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요즘에는 뭘 잘못 누르기만 하면 북펀드 광고로 이어져서 짜증짜증 하던 참이었는데, 이번에는 예전에 나왔던 웅진출판의 "20세기 일문학의 발견" 시리즈가 박스세트로 재간행된다기에 호기심이 일었다. 원래 열두 권짜리였다가 여섯 권으로 분량도 절반쯤 줄어들었는데 "중고거래가 10배!"니, "문학 수집가들이 찾던 전설"이니, "유명 희귀본 수집가들이 헌책방을 순례하고 발품을 팔아가며 구했던 그 시리즈"니 하는 어마어마한 광고 문구를 보니, 문득 "정말 그랬던가?"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내 기억으로는 웅진이 한동안 서점용 단행본보다는 방문판매용 전집류에 전력투구하다가 (원래 뿌리깊은나무/헤임인터내셔널에서 출발한 회사이니 사실 방문판매 쪽이 기본인 출판사이긴 하다) 간만에 분위기를 쇄신하여 내놓은 단행본 시리즈가 "포스트모더니즘 걸작선" 전5권과 "20세기 일문학의 발견" 전12권이었는데, 사실 그 당시에만 해도 반향이 아주 크지는 않았다고 기억한다. 절판본이 절판본인 까닭은 쉽게 말해서 안 팔렸기 때문이어서, 나중에는 이 책들도 반값 매대에 자주 나왔었다.


나귀님도 "일문학의 발견" 완질을 갖고 있지만 딱히 급하게 산 것은 없었고, 헌책방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한두 권씩 골라 잡다 보니 얼떨결에 짝을 맞추게 되었을 뿐이다. 맨 먼저 산 것은 아쿠다가와 단편집 같고, 맨 나중에 산 것은 의외로 보기 힘들었던 야마다 에이미 책이었는데, 이건 어째서인지 하드커버이다. 그런데 애초에 전12권 하드커버가 나왔다가 소프트커버로 갈아입은 건지, 아니면 1차분 몇 권만 하드커버였다가 2차분부터는 스포트커버로 갈아입은 건지는 알 수 없다.


이왕 다시 내려면 전12권을 고스란히 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세트에서 빠진 여섯 권은 각자 다른 출판사에서 재간행된 모양이니, 원래의 모습은 아래에 나귀님이 올린 사진처럼 구판을 통해서나 짐작할 수 있을 법하다. 사카구치 안고의 책도 있기는 한데, 오래 전에 빼서 딴데 꽂아 놓다 보니 사진에는 담기지 않았다. 굳이 꺼내서 다시 올려놓을 수도 있기는 한데 귀찮아서... (그나저나 다시 확인해 보니 전6권 재간행본은 2017년에 이미 나온 거던데 왜 지금 갑자기 박스세트인가 궁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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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뭘 또 하나 잘못 눌렀더니만 <루소의 식물학 강의> 북펀드 광고로 연결된다. 내용 설명을 보니 "루소가 1771년 8월 22일부터 1773년 4월 11일 사이에 당시 가깝게 지내던 들레세르 부인에게 보낸 여덟 통의 편지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거, 예전에 한 번 나왔던 책이 아닌가 싶어서 검색해 보니, 아닌 게 아니라 15년 전쯤에 <루소의 식물 사랑>이라는 비스무리한 제목의 책이 하나 나왔었다. 결국 같은 책을 재간행한 것인가 하고 번역자를 살펴보았더니 다른 사람이다. 


알라딘에서 목차를 비교해 보니 <식물 사랑>은 일곱 챕터인데, <식물학 강의>는 여덟 챕터였다. 그렇다면 <식물 사랑>에서는 편지 여덟 통 가운데 하나를 빼버리기라도 했던 건가? 정확히 알아보기 위해 결국 책더미를 뒤져서 <식물 사랑>을 꺼냈다.


그런데 자세히 따져 보니, 실제 내용은 <식물 사랑>이 <식물학 강의>의 2배 이상에 달했다. 왜냐하면 <식물학 강의>는 <식물 사랑>의 여덟 챕터 가운데 첫 번째(제1부)인 "들르세르 부인에게 보낸 편지들"에다가 삽화를 넣어 만든 책이라기 때문이다.


