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뉴스에서 트럼프 정부 출범과 함께 정부효율부(DOGE) 장관에 임명된 일론 머스크가 국제개발처(USAID)를 공개 비판했다고 하더니만, 급기야 홈페이지 접속 중단, 사무실 폐쇄, 출근 금지가 이어지며 조만간 조직 자체가 폐지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모양이다.
국제개발처는 1961년에 케네디 대통령의 명령으로 설립된 미국의 정부 기관으로 이름 그대로 해외 여러 나라에 대한 원조 사업을 담당한다. 제3세계의 재난과 빈곤 구제를 중심으로 현재 100여개 이상의 국가를 지원 중이며, 직원이 1만 명에 연간 예산만 65조 원에 달한다.
물론 인도주의적인 외양과 달리 실제로는 해외에서 미국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선전 및 공작 기구라는 비판도 줄곧 있었다. 그렇다면 어쨌거나 미국의 이익을 도모하는 기관인데 트럼프와 머스크는 "범죄 조직"에 "과격 좌파"라며 축소를 추진한다니 의아한 일이다.
그간 USAID에서 팔레스타인 등을 지원했던 것이 표면상의 이유로 보이고, 트럼프가 추구하는 미국우선주의 정책에 따라서 불필요한 해외 지출을 줄인다는 맥락과도 일치하는 듯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미국의 영향력이 감소하여 러시아와 중국만 웃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온다.
특히 머스크는 예산 절감과 공무원 감축을 빌미로 물 만난 고기마냥 날뛰면서 재무부며 교육부와도 갈등을 일으키는 모양인데, 과거 "빨갱이 사냥"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었지만 기고만장한 나머지 군대까지 건드렸다가 역관광 당한 매카시의 전철을 밟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나저나 USAID라는 기관명을 오랜만에 들으니, 예전에 헌책방에 돌아다니던 영어 원서의 면지에 종종 붙어 있던 "악수 마크"가 혹시 그 상징 아닌가 싶었다. 구글링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위키피디아의 USAID 항목에 성조기 바탕에 악수하는 두 손의 문장(紋章)이 나온다.
종교학자 정진홍의 회고에서도 미국의 원조를 통해 들어온 영어 원서에 이 마크가 붙어 있더라는 증언이 있는데, 비슷한 연배의 김열규나 유종호 같은 학자들 역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문학 잡지를 통해 최신 연구 동향을 접하게 되었다고 회고한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정확히 45년 전입니다. (...) 저는 아직 그 책을 기억합니다. 표지를 열면 미국의 원조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미국기 문장을 바탕으로 두 손이 맞잡은 그림이 있는 우표 네 배쯤 크기의 딱지가 붙어 있던 The Modern Library Giant 판."(<고전, 끝나지 않는 울림>, 117쪽)
나귀님이 가진 영어책 중에서도 "악수 마크"가 붙은 것이 있는데, 예전에 어느 헌책방에서 구입한 브라우닝 시 전집(The Poetical Works of Robert Browning.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05; rep. 1957)이다. 물론 USAID라는 명칭은 없지만 "악수 마크"임은 분명하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번역본이 없는 브라우닝의 희곡 <피파가 지나간다>를 바로 이 책으로 완독했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니 / 세상이 온통 평안하도다!"라는 찬탄으로 마무리되는 "피파의 노래"가 나오지만, 사실 이 희곡 자체는 정반대로 상당히 어둡고 "불편한" 내용이다.
주인공 피파는 공장에서 일하는 소녀로 매년 딱 하루뿐인 휴일을 맞이해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본다. 가난해도 긍정적인 주인공은 부유하고 지체 높은 이웃들 역시 자기처럼 보람차고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으리라 짐작하지만, 사실 그들은 시커먼 속내를 하나씩 갖고 있었다.
