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랑 판 <천일야화> 3권을 보니 "칼레단의자식들의섬의 왕자 카마르알자만과 중국 공주 바두르의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이미 오래 전에 아동용 각색으로 처음 읽고서 그 줄거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뒤늦게 성인용(?)으로 다시 읽으니 복잡한 후일담이 덧붙어 있기에 살짝 놀랐다.


제목에서 말하는 섬나라 왕자와 중국 공주는 각각 '여혐'과 '남혐' 성향이어서 부왕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 결혼을 거부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정령들의 장난으로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헤어진 뒤에는 서로에 대한 그리움으로 상사병이 나서 그만 생사를 오락가락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즉 왕자와 공주를 각각 보고 온 정령 둘이 우연히 만나 '내가 본 사람이 더 아름답다!' 자랑하며 피차 외모 품평인지, 이상형 월드컵인지를 벌이다가, 급기야 '그러면 둘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자!'면서 천리만리 떨어진 곳에 사는 두 사람을 잠든 채로 데려다가 함께 눕혀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의견이 막상막하라서 승부가 나지 않자, 처음에는 공주를 재우고 왕자를 깨우며, 곧이어 왕자를 재우고 공주를 깨우는 방식으로 각자의 반응을 평가해서 승부를 겨룬다.(참고로 공주가 더 안달하는 바람에 왕자가 이겼다!). 다음날 아침, 왕자와 공주는 각자의 침대에서 눈을 뜬다.


하룻밤 사이에 서로의 얼굴만 보고 반했지만 이름조차 모른 채 헤어진 왕자와 공주는 '어젯밤 그 사람'을 간절히 찾다가 절망해 상사병으로 드러눕게 되고, 이에 공주의 젖남매인 청년(유모의 아들)이 사연을 듣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수소문한 끝에 결국 왕자를 찾아내 두 사람을 결혼시킨다. 


하지만 이렇게 순순히 행복하게 끝나면 <천일야화>가 아니지! 부왕 몰래 공주의 나라로 간 왕자는 결혼식을 마치고 함께 본국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공주의 물건을 찾으려다 그만 길을 잃고 낙오되고, 혼자 남은 공주는 남장을 했다가 인근 국가의 공주와 억지로 결혼(!)하게 된다!


여하간 또다시 이런저런 복잡다단한 부수 줄거리가 이어지다 우여곡절 끝에 왕자는 공주와 재회하고, 그 사이에 공주와 결혼(?)한 상태인 또 다른 공주도 아내로 맞아들여서 세 사람이 오래오래 행복했다는 것으로 마무리되는가 싶다가... 마지막에 가서 정말 의외의 막장스러운 후일담이 등장한다.


왕자와 결혼한 두 공주, 즉 두 왕비는 같은 날 같은 시에 아들을 하나씩 낳았는데, 세월이 흐르며 각자 상대방의 아들을 연모하게 된다. 하지만 올바른 품성을 지닌 청년들이 구애를 거절하자, 왕비들이 부왕에게 모함하여 아들들을 죽이게 한다.(요셉과 히폴리토스와 투 마더스의 대환장 조합).


이복형제는 다행히 목숨을 건져 이웃 나라로 도망치지만, 한 명은 그곳에서 무슬림 동포를 만나 부와 명예를 얻은 반면, 다른 한 명은 배화교 악당을 만나 매일같이 고문당하며 장차 인신공양의 제물이 될 처지에 놓인다.(우여곡절 끝에 겨우 탈출했다가 또다시 붙잡히는 고구마 전개도 덤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천일야화>답게 두 청년은 누명을 벗고 위기를 벗어나 재회하고, 결말에 가서는 이들의 부왕뿐만 아니라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그리고 중간에 왕자 가운데 한 명과 눈이 맞은 타국 여왕까지 각자 대군을 거느리고 달려와서 얼떨결에 일가 전체의 상견례가 이루어진다.


이 편에서는 <천일야화>의 다른 이야기에 나온 소재들이 재활용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여혐' 왕자가 본국 귀환 중에 낙오되었다가 일확천금하자, 전 재산인 금덩어리를 항아리에 넣고 맨 위에 올리브 열매를 깔아서 위장하는 대목은 "바그다드 상인 알리 코지아 이야기"와 똑같다.


아울러 도입부에서 정령들이 '내가 본 인간이 더 예뻐'로 입씨름을 벌이다가 서로 멀리 떨어져 살아가는 남녀를 하룻밤 인연으로 엮어준다는 (아울러 두 사람이 천신만고를 겪고 난 후에야 재회한다는) 내용은 <천일야화> 제2권에 나온 "누레딘 알리와 베드레딘 하산 이야기"에서도 나왔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도입부에서 왕자와 공주가 저마다의 이유를 조목조목 들어가며 이성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지만, 막상 자기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을 만나게 되자마자 '내가 언제 그랬느냐'고 생까며 좋아서 죽더라는 것이다. 결국 모든 사랑은 '제 눈에 안경'이기 때문은 아닐까.


'여혐'이니 '남혐'이니 기타 이성을 폄하하는 용어는 언제부턴가 상당히 일반화되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 부분 과장되고 언론에 의해 부풀려진 감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남녀의 화학 반응은 본능일지니, 이걸 거부하는 '찐' 혐오자가 있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도태되어 없어지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세계 3대 거짓말 중에 '처녀가 시집가기 싫다는 말'이 들어 있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물론 최근의 외식 물가 상승이며 노인 간병 문제 등을 보자면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말'이나 '노인이 얼른 죽고 싶다는 말' 역시 그에 못지않은 거짓말이 분명해 보이기는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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