애초에 편역서인 <식물 사랑>에는 저자 사후 단행본으로도 나왔던 <식물학 강의> 외에도 루소의 편지 가운데 식물학 관련 내용이며 단상이 추가되어 있으므로, <식물학 강의>를 보고 나면 절판본인 <식물 사랑>을 찾아 나서는 사람도 적지 않을 법하다.


그나저나 요즘에는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동네 공원에 가서 초록초록한 풀과 나무를 보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많아진다. 도시의 주택가인 이 동네에도 예전에는 집집마다 마당에 과실수나 꽃나무를 길렀는데 재건축을 거치며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


며칠 전에는 유튜브에서 다니구치 지로의 <산책>에 나온 것처럼 도쿄 교외의 골목 풍경을 찍은 동영상을 발견해서 넋을 놓고 바라보았는데, 사람 하나 간신히 지나갈 만한 통로 양옆으로도 나무며 풀이 다채롭게 자라나는 모습이 신기하고 반가웠다.


이럴 때마다 문득 예전에 딱 한 번 지나갔던 몇몇 길에서 결국 들어가 보지 않았던 골목 몇 군데가 생각난다. 단조로운 건물들 사이로 골목 저편에 나무인지 풀숲인지 뭔가 초록초록한 것이 있었는데, 뭔가 궁금해 하면서도 결국 들어가 보진 않았다.


마치 웰스의 "초록색 문"의 주인공처럼 매번 어떤 업무, 약속, 목적지가 있어서 걸음을 재촉하는 도중에 우연히 마주치고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결국 외면한 것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때 그곳에 무엇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 남은 것이다.


어쩌면 옛 동네의 상징인 커다란 나무일 수도 있고, 작은 공원이나 놀이터일 수도 있고, 아니면 어떤 능력자가 담장 밑에 줄줄이 내놓아 기르는 싱싱한 화초가 가득한 화분일 수도 있다. 뜻밖의 발견이라 놀랐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물론 그 한 차례 일탈로 큰 변화가 생기진 않았겠지만 (십중팔구 '아, 이거였군' 하고 그냥 돌아서서 아까 가던 길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최근에는 과거에 내가 가지 않았던 인생의 여러 갈림길을 떠올리다 보니 그 골목들도 새삼 생각난 듯하다.


물론 옥상 텃밭이나 잘 가꾸어서 이것 저것 심어 보라는 엄마 말 따위는 귓등으로 들으면서 애먼 나무와 풀숲을 찾아다니는 모순투성이 나귀님이지만, 어쩌면 그런 이유조차도 <식물 사랑>의 마무리에 해당하는 루소의 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자연은 감추어져 있는 것이건, 보이는 것이건, 식물의 외양을 아름답게 하고 다양하게 만들기 위해 공연히 수고를 한 것이 아니다. 지구의 얼굴을 덮고 있는 이 뛰어난 양탄자가 어떤 실들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 가져볼 만한 가치가 있는 호기심이다."(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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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뉴스에서 쿠사마 야요이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기에 무슨 영문인가 했더니, 그의 대표작을 가지고 만든 미술품 조각 투자 상품이 나와서 화제인 모양이다. 얼마 전부터 음악 저작권이니 뭐니 해서 조각 투자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리다가 한동안 잠잠한 것 같더니, 이번에는 금융 당국에서도 인가하고 안전성도 보장되었다는 둥 벌써부터 여기저기 나팔을 불어 대는 것으로 미루어 제법 판을 크게 키우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미술품이나 골동품 같은 희귀한 상품에 대한 조각 투자는 다단계(폰지) 사기에 불과하다는 판결이 이미 한 번 이상 나왔음을 고려해 보면, 이런 투자 뉴스/권고에 대해서도 충분히 의심해 볼 만하다. 수년 전에 프랑스에서도 무려 사드의 <소돔 120일> 육필본 원고를 비롯한 여러 골동품에 대한 조각 투자 상품이 나와서 인기를 끌었지만, 결국 불법이란 판결이 나오며 회사는 망하고 육필본도 국가에 몰수당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미술품이나 골동품은 공급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음악 저작권만큼도 거래가 활발하지 않을 것 같으니, 나귀님 같은 무식쟁이로선 과연 그 수익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선뜻 이해할 수가 없다. 음악 저작권이니 NFT(대체불가능토큰)이니 하는 것들도 한때는 언론에서 잔뜩 떠들었지만, 실제로는 생각만큼 거래가 활발하지 않아서 "들어올 때에는 맘대로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격으로 투자자도 난처한 상황이라 알고 있다.


