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에스파의 카리나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지난번 연애 논란이 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그런 팀과 멤버가 있다는 것만 알았지 구체적인 이력까지는 몰랐는데, 아무래도 노래부터 영 낯설다 보니 한창 유행할 때에도 딱히 매력을 느끼지는 못한 까닭이다.


그런데 나중에 시구 영상을 보니 의외로 잘하기에 '공 잘 던지는 아가씨는 못 참지!' 하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고, SM 경영권 분쟁이 마무리되어 신곡이 나오면서 유튜브에서도 쌍둥바오와 김루이와 미소아라티티만큼 자주 접하며 자연스레 친숙해지게 된 셈이다.


다만 에스파의 노래만큼은 제목부터 영 나귀님 취향이 아니고, 가사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서 굳이 들을 마음이 없었는데, 최근 카리나가 출연하는 어느 방송에서 가수 거미가 새로 부른 "아마겟돈" 영상을 보니, 저 노래가 결국 저런 내용이었던 건가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노래방에서 혼자 부르면 마치 불경 외우는 느낌이 들더라는 누군가의 댓글처럼, 듣기에는 그럴싸한데 막상 재현해 보면 영 이상한 것이 아이돌 노래의 특징은 아닐까. 이른바 최근 음악계의 양산형 유행가가 끼친 해악에 대해서는 음악 유튜버 릭 비아토도 줄곧 비판한 바 있다.


여하간 "아마겟돈"도 스리슬쩍 들어 봤으니 또 하나 들어 봐야겠다 싶어서 틀어본 것이 이른바 "효녀 카리나" 쇼츠에 나온 리허설 때 부른 곡인 "에너지"였다. 제목은 에스파(Aespa)의 철자처럼 "에너지"(Aenergy)라고 쓰지만 실제 노래에서는 "아이너지"처럼 발음하는 듯하다.


이건 그나마 다른 노래보다는 좀 낫구나 싶어 연속 재생을 하다 보니 서서히 가사가 들리기 시작하는데, 뭐 우리를 누가 보냈고 카리나는 무쇠팔 무쇠다리이고 어쩌구 하기에, 그제야 이 내용이 이 걸그룹의 세계관인지 부캐인지 하는 설정에 대한 일종의 해설임을 깨달았다.


이른바 3대 기획사 중에는 SM이 이런 설정놀음에 제일 열심인 것 같은데, 나귀님이 알기로는 엑소라는 남돌부터 본격화된 것이 아닌가 싶다.(레드벨벳 때에는 확실히 없었으니까). 거기서도 뭐 외계에서 온 능력자라고 해서 멤버마다 제각기 특기를 지닌 것으로 나온다나 뭐라나.


그런데 문제는 이런 세계관 설정이 팬들 사이에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질지 몰라도, 나귀님 같은 일반인이 보기에는 상당히 오글거린다는 점이다. 아마 멤버들도 비슷한 느낌인지, 언젠가 <아는 형님>에 출연한 엑소도 각자의 능력을 비꼰 이수근의 드립 앞에 너덜너덜해졌었다.


그렇다면 에스파의 세계관 설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귀님도 차마 본격적으로 파헤칠 엄두까지는 나지 않지만, 대강 파악한 바에 따르면 에스파의 멤버 네 명은 외계에서 뭔가 임무를 부여받고 파견된 일종의 사자이며, 무쇠팔 무쇠다리를 비롯해 저마다 다른 능력을 지녔다.


그런데 "에너지"는 에스파의 세계관 설정을 소개하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서사 무가의 본풀이와도 유사한 느낌을 준다. 강신무가 접신을 위해 주문처럼 짧게 반복하는 무가와 달리, 서사 무가는 인물과 줄거리를 갖추고 세습무가 마치 판소리 사설처럼 구연하는 것이 특징이다.


무당이 섬기는 신의 내력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본풀이로는 "바리데기"가 있는데, 주인공이 비범한 탄생, 억울한 시련, 이세계 여행, 시험 통과, 귀환과 신격화의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는 조지프 캠벨이 정립한 이른바 '영웅의 여정' 도식과도 딱 맞아 떨어진다고도 할 수 있다.


