오해하는데, 한국 남성들이 가부장제 안에 여성들을 갈아넣는 건 보수적이라서가 아니라 이기적이어서다. 차례와 벌초와 시가방문에 집착하는 남성들이 조상의 은덕을 진심으로 믿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아내와 며느리의 노동력을 착취해 누리는 푸짐한 명절 풍경을 포기할 수 없는 것뿐이다. 적어도 한국의 명절 문화에서 전통적 가치란 허구일 뿐이다. 현대에도 이어갈 전통적 가치가 과연 무엇인지 고민하기보단, 한국남성들의 이기적인 태도를 근대 시민의 기준에서 고발하는 것이 명절 문화와 그 기저에 놓인 가부장제의 실체를 훨씬 잘 드러내줄 것이다.

사실 나는 남성들이 젠더 이슈에 둔감하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들이 정말로 둔하다면 오히려 페미니즘 운동을 보면서도 콧방귀를 뀌며 자신들의 천년 왕국을 그리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젠더 이슈가 권력의 문제라는 것을 체화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권력에 대한 도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한국 남성들이 여성혐오를 유희로 즐길 자유, 불법 촬영물을 즐길 자유, 일상적 성희롱을 할자유를 지키기 위해 백래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도덕적 당위가 아닌 젠더 권력 때문이란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 남성들에 대한 도덕적 설득 혹은 설복도 중요하지만, 우선 본인에게만 좋던 과거는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고 체념시키는 것이 먼저다. 그들이 버티는 건, 단순히 본인들의 주장이 옳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본인들이 주장하는 게 옳은 것이 될 수 있던 시대를 살아와서다.

창작에 있어 동시대에 대한 민감성이란, 단순히 지금 이곳의 풍경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어있는 여러 구조적 모순과 부조리까지 인식하는 능력이다. 즉 현실을 더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서라도 현실의 이면에 작동하는 구조와 권력의 메커니즘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리얼리티란 결국 세상을 읽는 성실성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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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08-03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근우 글 잘쓰죠. 진짜 시원함.

난티나무 2021-08-05 03:52   좋아요 1 | URL
저는 왜 위근우를 안 사고 박정훈을 샀을까요?^^;;;;;

라로 2021-08-06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성의 인류학자> 다 읽었습니다요. 역시 탬플 그랜딘의 스토리가 젤 좋았어요. 그전엔 버질의 이야기가 좋았지만,,결국엔 탬플 그랜딘의 이야기를 끝내며 눈물이 뚝..ㅎㅎㅎㅎㅎㅎㅎ
난티님 읽으실 책이 줄을 이은 것 같으니 서두르지 마십시요. 저는 덕분에 읽게 되어 감사해요.^^

난티나무 2021-08-06 01:27   좋아요 0 | URL
와! 시험도 치셨다는 글 좀전에 봤는데 벌써 다 읽으셨군요! 짝짝짝!! 저는 시작도 안(못)...ㅎㅎㅎㅎㅎ 읽을 책이 너무 많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