그나저나 나귀님이 쿠사마 야요이라는 화가를 알게 된 계기는 미술품이나 전시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역시나 단행본을 통해서였다. 2015년에 이 화가가 삽화를 담당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간행되었기 때문인데 (지금은 절판이다!) 특유의 땡땡이 무늬가 한가득이라 살짝 정신이 혼미해지기까지 하는 작품이다. 대표작이라는 호박 그림도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혹시 순수 창작이 아니라 기존 작품의 재구성인가 싶기도 하다.


사실은 평소에 <앨리스>를 좋아해서 여러 판본을 모으는 나귀님이 쿠사마 야요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새로운 앨리스가 나왔다기에 긍금해서 구입했던 책인데, 막상 확인해 보니 기대만큼 대단한 것은 아닌 듯해서 책더미 사이에 방치하던 참이었다. 지금 다시 꺼내 보니 역시나 별로다! 쿠사마 야요이는 "나는 현대를 살아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다"라고 발언했다고도 나오던데, 적어도 내가 아는 "앨리스"까지는 아닌 듯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자꾸 머리에 떠오르는 <앨리스>는 루이스 캐롤의 원작이 아니라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그 분야라면 역시나 디즈니 버전이 가장 유명하겠지만,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방영했던 일본 애니메이션은 그 주제가가 워낙 인상적이다 보니 가끔 생각나서 흥얼거리게 된다. 몇 년 전에 동네 공원을 지나다 보니 어린이 행사에서 그 주제가와 <오즈의 마법사> 주제가가 나오기에, 새삼 시대를 초월한 명곡의 위엄을 실감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앨리스>에서 주제가만큼 각별히 기억에 남았던 삽입곡은 "도마뱀"이다. 원작에서도 굴뚝으로 들어갔다가 앨리스에게 걷어차이는 등 갖은 고생을 하던 도마뱀 빌은 애니메이션에서도 호구로 등장해서 뭔가 어렵고 난처한 일이 있을 때마다 등 떠밀려 앞장서게 된다. 즉 이상한 나라 주민들이 "어떻게 하지?" "도마뱀 빌을 부르자!" "그게 좋겠어!" 하며 지들끼리 떠들고 나면, 도마뱀 노래를 부르며 찾아 나서는 거다.


"도마뱀, 도마뱀,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낸다. 도마뱀, 도마뱀, 무슨 일이든 잘 해내지." 지금도 가사와 곡조를 기억할 정도로 상당히 인상적이었는데, 최근 다시 구글링해 보니 엉뚱하게도 고현정이 어느 영화에서 이 노래를 혼자 흥얼거렸다는 증언이 여럿 나와서 깜짝 놀랐다. 확인해 보니 홍상수의 <해변의 여인>이라는 영화인데, 심지어 도마뱀 노래 자체도 일본의 유명한 가요에서 곡조를 따온 것이라는 증언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인터넷 세상은 시장통 같아서 뭔가가 화제가 되면 여러 사람이 지나가며 한 마디씩 거들면서 점차 선명한 그림이 만들어지기도 하니 참으로 신기하다. 그런데 인터넷도 2000년 이전의 자료에 대해서는 공백이 수두룩하고, 가끔은 뭔가 궁금해서 검색해 보아도 관련 자료나 증언을 전혀 확보하지 못하게 마련이라는 한계가 없지 않다. 최근에는 "내가 좋아하는 화가"라는 컨츄리꼬꼬의 노래의 유래를 살피면서 그런 사실을 절감했다.


