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사에서 미쉬나 번역서를 부록 포함 전7권으로 간행한다기에 신기한 일이다 싶었는데, 나중에 다시 검색해 보니 유대교 연구자인 백석대학교 변순복 교수의 미쉬나 번역서가 역시나 부록 포함 전7권으로 간행된 상태였다. 그것도 후자는 올해 4월 출간, 전자는 8월 출간이라 불과 4개월 사이에 번역본이 2종이나 나오는 셈이다.


한쪽은 단독 번역이고 다른 한쪽은 공동 번역이지만, 애초에 아무나 쉽게 읽을 수 없는 원저의 특성상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뚝딱 작업이 이루어졌을 리는 없고, 최소한 수년의 노력이 들어갔을 법하다. 그러니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지, 아니면 나귀님 같은 일반인으로서는 알 길 없는 학계의 어떤 경쟁의 결과물인지 궁금해진다.


이미 갖고 있는 허버트 댄비와 제이콥 뉴스너의 영역본을 꺼내 뒤적여 보니 양쪽 모두 900페이지와 1100페이지에 달한다. 히브리어 원문까지 덧붙이면 충분히 지금처럼 전7권 3천 5백 페이지, 또는 전7권 5천 2백 페이지에 달하는 번역본이 나올 법도 해 보인다. 미쉬나만 이 정도이니 게마라까지 합치면 수십 권에 달할 듯하다.


생각난 김에 정리하자면 (나귀님도 종종 헛갈리는데) 토라(오경)에 포함되지 않은 랍비들의 구비 전승, 즉 구전 토라가 미쉬나이고, 이 미쉬나에 대한 주석이 게마라이다. 예를 들어 미쉬나에서 어떤 규례가 나오면 게마라에서는 그 규례에 대한 여러 랍비의 다양한 해석들이 소개된다. 미쉬나와 게마라를 합쳐서 탈무드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탈무드>라고 하면 마빈 토케이어라는 미국인 랍비가 저술한 책을 떠올리게 마련인데, 일본에 오래 살았던 저자의 경력을 감안하면 원저 자체가 일본어로 저술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거기 수록된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아마 탈무드 가운데 게마라에 나온 일화에다가 기타 전승의 내용을 보충한 것으로 짐작된다.


예를 들어 몸이 하나에 머리가 둘인 샴쌍둥이가 한 사람인지 두 사람인지를 알려면 한쪽 머리에 뜨거운 물을 뿌리고 반응을 살피라는 우화를 보자. 탈무드 게마라에는 장자 대속의 규례와 관련된 예제로 샴쌍둥이에게 한 사람 값을 받을지 두 사람 값을 받을지에 대한 논의가 나오지만, 정작 뜨거운 물을 뿌린다는 내용까지는 없다.


반면 탈무드의 기반인 미쉬나는 다양한 규례를 모은 것이다 보니 배경 지식 없는 일반 독자로서는 내용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고, 토케이어의 책 같은 재미를 기대했다면 더욱 실망하지 않을까 싶다. 앤 카슨이 인용한 "워낙에 좁아서 여러 번 해도 늘 처음 같은 암컷 영양의 음문" 비유도 미쉬나가 아니라 게마라에만 나온다.


미쉬나 자체는 여섯 권, 심지어 영역본의 경우처럼 단권에 담을 만큼 분량이 적은 편이지만, 게마라까지 합치면 상당한 분량이어서 토케이어는 탈무드를 빌려달라는 이방인 친구에게 "자동차를 가져와서 싣고 가라"고 조언해 주었다고 회고한다. 탈무드 자체가 서적 수십 권 분량이라, 그 무게만 해도 수십 킬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유대인 랍비만 읽는 전문 서적이다 보니, 이방인 중에는 탈무드를 일종의 마도서로 착각한 경우도 있었다. 최근 나온 나치 시대의 일상사 가운데 하나에도 '유대인은 탈무드라는 악마의 책을 본다'는 독일인의 증언이 나와서 쓴웃음을 자아내는데, 따지고 보면 탈무드를 처세서로만 여기는 우리나라의 통념도 오해이긴 마찬가지다.


탈무드를 익힌 유대인 랍비의 뛰어난 언변에는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도 혀를 내두른 바 있다. 한 번은 그가 대중 강연을 마치자마자 젊은 보수파 유대인 랍비 둘이 찾아와 다짜고짜 물었다. "전기는 불입니까?" 유대교의 율법에서는 안식일에 불 사용이 금지되었으므로, 전기가 불인지 아닌지에 대해 확답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과학에 전통을 맞춰가는 대신 전통에 과학을 맞추려는 대놓고 시대착오적인 태도에 흥미를 느낀 파인만이 이런저런 질문으로 상대방을 모순에 빠트리려 시도했지만, 두 랍비는 수천 년의 전통을 무기 삼아 마치 미꾸라지처럼 이리저리 잘도 빠져 달아났다고 전한다. 결국 파인만도 랍비 앞에서는 꼼짝없이 항복을 선언했다 하던가.


그나저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무력 충돌로 논란이 지속되는 지금, 유대교 랍비 전통의 정수인 미쉬나가 간행된다는 점은 살짝 아이러니하다. 결국 미쉬나란 기존의 원칙을 엄격히 적용할 수 없는 각종 돌발 상황을 가정하고 유연한 해결을 모색한 결과물인 듯한데, 어째서 지금 이스라엘은 맹목적인 원칙만 고수하는 것일까.


유대인의 이방인 혐오증은 구약성서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었지만, 이와 반대로 미쉬나에는 평화를 도모하는 차원에서 가난한 이방인에게도 배려하라는 등의 유연한 조언들(예를 들어 나쉼/기틴 5.8)도 여럿 찾아볼 수 있다. 물론 현재의 이스라엘이 드러내는 오만과 탐욕이라면 미쉬나가 아니라 하느님이 와도 못 말릴 것 같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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