만화 <신과 함께>에도 등장해서 유명한 강림이 염라대왕을 체포해 온다는 내용의 "차사본풀이"도 유명하다. 아들 삼형제를 잃었다는 어머니의 호소에 시달린 원님의 명으로 강림이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을 데려오고, 사건 마무리 후에는 아예 이직(?)하여 차사가 된다는 내용이다.


가뜩이나 무속 때문에 나라가 뒤숭숭한데 어디 감히 에스파 노래를 서사 무가에 비견하느냐고 분노할 만한 팬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긴 비상 계엄 직후 군 장성들이 줄줄이 구속되면서, 내란 혐의로 사형이 집행되면 최영과 임경업에 버금가는 몸주들이 줄줄이 나오게 생겼으니까.


하지만 이와 유사한 주술적이고 제의적인 내용의 구비 서사는 아메리카 인디언을 비롯해 전세계 각국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므로, 어떤 면에서는 에스파의 오글벅적한 무쇠팔 무쇠다리 세계관 설정 서사도 마블 영화를 비롯한 각종 창작물에서 나타난 원형의 반복일 수 있다.


그러니 이제는 나귀님도 그냥 포기하고 "에너지"를 들어야 하나 싶기도 한데, 이상한 점은 첫 앨범의 수록곡인 "리브 마이 라이프"처럼 비교적 멀쩡한(?) 곡도 있다는 점이다. 레드벨벳 느낌이라 귀에 쏙 박히던데, 차라리 그냥 평범한(?) 컨셉으로 나왔어도 성공하지 않았을까.


구글링해 보니 에스파 세계관은 노래와 앨범을 통해 계속 전개되는 중이라는데, 문제는 멤버들도 이제는 과한 설정에 부담을 느끼는 듯하다는 거다. 최근 이영지 프로에 나와서도 세계관을 언급하자 무척 민망해 하는 모습이 보였다.(물론 곧이어 존박이 훨씬 더 민망해졌지만).


물론 당장 데이비드 보위의 명반 <지기 스타더스트>에서도 이와 유사한 설정놀음이 있었고, 공상과학소설이나 마블 영화와 비슷한 느낌이라는 점에서도 호소력이 있을 법하다. 다만 나귀님 입장에서는 그걸 멤버들 스스로도 오글거려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ㅋㅋ)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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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서 US 스틸 매각설을 접하고 나니 문득 예전에 뒤적여 본 모건 관련 자료가 생각나서 옥탑방에 올라갔다가, 마침 책더미에서 <청년 고리끼>(필리아 홀츠만 지음, 이강은 옮김, 푸른산, 1989)가 눈에 띄기에 그것까지 꺼내서 내려왔다. 지난 여름 물난리에 책더미를 크게 한 번 뒤집어 엎었더니 평소 안 보이던 책도 눈에 보인다.(근데 <규합총서>는 왜...)


<청년 고리끼>는 1980년대의 전형적인 사회과학 출판사 책이다. 나귀님은 이걸 '이론과실천 계열 디자인'이라고 분류하는데, 구체적인 이유까지는 모르겠지만 이론과실천, 이성과현실, 동녘/친구 같은 예전 사회과학 출판사들의 디자인이 어쩐지 유사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일종의 계열사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외주 디자이너가 똑같았을 수도 있겠다.


그나저나 책을 뒤적이다 보니 역시나 예전 사회과학 책답게 역자 후기도 없고, 따라서 저자나 원제에 대한 정보도 없기에 뒤늦게야 구글링 끝에 기본적인 서지사항(The Young Maxim Gorky 1868-1902 by Filia Holtzma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48)을 알아냈다. 저자는 러시아 출신의 미국 학자라지만, 옛날 책이다 보니 지금은 거의 잊힌 듯하다.


지난번 체홉에 대한 글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최근 들어 고리키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난 원인은 바로 단첸코의 회고록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전부터 이 작가의 소설이나 에세이는 물론이고 전기까지도 꾸준히 구입해 왔다. 한때나마 <어머니>가 대학생의 필독서로 여겨진 까닭인지, 다른 작품들도 우후죽순 격으로 잔뜩 나와서 헌책방에 흔히 널린 까닭이다.