이건 예전에 탁재훈이 <아는 형님>에 나와서 "내가 만든 노래"라고 자랑하며 불러서 알게 되었는데, 딱 듣자마자 의도적 표절 아니면 본의 아닌 착각에 불과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사가 "내가 좋아하는 화가는... 없다" 뿐이라 시작과 동시에 끝날 만큼 짧은 것이 특색이며, 어찌 보면 허무 개그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건 원래 1985년 제9회 대학가요제 금상 수상곡인 정희정의 "내가 좋아하는 화가"를 토대로 나온 농담이었다.


참고로 제9회 대학가요제의 대상은 (노래 자체로도 유명하지만 훗날의 스캔들로 더 유명해진) 높은음자리의 "바다에 누워"였고, 입상작 중에서도 (두 곡 모두 당시 학생들의 천태만상을 그린 에세이로 인기를 끈 국어교사 이은집이 작사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던) "신입생"과 "풍년굿" 등이 제법 인기를 끌었다. 이처럼 유명한 곡들과 함께 나온 까닭인지 비록 인기 면에서는 살짝 밀렸지만, 정희정도 한동안은 방송에 직접 나왔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MBC FM의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주말 공개 방송에 정희정이 출연해서 그 노래를 불렀다. "내가 좋아하는 화가는 / 술을 무척이나 좋아하며 / 마냥 담배만 피워물고 / 슬픈 그림만 그리네." 그러자 함께 나온 코미디언 고영수가 자기도 한 곡 뽑겠다며 "내가 좋아하는 화가는 / 없다"라고 패러디를 해서 웃음을 자아내었던 것이다. 워낙 재치 있는 가사/개그였기 때문에 나도 지금까지 똑똑히 기억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고영수가 만든 것과 대동소이해 보이는 노래가 탁재훈 작사/작곡으로 2002년에 컨츄리꼬꼬 앨범에 수록/발매되었다고 하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워낙 길이가 짧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화가"에 대한 표절 시비 요건까지는 충족되지 않아서 굳이 정희정(또는 작사/작곡가)을 언급할 필요까지는 없다 치더라도, 최소한 그 개그/패러디를 처음 만든 고영수에 대해서만큼은 언급하는 것이 예의일 것 같은데 말이다. 


어쩌면 탁재훈으로서는 이 노래가 저작권 없는 구전 가요의 일종이라고 착각해서 무단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일찍이 DJ DOC가 "허리케인 박"을 리메이크하면서 마찬가지로 했듯이 말이다. 하지만 "허리케인 박"은 코미디언 장두석이 음악 꽁트를 하면서 직접 부른 창작곡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뒤늦게 DJ DOC가 사과하고 배상하는 등의 해프닝이 있었다.(꽁트에서는 이봉원이 떡볶이집 DJ "허리케인 박"으로 나왔다고 기억한다).


유튜브에서 탁재훈 버전의 댓글을 살펴보니, 정희정의 곡을 망쳐놓았다는 질책도 하나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전후 사정을 모르는 듯하다. 당사자인 정희정이나 고영수가 가만 있는 상황에서 나귀님이 나서서 떠드는 것도 우습기는 하지만, 외관상 전지전능한 인터넷 역시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이며 증언에 의존하므로 한계가 있고, 그걸 응용한 AI 역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어 한 마디 남겨본다.


