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장우산을 집어든다. 우산 쓸 일이 많지 않은데도 우산살 하나가 빠져서 덜렁거린다. 적당히 어깨에 기대어 들고 걷는다. 비오는 토요일에는 사람 그림자 찾아보기가 힘들다. 어지러이 울어대던 새들도 조용하다. 조용하다고 할랬더니 어디선가 새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저기쯤이라 짐작되는 나무 위를 쳐다보지만 헛일이다. 비를 맞고 있지는 않겠지. 많이 안 춥네 하던 생각은 방향을 틀어 바람을 얼굴에 맞게 되면 어김없이 바뀌어버린다. 몇 발자국 더 걷다가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모자를 꺼내어 뒤집어쓴다. 이 모자는 그러니까 햇수로 20년이 훌쩍 넘었다. 20년이 뭐야. 30년 가까이 된 것도 같다. 숫자로 적으니 놀랄 만 하구나. 30년 가까이 멀쩡하다니. 잡지를 사고 사은품으로 받은 것 같은데 넓은 챙모자만 어울리는 듯한 내 두상에 겨우 어울린다는 소리를 할 수 있을 디자인이라 겨울 내내 버리지 않고 쓴다. 쓸 일이 많지 않아서 오래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산 쓰고 걸어다닐 일이 없네 하고 보니, 재작년 여름 한국에서의 비가 생각난다. 모처럼 부산엘 왔다고 어디라도 데려가고 싶어해서, 그럼 보수동 책방골목에 갑시다 나선 길이었다. 비가 올 것 같아 우산을 있는대로 챙겼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온 골목에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백여미터나 걸었을까, 빗줄기는 점점 굵어져서 작은 우산으로는 막아내기가 버거워졌다. 줄줄이 가게 차양 밑으로 몸을 피한 채 이왕 젖은 거 계속 걸을래 그냥 돌아갈래.

나는 가보고 싶은 책방이 있었다. 헌책방들 말고 그 골목 언저리 어딘가에 있다는 작은 책방, 그곳에 가고 싶었다. 헌책방에는 책들이 안팎에서 습기를 견디고 있었다. 접은 우산의 물길이 책에 닿지 않도록 조심해서 걸었다. 다른 사람들이 헌책방 구경을 하는 동안 나는 작은 책방을 찾아나섰다. 동생에게 빌려신은 샌들은 이미 푹 젖은 채였고 치마바지도 절반은 젖은 채였다. 분명 지도에는 여기라 되어있는데 그 자리에 책방은 없었다.

주말이고, 계속 비가 내린다. 점심식사가 끝날 무렵의 시간, 길에서는 물소리만 들린다. 집집마다 다른 소리의 물들. 처마에서 땅으로 직행하는 물방울들의 소리, 모인 물이 통을 타고 흘러내리는 소리, 또락또락 떨어지는 소리, 통통통 튀는 소리, 하수구를 흘러내려가며 위에서 떨어지는 물과 만나는 포로퐁퐁 소리, 관을 울리며 나는 소리들, 화음들. 천천히 걷다가 문득 멈추어보기도 하면서 듣는 음악. 

그 장대비 오던 날 보수동 어귀의 작은 까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면 좋았을 걸. 옆지기와 예전에 갔었던 그 까페에 잠시 앉아있다 오면 좋았을 걸. 문을 열지 않아 아쉽게 돌아섰던 기억. 안해도 좋은 생각들.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 뜬금없이 그런 기억이 떠오른다. 헌책방의 책들은 무사할까. 물이 튀지 않아야 할 텐데. 나를 재촉할 거면 책방에 같이 가자고 하지 마. 이런 문장들을 머릿속으로 읊조린다. 암, 책방은 혼자 가는 맛이지.

젖은 우산을 현관에 기대어 두고 신발을 벗는다. 작은넘에게 작아져서 못신는 걸 물려(?)받았다. 방수 되는 겨울 신발이라 빗속을 걸어도 끄덕없다. 비와 눈의 산책을 가능케 해주는 물건이다. 들어오자마자 커피물을 얹는다. 스트레칭과 운동은 빼먹어도 오후의 커피는 빼먹지 않는 모순덩어리. 아, 커피는 치코레다. 카페인 제로. 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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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1-01-31 0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머리 질끈 묶고 한책방 안에서 조용히 책을 읽던 주인장의 옆모습이 생각나는 글이네요~

난티나무 2021-01-31 06:07   좋아요 2 | URL
비연님 가보셨군요. 저는 서너 번쯤 간 것 같은데 한번도 느긋하게 책을 골라본 적이 없어요.ㅠㅠ 그래서 책을 산 적도 없답니다.ㅎㅎㅎㅎ
완전 그려져요, 헌책방과 주인장의 모습!!!!

hnine 2021-01-31 0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도 좋은데, 사진마저 감성 듬뿍입니다.
(저도 제 아이 옷, 신발, 물려입고 물려신고 그런답니다 ^^)

난티나무 2021-01-31 06:10   좋아요 1 | URL
저 지금 입고 있는 스웨터도 아이 거예요. ㅎㅎ
폰 카메라 촛점이 나가서 엉망인데 가끔은 흐릿해서 좋을 때도 있더라고요. 꼭 촛점 맞아야 하나 싶을 때도 있고...ㅎㅎㅎㅎㅎ
좋게 봐주셔서 매우 감사합니다~^^

라로 2021-01-31 16: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이 음악처럼 읽혀요. 여기도 비왔는데. 저는 빗소리도 못듣고 일만;;; 암튼 저도 드디어 막내 옷이랑 신발이랑 물려받아 입고 걸치고 들고 다 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되나봐요.

난티나무 2021-01-31 19:57   좋아요 0 | URL
일하시는 라로님 응원합니다!
그렇게 되는군요~~ㅎㅎㅎ 애들 옷이 또 더 이쁜 것도 있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1-02-01 0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 너무 좋아요. 난티나무님 사진에는 뭐랄까 묘한 ‘느낌‘이 전해져요. 외국이라서 그럴까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전 부산에 두 번 갔었는데 헌책방은 못 가봤네요. 코로나 괜찮아지고 부산에 가게되면 한 번 가보고 싶어요. 작은책방 거리요^^

난티나무 2021-02-01 22:07   좋아요 0 | URL
느낌 있다 하시니 으흐흐 좋습니다. 촛점 나간 카메라 덕분(?)!!! ㅎㅎㅎ
부산에서는 늘 시간에 쫓겨서 다닌 것 같아요. 돌이켜보니 역시 여행은 혼여! 함께 하는 사람이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동행도 오케이! 아... 진짜 여행 느무 가고 싶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