그래서 내친 김에 지난번 체홉을 읽었을 때처럼 고리키 관련서를 싹 모아서 전기부터 장편과 단편과 에세이와 회고록까지 독파해 볼까 생각했는데, 차일피일 하다 보니 이제 겨우 전기와 단편집 몇 권을 한 자리에 모았을 뿐이다. 그 사이에 단편집 몇 가지도 새로 나온 모양이니, 체홉 때처럼 겹치는 작품이 있는지 비교 분류하는 것부터 만만찮은 일이 되겠다.


고리키의 단편 중에서는 황장엽이 회고록에서 인용했던 "매의 노래"가 기억나고, 창비의 러시아 단편집에서 처음 읽은 "남자 스물여섯과 여자 하나"도 기억난다. 특히 후자는 뭔가 좀 기묘한 내용이기 때문에 더욱 인상에 깊이 남았는데, 필리아 홀츠만의 전기에 따르면 고리키가 젊은 시절 어느 빵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삼았다고 한다.


이 단편에서는 빵공장의 허름한 지하 작업장에서 싸구려 과자를 만드는 남자 스물여섯 명이 등장한다. 다른 노동자들의 외면과 경멸 속에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은 까닭에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가득한 그들이었지만, 매일 한 번씩 그곳에 찾아와 창문 너머로 스스럼없이 말을 걸며 과자를 하나씩 얻어 먹는 발랄한 재봉사 아가씨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었다.


급기야 남자들은 그녀에게 단순한 연모를 넘어서 우상 숭배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그녀에게 따끈한 크렌젤리를 대접하는 것을 의무처럼 여겼고, 우리에게는 [그 과자가] 우상에게 바치는 매일매일의 제물과도 같은 어떤 것이 되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거의 거룩한 의식처럼 되었고, 날이 갈수록 우리를 그녀에게 더욱더 밀착되게 했다."(134쪽) 


그런데 다른 작업장에 새로 온 제빵사가 '어떤 여자든 금방 유혹할 수 있다'고 자랑하자, 불쾌해진 지하 작업장의 남자들은 '우리 아가씨는 못 건드릴 걸'하고 장담하고, 급기야 바람둥이가 시한 내에 그녀를 유혹할 수 있을지를 놓고 내기한다. 불안과 초조 속에 기다리던 스물여섯 명은 자기네 우상이 바람둥이와 밀회하고 걸어나오는 광경에 그만 눈이 뒤집힌다.


분노한 남자들은 지하 작업장에서 뛰쳐나와 아가씨를 에워싸고 그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쌍욕을 퍼붓는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아무 말 못하던 그녀였지만, 남자 중 하나가 손을 뻗자 격분해서 뿌리치며 '더럽고 천한 것들'이라고 불쾌와 경멸을 드러낸다. 아가씨의 당당한 태도에 남자들은 비로소 자기 신세를 자각한 듯 쓸쓸히 지하 작업장으로 돌아가게 된다.


우상에 대한 환멸과 현타를 소재로 한 문학 작품 중에서도 상당히 씁쓸한 편인데, 어찌 보면 지난번 카리나 연애 논란 당시 팬들의 반응도 이 스물여섯 명의 남자와 유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사생활의 영역에 속하는 일인데도 팬들은 분노하며 사과를 요구했고, 결국 당사자가 결별과 사과까지 내놓고 나서야 성난 팬심이 잠잠해졌다니 말이다.


연예인의 사생활에 팬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야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지만, 지금은 인터넷을 통한 쌍방 소통이 원활한 까닭인지 그 파급력도 훨씬 커진 듯하다. 일각에서는 라이브라는 명목으로 사생활을 일부 공개함으로써 마치 유사 연애의 느낌을 강조하는 행태가 문제라고도 지적하니, 그 모두의 배후에는 결국 상업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해도 무관하겠다.


지난번 김호중 음주 운전 논란에서도 연예인의 위법 행위조차 두둔하는 비뚤어진 팬심을 향한 비판이 많았는데, 카리나 연애 논란은 바로 그런 무조건적 애정이 여차 하면 무차별적 분노로 변모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는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나귀님 입장에선 영화 <그녀>에서처럼 일대다 소통이 일대일 소통으로 오인되는 것이야말로 아이러니해 보이지만.