여하간... 쿠사마 야요이는 나귀님이 좋아하는 화가가 아니었던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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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개맡에 쌓아 놓고 차일피일 먼지만 쌓여 가던 책더미에서 몇 개라도 읽고 치우자 싶어서, 사토 사토루의 코로보쿠루 시리즈 가운데 1권 <아무도 모르는 작은 나라>와 2권 <콩알만한 작은 개>를 오랜만에 다시 꺼내서 완독했다. 지난번에 사무라 히로아키의 단편집에서 (물론 특유의 황당한 각색을 거치기는 했지만) 이 소인 전설을 접하고 새삼 흥미를 느껴 구입한 책들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코다마 유키의 만화에도 비슷한 소인이 나온 단편이 있었고, <허니와 클로버>에서도 키가 작고 나이 어린 여주인공을 본 누군가가 "코로보쿠루다!" 하고 소리친 장면이 있었다. 토토로가 우산 대용으로 머리에 얹은 풀잎도 사실은 코로보쿠루의 상징인 "머위 잎"이 아닐까 싶은데, 그렇다 치면 숲의 수호신이라는 작품 속 설정과도 일맥상통해 보인다.


위에 언급한 여러 작품에서도 코로보쿠루는 머위를 배경 삼아 나타난다고 묘사되는데, 홋카이도의 아이누족 언어로 그 이름 자체가 "머위 아래 사람"이란 뜻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 지역의 머위가 사람 키보다 더 크기 때문에, 코로보쿠루도 반드시 소인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일각에서는 그 지역 원주민에 대한 기억이 설화로 변했다고 보는 모양이다.


사토 사토루의 소설은 1959년부터 1983년까지 총5권으로 마무리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전에 정신세계사에서 1-3권이 나오고, 나중에 논장에서 전권이 다시 나왔는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모두 절판이다. 소인을 다룬 작품이라면 맨 먼저 생각나는 것이 <마루 밑 바로우어즈>이지만, 코로보쿠루 시리즈도 일본 문화의 독특한 설정을 여럿 가미하여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1권인 <아무도 모르는 작은 나라>의 내용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현대로 접어들며 코로보쿠루도 점차 살 곳이 줄어들어 인적이 드문 작은 산을 중심으로 머물게 된다. 마침 도로 건설 계획이 추진되어 그 작은 터전마저 잃을 위기에서, 우연히 이들의 존재를 알게 된 주인공이 공동의 노력 끝에 도로 건설을 저지하고 작은 산을 매입해서 생존을 보장해 준다.


유사한 내용을 다룬 애니메이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서는 결국 터전 지키기에 실패한 너구리떼가 인간으로 변신해 현대 사회에 적응해 살아가기로 결정하며 한 발 뒤로 물러나 버린다. <아무도 모르는 작은 나라>보다 한 세대 뒤에 나온 작품이니, 대기업의 개발 횡포 앞에서 개인의 환경 보호 노력도 더 이상은 통하지 않는 새로운 현실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겠다.


<콩알만한 작은 개>에서는 일본 민담의 또 다른 소재인 "대롱여우"가 "콩알개"로 재해석되어 나오는데 (이 요괴는 <음양사>나 "시오리와 시미코" 시리즈에서도 만난 적이 있었다), 이 작은 동물은 심지어 코로보쿠루 사이에서도 한때나마 "멸종" 되었다고 간주된다. 이쯤 되면 코로보쿠루나 콩알개 모두 존폐 위기에 처한 연약한 자연의 형상화라 보아도 틀리지 않겠다.


사토 사토루의 소설은 현대 사회에서 환상과 현실이 공존할 수 있는 일종의 대안을 일찌감치 제안했다는 점에서 특히 흥미롭다. 인간과 이생명체의 공존과 갈등이라는 소재는 일본 만화에서 종종 접했는데,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코다마 유키의 인어 연작 단편인 <빛의 바다>이고, 최근에 본 작품으로는 <던전밥> 애니 때문에 다시 꺼내 본 쿠이 료코의 단편들이 있다.


<던전밥>도 마물에 대한 편견은 물론이고 인간, 엘프, 수인 등 여러 종족 간의 차별과 반목에 대해서도 종종 일침을 놓는 작품인데, <용의 귀여운 일곱 아이>와 <용의 학교는 산 위에>라는 단편집은 용, 켄타우로스, 늑대인간, 인어 등을 소재로 삼아 그 주제를 좀 더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공존의 방법을 묻는다는 점에서 사토 사토루와 유사한 주제 의식을 지니는 듯하다.