간통과 살인 등 각종 범죄를 (심지어 피파의 유산을 강탈한 권력자는 이 소녀를 유곽에 팔아치울 계획까지 세운다!) 저지르거나 모의하는 사람들은 피파가 지나가며 부르는 노래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소녀는 이런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하루를 마감하고 잠자리에 든다.
"피파의 노래"는 워낙 경건하고 긍정적인 내용이다 보니 <빨간 머리 앤>의 결말에도 인용되는 등 기독교인이 좋아하는 시로 유명한데, 사실은 주위의 음모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는 피파의 순진함을 강조함으로써 통렬한 아이러니를 드러내려는 저자의 의도가 깃든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 <피파가 지나간다>의 내용을 언급한 글 대부분에서는 '순진한 소녀가 이웃을 회개시킨다'라고만 설명하고 넘어가는데, 이건 초판 간행 당시 충격을 받은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에두른 해석에 가깝고, 지금에 와서는 그 암울함과 모호성이 더 주목받는 듯하다.
1950년대 말로 짐작되는 그때 고학생이던 정진홍은 과외로 번 돈의 절반을 털어서 USAID 마크가 붙은 <모비 딕> 원서를 구입했다고 회고한다. 구체적인 설명까지는 없지만 정황상 원조품으로 국내에 무료로 배포되었다가 헌책방으로 흘러든 영어책을 구입한 것은 아니었을까.
구글링해 보니 한국전쟁 직후 미국이 보낸 밀가루 등의 원조 식량에도 이 마크가 붙어 있어서, 옛날 양반들 중에는 이 마크를 식품 회사 상표로 오해하고 "악수표"로 부른 경우도 있었다고 전한다. 식량부터 서적까지 한국과도 적지 않은 인연을 맺은 USAID라고 봐야 할 듯하다.
얼마 전에 송승환의 유튜브를 보니 가수 민해경이 나와 인터뷰한 내용 중에 과거 강남의 에이아이디(AID) 아파트에 살았다고 회고한 부분이 있던데, 이것 역시 과거 USAID의 원조로 지었음을 아예 이름에다가 밝혀놓은 이른바 "AID 차관 아파트" 가운데 하나였다고 알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결국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일 수밖에 없지만, 누군가의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굶주림을 채워준 식량과 서적 같은 구체적인 원조의 사례를 보고 들은 나귀님으로서는 USAID를 백해무익한 조직으로 몰고 가는 것 역시 선뜻 수긍이 가는 조치는 아니다.
그런데도 의견 수렴이나 여론 청취 같은 절차 없이 전격적으로 USAID 폐지 수순에 돌입하고 있다니 놀랄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정권 교체 직후 기관장 물갈이며 조직 개편 같은 칼바람이 부는 것이 일반적이기는 한데, 트럼프에 머스크를 "곁들인" 탓인지 유난히 매운 맛이다.
아직까지는 민주주의적인 절차가 살아 있는 미국이다 보니, 이것 역시 관세 폭탄이며 이민자 단속 같은 트럼프 정권의 여러 겁박 시도처럼 결국은 흐지부지될지도 모르겠지만, 한국의 무모한 비상 계엄 시도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신뢰도를 떨어트리는 자충수임은 분명해 보인다.
단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간 민주당 정권 하에서 이루어졌던 모든 제도며 정책을 하루아침에 뒤집고 싶어 하는 트럼프이지만, 누군가의 지적처럼 이렇게 일관성 없는 깜짝 조치가 결과적으로는 자국의 이익에 오히려 불리하리라는 점도 직시해야 하지 않을까.
흥미로운 점은 현재 대립 중인 두 기관의 이름 약자가 DOGE와 USAID이다 보니 졸지에 "강쥐"(doge)와 "원조"(aid)의 다툼이 되어 버렸다는 거다. 세인트버나드처럼 조난자를 구조하는 것으로 유명한 강아지도 있었다던데 어째서 미국의 상황은 이처럼 "개판 5분 전"이 된 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