하지만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연예인의 경력도 영원히 계속되지는 못하니, 언젠가는 인기도 시들고 관심도 사라지게 마련이다. 한때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보이그룹 멤버도 지금은 처량한 노총각 신세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던데, 한번은 그 어머니가 '예전에 집 앞에서 기다리던 그 많은 아가씨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느냐'며 한탄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한때 '우리 오빠'의 연애와 결혼은 절대 안 된다고 우기던 팬들도 지금쯤은 대부분 가정을 꾸렸을 법하니, 이쯤 되면 시누이의 입장에서 제발 누구라도 '우리 오빠' 좀 데려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태세가 역전되지 않았을까. 물론 팬들이 호시탐탐 지켜보는 중에도 혼전 임신 '사고'로 은퇴하는 아이돌도 줄곧 있었으니, 결국 할 사람은 알아서 하는 모양이지만.


인생 전체를 살펴보면 연애나 결혼이나 출산 같은 단계도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인데, 연예인의 경우에는 이를 애써 은폐해야 한다니 이상하다. 조용필의 첫 결혼이 비밀리에 거행되어 뒤늦게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던 일을 기억하는 나귀님으로서는, 지금처럼 남녀관계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진 세상에도 연예인만큼은 예외로 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아이돌의 경우에는 열성 팬들의 행태가 문자 그대로의 '우상' 숭배를 조장하는 듯하니, 급기야 김호중 사건에서처럼 팬심이 '신앙'의 단계로 고양되기까지 하는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최근 깨닫게 된 정의에 따르면 '팬'은 사실상 '신자'나 다름없어야 한다니까, 그런 맥락에서 나귀님 같은 사람은 평생 그 누구의 팬도 될 수 없다고 봐야 될 듯하다.


그러다 보니 여기서 말하는 우상은 그리스 신화의 여러 신들처럼 쾌활한 존재라기보다는 오히려 네팔의 쿠마리처럼 음울한 존재가 아닐까 하는 의심도 없지 않다. 그 전통에서는 어린 소녀를 눈 셋 달린 여신의 현현으로 간주해 숭배하다가 월경이 시작되면 신성이 사라졌다며 내치는데, 문제의 소녀는 이후 불길하다 간주되어 모두에게 외면당하고 배척당하며 산다.


마치 쿠마리 전설을 각색한 만화 <3X3아이>처럼 지나치게 잔인한 비유가 아닌가 싶지만, 아이돌 범람 시대에 7년 계약을 다 채우지 못하는 팀들이 즐비한 상황에서는 제법 의미심장해 보인다. 하긴 늙고 초라한 우상을 섬기는 신자는 없을 터이니, 어쩌면 '우상'이라는 이름 자체에서부터 젊음이 전제되어 있는 셈이고, 늙음이 시작되면서 퇴출되는 것은 아니려나.


아이돌에 열광하는 것이 젊은이들의 특징이자 어떤 면에서는 특권인 까닭도 그래서일지 모른다. 어차피 나이 들면 하고 싶어도 못하고, 누가 하라고 해도 못하게 마련이니까. 그 시기를 넘어서도 서로를 응원하고 격려하며 함께 늙어가는 보기 드문 연예인과 팬이라면, 이미 단순한 팬심을 넘어서서 진정한 우정을 나누는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해도 무방할 법하다. 