전설 속의 용이 실존하는 현대 일본을 소재로 한 연작 단편을 보면, 용을 직접 기르면서 생태를 연구하는 전공이 개설된 대학도 있지만, 막상 용 자체는 막대한 유지비에 비해 경제성이 없어 관련 산업도 전무하고 미래도 불투명하다. 반대로 켄타우로스는 탁월한 체력 때문에 유능한 자원이지만, 역량 면에서 자연히 뒤떨어지는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영 껄끄러운 대상이다.


이쯤 되면 쿠이 료코의 단편들은 현대 사회에서 장애인을 비롯한 각종 소수자가 처하는 상황에 대한 우의화가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아가 같은 맥락에서 사토 사토루의 코로보쿠루 이야기에 대해서도 비슷한 해석이 가능할 수 있겠다. 그 소인 전설의 유래인 아이누족이야말로 일본 역사 내내 차별과 탄압을 받은 소수 집단이었으니까.


아이러니한 점은 코로보쿠루의 입장에서야 아이누족이나 일본인이나 외부인이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토 사토루의 소설에서 주인공이 "작은 도사들"로 자처하던 소인족을 만나자마자 문헌 근거까지 들먹이며 '너희는 코로보쿠루다'라고 굳이 납득시킨 것도 뭔가 의미심장해 보인다. 그것이야말로 "샤모"(본토인) 특유의 저 유서 깊은 강압의 연장일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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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양반이 넷플릭스를 들여다볼 때마다 쓸데없는 드라마 따위 볼 시간에 책이나 보라고 핀잔을 주곤 했는데, 이번에 <던전밥> 애니메이션이 방영된다기에 '그건 또 못 참지' 싶어서 바깥양반 태블릿을 빌려서 1회 시청하고, 일주일 기다렸다가 2회까지 시청했다.


만화 원작 애니메이션이라면 그림이 달라지거나 각색이 과도해져서 혹평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을 것 같은데, 이번 작품은 두 가지 모두에서 원작을 최대한 존중하는 듯 보여서 마음에 들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면 일주일에 한 회씩 즐겁게 시청할 만해 보인다.


주인공 일행은 던전 공략 중에 동료 한 명이 용에게 잡아먹히는 희생을 당한 끝에 구사일생으로 지상에 돌아온다. 희생된 동료를 되살리러 다시 던전에 들어가지만, 빈털터리 신세라 식량 대용으로 각종 마물을 잡아먹으며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 줄거리다.


던전 공략이라는 게임/만화의 전형적인 소재에다가 요리라는 역시나 전형적인 소재를 접목시켜 의외의 장르를 창안했다며 격찬을 받은 작품인데, 또 한편으로는 인간과 마물 등 갖가지 생명체의 먹고 먹히는 행위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해 고찰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나아가 최종 흑막의 존재며 던전의 형성 과정을 통해서 생물체의 유한한 육신과 무한한 욕망의 불균형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고, 던전의 마물 형성과 관리를 통해서 생태 보호와 자급자족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어서 이래저래 의미심장한 만화라 하겠다.


이 작품에서 처음에만 해도 마물을 먹는다는 발상 자체를 혐오했던 엘프 마법사는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태도를 바꾸고, 급기야 삶과 죽음 모두를 긍정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어서, 애초의 목표였던 동료의 소생에 실패하더라도 실망하지 말자고 독려한다.


왜냐하면 일행이 동료를 살리려 각종 마물을 잡아먹으며 목숨을 부지했던 모든 행보야말로, 결국 생물의 기본 조건인 삶뿐만 아니라 죽음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태도를 위한 훈련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일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설정을 현실에 적용해 보면 살짝 "불편"해 할 사람도 있겠다. 예를 들어 한국의 어느 무인도에 들어간 모험가 일행이 식량 조달을 위해 사슴과 멧돼지는 물론이고 개와 고양이, 뱀과 쥐, 심지어 바퀴벌레와 빈대까지 잡아 먹어치운다는 내용이니 말이다.


