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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은교.
이름부터 묘한 감이 있다.
뭐랄까?
노골적인 유혹의 느낌은 아니지만, 담담한 듯 아무 것도 몰라요 인 듯, 하지만 또 뭔가 다 알고 있을 것만 같은 듯한 알쏭달쏭한 느낌이랄까? 풋내 나는 고등학생의 은교와 그러면서도 성적 욕망을 불러 일으키는 은교의 모습을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다 싶다.
처음에는 이 소설이 단지 칠십 먹은 노인이 어린 여자에게서 성적인 욕망을 느낀다는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출간 당시에는 별로 읽고 싶지가 않았다. 은교 속 이적요 시인의 말대로 늙음은 죄가 아닌데도, 노인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린 학생을 두고 성적인 욕망을 생각한다는 건 어쩐지 변태스럽고 거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단순히 그런 이야기만은 아니였다. 오히려 늙음과 젊음...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이의 오만함과 무능의 비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의 열등감, 세상의 위선과 거짓, 그것들에 속는 대중의 모습까지...
작가는 은교에 이르러 실존의 현실로 돌아와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탐험하고 기록했다고 느낀다고 말했던 것처럼, 겉과 속이 다른 세상의 것들을...실상은 다른데 같아야만 한다고 우기는 우리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몸은 늙어도 여고생을 탐할 수 있고, 도무지 소설 쓰는 재주가 없고 멍청해도 작가인 척 할 수 있고, 실상은 메마르게 살았으나 그것이 시인으로써의 정체를 위해 일부러 고요하고 쓸쓸한 삶을 선택한 듯 고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고, 오직 시에만 매진했다는 극찬을 위해 자신의 산문은 발표하지 않는 계산도 하고...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며 이게 말이 돼?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어! 라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이런 시인도, 이런 욕망도, 이런 소설가도 있을 수 있겠지. 있을 수는 있지 않을까? 우리가 단지 모를 뿐.
인간은 우리가 그래야만 한다고 규정 한대로 그렇게 고매한 동물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야만 한다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 유혹을 받고, 흔들리고, 하지만 사회통념, 도덕, 법, 양심 등에 눌려 아닌 척 하고 있을 뿐.
인간의 수많은 욕망들이 뒤엉키면서 파멸을 향해 가는 이 소설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사건의 구성 뿐만 아니라 욕망의 변화도 나를 잡아끈 이 소설의 매력이다.
일단 이 소설의 이야기는 늙은 시인이 싱그런 여고생 아이를 만나 성적인 욕망을 느끼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신의 집에 와서 청소하는 그 아이를 보며 꿈틀대는 욕망을 느끼는 노인. 하지만 자신과 은교 사이의 너무나도 먼 시간의 간격을 느끼며 때론 좌절하고, 쭈글해진 자신의 몸뚱이를 보며 무력해하고, 자신보다 젊고 탄탄한 몸을 가진 제자를 질투하고, 그러다 제자와 은교 사이를 의심하며 질투는 경멸로 바뀌고, 스승의 작품에 작가인 척, 거짓된 작가 생활을 하며 괴로워하던 서지우는 열등감에 차오르고, 스승의 경멸을 느끼며 더욱 은교에 집착한다. 거기다 세상에서 떠받드는 시인 이적요 스승이 은교 때문에 혹여라도 다치는 일이 생길까 두려워도 하고, 스승보다 젊다는 이유로 우쭐대기도 한다. 그러다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이적요는 자신의 늙음을 인정하고 은교에 대한 마음 속 욕망들을 잠재운다.
하지만 그 사건이 자신의 제자 서지우의 짓이라는 걸 알고 그에 대한 연민, 질투, 경멸, 배신감 등 모든 감정이 분노로 바뀌고, 복수를 계획한다.
그것은 서지우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고, 늙음에 대한 세상의 멸시와 홀대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이적요는 그 분노를 이렇게 표현했다.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라고 또 나는 말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라고, 소리 없이 소리쳐, 나는 말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욕망들은 이처럼 결국 분노에까지 이르고, 그 분노는 주인공들을 파멸의 길로 이끈다.
노인은 욕망하면 안되는 걸까? 왜 노인의 욕망의 끝은 파멸이여야 할까?
시작은 노인의 욕망이였지만, 그 욕망들이 가장 가까운 이들의 또다른 욕망과 부딪히며 참담한 끝장을 보았다.
각 개인들의 내밀한 욕망을 보며 드는 생각은 ‘추하다’가 아닌 ‘안쓰럽다, 애처롭다’이다.
인간은 겉만 대충 보면 알 수 없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참 애처로운 존재가 아닌가 싶다.
타인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모르게 내 안에서는 된다 안된다로 늘 고군분투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가? 그런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네 속을 본 것 같아 마음이 묵직해졌다.
은교는 어찌보며 거울과 같은 존재이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이 아닌 반대로 보여주는 거울이랄까
은교를 통해 이적요 시인은 자신의 늙음과 직면한다. 은교의 싱그러움에 대조되는 자신의 모습, 개인에만 치중하면 되는 은교의 시대와 사회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어야만 했던 그의 청춘 시대.
서지우에게도 마찬가지로...은교가 아니였다면 그저 존경하고, 사랑하기만 하면 됐을 스승을...
은교라는 거울을 통해 스승보다 못난 자신을 더 처절하게 봐야 했다.
은교는 그들의 욕망에서 약간 비껴서 있는 듯하다.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한참 떨어져있는 조연인 듯 싶다. 단지 그들의 욕망을 비춰주기 위한 존재랄까?
변호사의 말대로 은교는 그저 평범한 그 나이대의 여자아이였을 뿐.
소설 은교는 내게 신선했다. 어리지도 늙지도 않은 내게는 은교도 이적요도 낯설었다.
차라리 서지우가 공감이 간다면 간다.
십대를 이해하기엔 내가 나이 들어버렸고, 노인의 심정을 이해할 만큼 늙지는 못했다.
소설에서 세대 차이를 느꼈다. 안타깝지만 욕망의 변주곡이 파멸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도 매우 흥미진진했다.
소설을 읽은 후 영화를 봤다. 실은 영화를 보기 위해 소설을 먼저 읽었는데, 그러길 참 잘했단 생각이 든다. 소설을 먼저 읽지 않았다면 영화에서 실망하고 소설을 펼치지 않았을 것 같다. 소설을 읽으면서도 내내 생각했다. 글로만 쓸 수 있는, 표현할 수 있는 소설이 아닐까 하고... 역시나 영화는 소설에서의 의미들을 충분히 담지 못했다. 하지만 어려운 작업이였으리라 여겨진다.
나 또한 책을 덮고 복잡한 심정이 되어 서평 쓰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읽는 건 쉬웠으나 서평을 쓰자니 머릿 속 생각들이 제멋대로 떠다니는 기분이였다.
오랜만에 신선하고 흥미롭게 읽었으나 서평은 머리에 쥐나는 기분으로 마친다.
내 성에는 차지 않는 서평이다. 다음에 한번 더 읽고, 서평도 다시 한번 써봐야겠단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