우상의 몰락은 씁쓸한 일이다. 물론 연예인 걱정이 제일 부질없다지만, 늙어서라도 활동하면 다행일 수 있다. 20세기에 활동한 아이돌 가운데 큰 사건사고 없이 연애나 육아 등으로 방송에서 사생활을 판매하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반면 폭력이나 음주운전이나 도박이나 마약 같은 범죄에 휘말린 경우는 물론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러니 고리키의 소설에서 우상처럼 숭배했던 여자에게 실망을 느끼고 커다란 분노를 표현했던, 하지만 상대방의 매몰찬 태도에 자신들은 그간 그녀의 안중에도 없었음을 뼈저리게 자각하고 쓸쓸하게 지하로 숨어들었던 스물여섯 명의 남자들처럼, 어쩌면 현재 아이돌 산업을 소비하는 팬들도 그런 실망과 환멸의 가능성을 줄곧 안고 살아가는 상황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군통령 카리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기라도 했지, 대통령 윤석열은 도대체 무엇을 주었기에 구속 영장 발부에 지지자들이 법원 난입까지 불사하며 난리를 치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카리나는 사과라도 했지만, 윤석열은 사과조차 하지 않고 버틸수록 팬심이 비등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이 시대의 진정한 아이돌은 카리나가 아니라 윤석열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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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슈클라의 책을 구입한 것은 문재인 정권 당시 이른바 조국 사태가 한창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법무부 장관 내정 직후 각종 의혹이 쏟아졌는데도, 과거의 자신만만하던 모습과는 달리 기자 회견이며 인사 청문회에서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변명으로만 일관하는 그의 위선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알라딘 중고샵에서 <일상의 악덕>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무려 잔혹성, 위선, 속물근성, 배신, 인간혐오처럼 사소하지만 짜증나는 문제에 대해서 논의한다기에 지금 상황에서 딱 읽기 좋은 내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책을 펼쳐보니 내 예상과는 영 다른 내용이어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슈클라는 일상의 악덕을 너무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이었다. 위선과 속물근성은 짜증을 불러 일으키게 마련이지만, 거기에만 집착하다 보면 인간혐오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 결과 푸틴이나 트럼프처럼 화끈하지만 실상은 잔혹한 인물이 선거로 집권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 수록된 첫 번째 논문 제목이기도 한 "잔혹성을 우선시하기"라는 원칙을 내세우는 것도 같은 맥락이며, 이것이야말로 "두려움을 토대로 삼는 자유주의"라는 또 다른 원칙과도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위선 같은 사소한 악덕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하다 보면, 자칫 잔혹성이란 큰 악덕을 과소평가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잔혹성을 우선시하기"는 몽테뉴의 원칙이기도 했다. 그가 프랑스 역사상 가장 살벌했던 시기 중 하나였던 종교 전쟁 당시에 살았음을 감안하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왔다갔다할 수 있는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이 잔인무도한 성격이기보다는 차라리 위선적이고 속물적인 성격에 그치기 바란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물론 위선과 속물근성이라고 해서 항상 받아들이기가 더 쉬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직접적이고 효과적으로 제재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더욱 분노와 환멸을 자아내는 것이 아닐까. 주디스 슈클라라고 해서 그런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자칫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격으로 상황이 번지는 것을 막으려는 것뿐이다.


처음 읽었을 때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힘들었는데, 이후 지금까지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니 슈클라의 주장이 지당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장 지난 한국 대선이며 최근 미국 대선을 보아도 현 정부와 여당의 무능과 위선과 변명에 질색한 유권자가 오히려 직설적 말투와 과감한 행동이 돋보이는 다른 후보를 선택했으니까.


문제는 그렇게 당선된 윤석열과 트럼프 같은 인물이 알고 보면 무지막지하게 잔혹한 성격이어서, 각자의 실책에 대해서 위선적인 변명조차 거부하고 도리어 무력 대응까지 불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두 대통령 모두 탄핵의 위기에 지지자를 부추겨 법원과 의회 같은 헌법기관을 공격하는 만행을 자행함으로써 입증한 상태다.


푸틴도 마찬가지인데, 옐친 정부에서 정보 기관 출신의 무명 관료였던 그가 갑작스레 대권을 잡게 된 것 역시 이전 정부의 무능과 부패와 위선과는 무관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후 여러 차례 과감한 조치로 화끈한 성격을 드러낸 것 역시 대중에게는 열광 요소였을지 몰라도, 결국 무모한 전쟁을 일으켜 전세계를 고통에 빠트렸다.


하지만 슈클라의 "잔혹성을 우선시하기" 원칙에는 뚜렷한 한계도 있으니, 누가 잔혹한지 아닌지를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을 선택한 유권자는 불과 수년 뒤에 비상 계엄이나 법원 습격이 벌어질 줄 미리 알았을까? 아마 그때 이재명을 선택한 사람조차도 이것까진 몰랐으리라.