얼핏 보면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법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괴식과 악식에 대한 기록은 적지 않다. 누군가는 부스럼 딱지처럼 혐오스러운 물질을 별미로 여겼다는 기록도 있고, 식품학자의 저서 <맛없어!>에도 이에 버금가는 각국의 실존 음식이 소개된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리메이크한 안데스 산맥 조난자들의 식인 행위처럼 생존을 위한 처절한 악식도 있고, 레이먼드 카버의 편집자 고든 리시가 꼭 남이 먹다 남은 음식을 가져다가 싹싹 긁어 먹었다는 증언처럼 편집자라는 직업의 본질을 반영한 듯한 괴식도 있다.


괴식과 악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 대목에서 최근 국회를 통과했다는 개고기 식용 금지법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논란이 되어 왔는데, 왜 갑자기 법안까지 통과되며 굳히기에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개 식용이 좋건 싫건 오래 묵은 우리 식문화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이제 와서 굳이 금지한다는 것 자체는 불필요한 과잉 입법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의 추세를 보면 사실 개고기 식용은 가만 내버려 두어도 어차피 사라질 식문화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빌 브라이슨의 지적처럼 과거에 사슴, 멧돼지, 꿩, 비둘기 같은 다양한 육류가 소비되었던 것은 지금처럼 육류 생산과 유통이 활발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즉 극상의 별미라서 먹은 것이 아니었기에, 지금처럼 고기가 흔한 세상에서는 자연스레 외면당하는 것이다.


개고기도 마찬가지여서 일반적으로 소비되는 소나 돼지나 닭에 비해서 딱히 큰 장점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기름이 적기 때문에 보신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장점일 수도 있지만, 냄새를 비롯한 조리 과정의 번거로움을 감안하면 아주 큰 장점까지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유독 개 식용을 겨냥한 반대에는 문화적인 편견의 기미도 없지 않다. 1970년대에 미국에서 베트남계 등 아시아계 이민자가 늘어나자, 새로 온 동양인이 애완견을 훔쳐가 잡아 먹었다는 유언비어가 돌았고, 급기야 개 식용 금지 입법 청원 운동까지 나왔었다.


하지만 입법 청원 운동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애초부터 유언비어에 불과한 주장을 가지고 법까지 만든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일이었을 뿐더러, 이런 선례를 만들 경우에는 자칫 다른 육류의 식용 금지 주장으로까지 번질 가능성까지 있다고 우려했던 까닭이었다.


최근에는 미국에서도 식품 관련법이 개정되며 개와 고양이 식용을 딱 꼬집어 금지하는 법률이 생긴 모양인데, 이것도 미국 내 소비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부 동물 보호 단체의 주도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국가의 개 식용 금지를 노린 포석이라 한다.


단적으로 자국의 소수 집단인 아메리카 인디언의 경우에는 개고기 식용도 고유 문화라며 법 적용의 예외로 두었으니 애초의 의도를 짐작할 만하다. 애초부터 외국 식문화에 대한 몰이해, 또는 차별적 의도가 있는 입법은 아니었는지 충분히 의심해 볼 여지가 있다.


한편으로는 이런 입법이야말로 애완 동물에 대한 과보호의 극단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른바 동물 애호가는 "애완"이라는 단어조차도 질색팔색하며 "반려"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사실은 그들의 이런 호들갑 자체가 "애완"의 본래 뜻이다.


"완물상지"란 사자성어가 있다. 직역하면 "물건을 좋아하다 보면 뜻을 잃는다"인데, 그 출전인 <서경>에서 말하는 "물건"은 주나라 무왕이 외국에서 선사받은 개 한 마리였다. 왕이 개를 너무 물고 빨고 하니까 신하가 주의하라는 뜻에서 군주에게 간언했던 것이다.