거꾸로 지난 대선에서 잔혹하다는 인상을 준 인물은 윤석열이 아니라 오히려 이재명이었다. 그간 제기된 각종 의혹을 통해 위선을 넘어 잔혹성까지도 그 속성으로 간주되다 보니, 로봇 개를 밀쳐 넘어트리는 시연조차 부정적인 여론을 자아낼 정도로 나쁜 인상이 각인되어 결과적으로는 대선 패배라는 결과를 얻게 된 것이 아닐까.


지난 대선이 역대급 비호감 선거라는 평가를 얻은 것도 양대 후보 모두가 잔혹성, 위선, 속물근성, 배신 같은 일상의 악덕에 모조리 연루된 혼란스러운 상황 때문이었을 법하다. 그 결과만 놓고 보면 최우선적으로는 정권 심판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어찌 보면 그 시점까지 부정적인 면모가 비교적 덜 드러난 인물이 승리한 셈이다.


따라서 "잔혹성을 우선시하기" 원칙도 현실에서 깔끔히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겠다. 당장 조기 대선이 치러지면 거대 양당 모두 현재 상황에서는 강성 후보의 등판 가능성이 크니, 누구를 뽑더라도 잔혹성은 기본으로 깔고 가야 하는 부담이 있을 것처럼 보인다. 이쯤 되면 선거가 아니라 도박이라 해야 하지 않을지...




[*] <일상의 악덕>은 현재 절판인데, 비전공자 번역인 관계로 해설부터 핵심을 짚지 못하고 두루뭉실한 편이고 오역도 없지 않으니, 재판을 간행하기보다는 차라리 번역자를 교체해서 새로운 번역본이 나오는 편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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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일치로 <맹자>에 나오는 소/양 교체와 백성/사직/임금 관련 인용문을 연이어 접하고 나니, 그 책을 정말 오랜만에 다시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예전 명문당의 단권본 사서삼경에 수록된 번역으로 읽다 보니 문득 최근의 번역은 어떤가 궁금해서 검색한 결과, 마침 책세상 고전문고 가운데 하나인 <맹자>를 이미 갖고 있음을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번역자는 정치사상사 연구자라 하는데 (비록 일부 역주에서는 살짝 의문도 없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무난하고 자연스러운 문장을 구사하는 듯하다. 책세상 고전문고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역주와 해설 외에도 참고 자료를 여럿 추천해 두었다는 점인데, <맹자>에서는 이미 갖고 있는 김승혜의 <원시유교>와 소공권의 <중국정치사상사>를 언급한 점이 흥미로웠다.


소공권의 책을 보니 맹자와 순자를 한 장에 엮어서 설명했는데, 비록 맹자의 사상에 파격적으로 민주주의의 요소가 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현대의 민주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내용이므로 과대평가는 금물이며, 아울러 전국 시대 말기의 혼란한 정치 상황이라는 배경을 감안해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매우 지당한 주장을 내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유독 흥미로운 점은 역자 서문에서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최명이 공역자인 서원대 정치학과 전 교수 손문호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었다. 즉 본래 최 교수가 1부만 번역해서 간행했던 것을 손 교수의 협조로 2부까지 완역하게 되었는데, 출간 직전에 손 교수가 당시 몸담고 있던 서원대 재단 비리와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해직되었다는 이야기다.


최 교수는 개인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의연했던 손 교수의 모습에 감탄한 듯 "정의가 결국은 승리한다는 가르침이 바로 사상의 역사가 아닌가?"라고 반문하며, "손문호 교수의 조속한 복직을 바라면서"라고 역자 후기를 마무리한다. 그런데 내가 가진 책은 무려 사반세기 전인 1998년 초판이어서, 혹시 손 교수 관련 후일담이 있는지 궁금해서 인터넷을 검색했다.


서원대는 원래 청주사범대학이었던 학교가 1988년에 이름을 바꾸며 생겼는데, 이후 20년간 총장 8명이 모두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는 흑역사를 겪었다. 특히 1998년에 전직 이사장이 학교 재산을 횡령해서 국외 도피에까지 나섰던 사건이 절정이라 할 만했는데, 아마도 손 교수가 재단 비리와 싸우다가 해직되었다는 사건도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지금 와서 '서원대 + 손문호'로 검색해 보니 희한하게도 '전 총장'이라는 직함이 함께 나온다. 알고 보니 2003년에 서원대 재단이 바뀌면서 제9대 총장으로 취임한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48세의 젊은 총장의 등장 자체가 파격이어서 큰 기대를 모았다고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재단 영입의 일등공신이어서 선거 없이 지명된 것이 의아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후의 관련 기사를 보면 애초의 큰 기대는 금세 사라져 버리고 혼탁한 상황이 펼쳐진 듯하다. 2006년에 교수회에서 총장 사퇴 결의안이 통과되며 또 갈등이 시작되었고, 2007년에 서원대 역사상 최초로 총장 임기를 완주하고 평교수로 돌아갔지만, 2008년에는 이사장의 공금 횡령 혐의에 연루되어 검찰 조사를 받았고, 결국 2011년에 재차 파면되었다.


이후 소송을 제기한 모양이지만, 2012년에 파면 처분은 정당하다는 고등법원 판결이 나왔다는 기사를 마지막으로 관련 보도는 찾을 수 없었다. 이후 조선 시대 문인들의 서한을 엮은 편역서를 한 권 내놓은 모양인데, 거기 나온 저자 약력을 보니 고향 경주에 머무르면서 한문을 가르치고 집필 작업을 한다는 등 교직과는 거리를 둔 채로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구체적인 맥락이며 사정까지는 모르는 상태이지만, 여러 언론 기사를 통해 드러난 바를 가지고 판단하자면, 한때나마 사학 비리에 맞서 싸우던 사람이 훗날 또 다른 사학 비리에 관여해서 체면이 실추된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심지어 첫 번째 해직에 대해 항변하는 동료 학자의 말이 고전 명저의 역자 서문에까지 박제된 상황이니 더 민망스럽지 않겠나.


소공권의 <중국정치사상사>는 그 분야의 명저답게 사반세기 뒤인 지금까지도 (무려 원래 정가의 2배 가격으로 가격이 인상되어) 여전히 간행 중인데, 과연 초판 역자 후기에서 최 교수가 손 교수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는지 궁금해진다. 물론 학교의 위상과는 상반되게 허술하기로 소문난 그 대학 출판부의 성격상 수정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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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개와 고양이 대학살에 대해 알아보려다 보니, 문득 <맹자>에서 양혜왕이 제물로 끌려가던 소를 딱하게 여겨 양으로 교체했다는 일화가 떠올랐다. 양쪽 모두 생명인데도 한쪽은 중히 여기고 한쪽은 경히 여긴 셈이니,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동물 애호가들의 기본 입장과도 유사하다.


물론 <맹자>의 문맥에서는 값비싼 소를 저렴한 양으로 교체한 것을 놓고 인색하다는 소문이 퍼져 왕이 당황했다고만 나오며, 맹자 역시 왕의 측은지심은 인정하면서도 그처럼 좋은 의도가 좋은 정치라는 형태로 국가와 백성 같은 더 넓은 대상에게까지 적용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질책한다.


그러다가 <풍도의 길>에서도 이탁오가 <맹자>에 나오는 "백성이 우선, 사직이 다음, 군주가 마지막"이라는 구절을 가져다가 풍도를 평가했다는 설명이 나오기에, 정말 오랜만에 <맹자>를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명문당 사서삼경 수록본으로 읽다가, 다시 책세상의 발췌본으로 읽었다.


앞에서 언급한 소와 양 일화의 주인공인 양혜왕과 맹자의 문답 내용에서는 전국 시대의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면 상당히 급진적인 민본주의가 나타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단적으로 맹자는 정치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며 시종일관 왕을 다그치고, 심지어 역성혁명까지 옹호하는 판이니까.


나중에 가서는 군주가 천명을 받들어 나타난다는 사고방식이 확립되었지만, 맹자도 종종 언급하는 요순과 하은주 3대의 역사만 <사기> "본기"에서 살펴보아도 군주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경우는 별로 없었고, 무도한 군주를 무력으로 쫓아내는 역성혁명이 오히려 기본값이라고 볼 만하다.