과거에는 골동품, 현재에는 명품 같은 희귀품이 대표적인 "완물"이다. 즉 "애완" 자체가 이처럼 주위에서 걱정스레 생각할 만큼 뭔가를 애지중지한다는 뜻인데, 지금에 와서는 한자에 무지한 세대가 "애완"이라는 단어를 단순히 희롱하는 뜻이라고 착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대신 "반려"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데, 이게 보통 "배우자"를 가리켰음을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다. 세상에 무슨 "반려"를 상대방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내 의지로만 곁에 둔단 말인가. 그것도 대개는 무려 "펫샵"에 가서 돈 몇 푼에 "구입"하는 주제에 말이다.[*]


아무리 호들갑을 떨어 봐야 동물은 동물이지 사람이 아니다. 동물의 감정이며 언어라는 것도 있기야 하겠지만 인간과의 소통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십중팔구는 인간의 감정 이입에서 비롯된 착시가 대부분이다. 동물과 인간의 구분이 흐려진 것이 문제의 근원이다.


물론 동물이라고 해서 잔혹하게 다룰 이유는 없으며, 오히려 그런 행동이야말로 흔히 말하는 사이코패스의 전조 증상이기 때문에 각별히 주목하고 단속해야 한다. 하지만 동물 보호 운동이며 단체의 경우에는 지나치게 편협한 태도를 보이는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지난번 살처분 폭로처럼 자기네도 대책 없으면서 유독 "귀여운 털복숭이 동물"에게만 관대한 동물 보호 단체의 행동을 보면, 마치 <맹자>에 나온 어느 왕이 제물로 끌려가는 소를 딱하게 여겨 양으로 바꾼 것처럼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위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일명 '법륜 스님 캣맘 참교육' 영상 내용처럼, 내가 좋아하는 뭔가에 남이 무관심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편협한 행동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남이 천벌 받기를 바라는 것이야말로 천벌 받아 마땅한 행동이다.


자연 보호에 누구보다 앞장서는 생물학자 제인 구달만 해도 '개는 똑똑하니 먹지 말아야 한다면, 돼지도 마찬가지니 먹지 말아야 한다. 개고기도 돼지고기처럼 식문화의 일종이니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고 유연한 태도를 보인 바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무슬림이나 쇠고기를 먹지 않는 힌두교도가 남들의 식문화를 문제 삼지는 않을 것이다. 거위 간 요리나 새끼 돼지 요리나 각종 고렙용 치즈나 기타 차마 입에 올리기도 싫은 나라마다의 고유한 괴식/악식에 대해서도 우리가 뭐라 하지 않듯이.


이 모든 식문화의 공통점은 바로 살기 위해 먹는다는 것이다. 생물은 살기 위해서 다른 뭔가를 소비한다. 인간의 경우에는 동물이건 식물이건 다른 뭔가를 죽여서 섭취할 수밖에 없다. 이는 자연의 법칙이고 본능이기 때문에 거부하려 해도 감히 거부할 수 없다.


박완서가 아들을 잃고서 '나도 따라 죽으련다' 하며 식음을 전폐하다가, 어느 날 수녀원 식당에서 풍겨오는 된장국 냄새를 맡고 식욕이 용솟음쳐 걸신들린 듯 비빔밥 한 공기를 싹 비웠다는 일화를 떠올려 보면, 식욕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강한 본능이 아닐까 싶다.


식욕 못지않게 강한 본능인 성욕만 놓고 보면, 한때 "변태"라 손가락질을 받았던 갖가지 행위도 오늘날에 와서는 "취향"이라 긍정되고 보호받는 판에, 유독 식욕에 대해서는 혐오니 환경이니 정말 갖가지 이유를 들어 규제를 하려 드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삶은 죽음의 지연이고, 죽음은 삶의 종국이며, 그 사이에 먹는 행위며 크고 작은 집단의 식문화가 있다. 그러니 "타인의 섹스를 비웃지 말라"는 어느 소설의 제목처럼, 타인의 "식사"에 대해서도 함부로 비웃지 말 일이다. 그 식사가 "마물"이건 "개"이건 간에...




[*] 오늘날 자칭 "반려" 동물보다 더한 진정한 "반려"이자 "애완"의 대상이 있다면 바로 스마트폰이 아닐까. 개나 고양이나 심지어 배우자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심지어 몸에 밀착한 상태로 보내고 있을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건 걸핏하면 갈아치우는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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