잘못된 정치로 백성의 지지를 잃어버린 군주는 이미 군주라고 할 수 없으니 쫓아내도 무방하다는 상당히 과격한 주장을 맹자가 또 다른 군주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내놓을 수 있었던 것 역시, 그 이전까지 역사적 선례로 미루어 쿠데타조차도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 정치사를 연구한 소공권의 설명에 따르면, 맹자가 이처럼 파격적인 발언을 연이어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전국 시대의 생활상이 이전보다 더 피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누가 되든 간에 하루빨리 다툼이 끝나고 안정이 오기를 바란 까닭에 군주 앞에서 왕도 실천을 촉구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맹자의 민본주의를 현대의 민주주의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소공권의 설명이지만, 그래도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에게서 오늘날의 정치 제도와 맥이 닿는 듯한 이야기를 찾아낸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었다. 게다가 최근의 정치 상황도 있고 하니 말이다.


물론 그토록 간절한 바람에도 맹자 역시 선배인 공자와 마찬가지로 등용되지는 못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후의 중국 역사도 비록 절대 군주가 통치하는 통일 국가가 생겨났다 사라지고, 역성혁명도 심심찮게 일어났지만 정작 두 사상가가 제시한 이상에는 한 번도 도달한 적이 없었으니.


그나저나 <맹자> 번역본에서 참고 자료로 추천한 소공권의 <중국정치사상사>를 오랜만에 다시 꺼내 뒤적이다 보니, 무려 1천 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이전에 구입하자마자 발견했던 의아한 대목이 하나 기억났다. 강유위의 <대동서>를 해설하던 중에 진지함이 지나쳐서 낭패를 본 경우였다.


강유위는 <대동서>에서 국가 간의 병탄과 전쟁은 끝이 없으리라 지적하면서 중국보다 큰 세계, 또 세계보다 큰 우주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지구 너머에도 국가가 있을 터이니, "화성과 인류의 지구가 전쟁한다면 피가 수천만 리에 흐를 것이고 수천만 명이 죽을지 모른다"(1123쪽)고 썼다.


그런데 소공권은 어째서인지 이 대목에 다음과 같은 각주를 덧붙였다. "그것은 오해가 분명하다. 서양인들은 화성을 MARS라고 이름한다. 그것은 또 로마인이 전신(戰神)을 칭한 것이었다. 강유위는 그로 말미암아 화성에서 국토를 둘러싼 전쟁이 일어난다고 오해한 것일까."(1123쪽, 주 53)


하지만 강유위는 국가 간의 알력이 보편적임을 강조하기 위해, 가상의 행성인 화성과 실제의 행성인 지구의 전쟁을 상상해서 예시한 것뿐이다. 굳이 우주까지 갈 것도 없이, 문학 작품에 나오는 가상의 나라든지, 아니면 아예 허구의 나라를 예로 들어도 무슨 뜻인지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소공권의 문제는 비유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진지한 반론을 제기했다는 점인데,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개그를 치자 다큐로 받은' 격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이런 오해의 흔적이 나중에도 수정되지 않고 원서에 남아 있다가 번역서로도 옮겨 왔으니 더욱 의아하다. 정말 아무도 몰랐던 걸까?


화성인이 나오는 소설로 가장 유명한 H. G. 웰스의 <우주전쟁>은 1898년에 간행되었고, 강유위의 <대동서>는 1901년에 완성되어 저자 사후 1935년에야 간행되었다고 하니, 어쩌면 당대에 큰 인기를 끌었던 웰스의 소설을 강유위가 생전에 직간접적으로 접해 보았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다.


물론 웰스 이전에도 천체 관측에서 비롯된 억측과 과장을 통해 화성인의 존재가 일반 대중의 뇌리에 통념으로 자리잡은 19세기의 유산일 수도 있고 말이다. 분명한 점은 소공권이 학자로서는 엄밀했을지 몰라도 상상력이 부족했다는 것이니, 새삼스레 사상가와 학자의 차이를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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