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처럼 생각하기 - 나무처럼 자연의 질서 속에서 다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자크 타상 지음, 구영옥 옮김 / 더숲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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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만들어진 탁자를 좋아한다. 나이테로 물결치는 무늬 앞에서 나의 심장은 느리게 뛴다. 규칙적으로 줄 맞추기를 좋아하는 성향이면서도 나무의 불규칙함에서는 안정감을 느낀다. 이유가 뭘까. 탁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무늬를 만드는 결에서 답을 찾는다. 대리석의 유려한 무늬와는 다른 점이 눈에 들어온다.

물결인 듯 보이는 진한 선은 무수하게 짧은 빗금의 집합이다. 자잘한 털들이 모여 숯 검댕이 눈썹을 만드는 것처럼. 한 뼘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 빗금은 선이라기보다 촘촘하고 살짝 긴 점에 가깝다. 스스로 삶을 확장하기 위한 탈피의 흔적으로 이루어진 길처럼 보인다.

결은 길이다. 곤충의 탈피가 성장의 자취이듯 나무의 결은 자라온 시간을 담는다. 사람이 겪는 성장통처럼 나무는 나이테의 결을 만들 때 고통스러울까. 상처의 흔적으로도 보이는 빗금이 모여 굵직한 선으로 그어질 때까지 어떤 삶의 길을 걸을까.

 

나무처럼 생각하기는 나무의 삶과 존재 방식에 대하여 다양한 각도로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저자인 자크 타상의 관점에 의하면 지구는 나무의 행성이다. 흔히 지구를 물의 행성이라 일컫는다. 지표면의 70% 이상이 바닷물로 채워져 있으니 당연한 정의이다. 겉으로 보기에 지구는 태양계에서 푸른 구슬로 존재한다. 생명체를 기준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생태계를 생각하니 먹이피라미드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식물은 제일 아래에서 든든하게 생태계를 떠받치는 생산자이니 나무의 행성이라 해도 무리는 없으리라.

책 속에서 이루어지는 저자의 모든 사유는 나무에서 시작해서 나무로 끝난다. 나무의, 나무에 의한, 나무를 위한 책이다. 인간에게서 나무의 흔적을 찾고 나무가 세상에 존재하는 법을 말하며 나무와 함께 살아가기를 권유한다. 숲을 이루는 나무의 화합에서 교향곡을 들으며 인간의 역사와 함께 걸어온 나무의 의미를 찾는다. 나무를 함부로 대하는 인간에게 지속가능한 발전의 길을 제안한다.

 

독자로서 모든 책을 읽는 목적은 하나로 귀결된다.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도 역시 인간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데 있다. 식물학자로서 그가 선택한 매개체가 나무일 뿐이다.

바라보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 박웅현은 여덟 단어에서 ()’을 언급한다. 시각적인 정보만이 뇌에 전달되어 인지하는 게 아니라 그 너머의 본질까지 바라보는 게 진짜 보는 거라고. 이런 이유로 어떤 대상을 통해 볼 수 있는 요소는 땅에서 우주만큼의 차이를 보인다. ‘어떻게얼마나를 결정한다.

자크 타상 덕분에 엄지손가락을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다. 엄지는 다른 손가락과 마주 보고 있다는 문장 덕분이다. 책 속의 문맥과는 다르지만, 새삼 엄지 손끝을 나머지 손가락 끝에 차례로 대어본다. 이웃한 어떤 손가락들도 그들끼리는 마주 볼 수 없다. 가까운 손가락을 겹쳐도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다. 멀리 있어도 어떤 손가락에든 닿을 수 있고 유일하게 다른 손가락을 마주 볼 수 있는 존재라니!

 

사람은 왜 품종이라 하지 않아?” 뜬금없이 딸이 묻는다. 사과의 품종은 부사, 홍옥, 아오리 등이거나, 개의 품종도 푸들, 몰티즈, 닥스훈트 등 다양하지 않은가. “그건 사람이 기준이라 그런 거 아닐까.” 잠시 망설이다 답한다. 세상은 사람을 기준으로 해석되고 정의된다. 그리고 관점은 그가 사는 세상의 크기를 결정한다.

식물의 감각이 인간처럼 오감 이상으로 존재하리라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식물에게 20여 가지의 다른 감각이 있다는 말에 놀랐던 건 이런 이유이리라. 나를 기준으로 식물을 판단해왔으니까. 곰곰 생각하면 우리가 3차원을 산다고 우주가 그리 존재하는 건 아닌데 말이다.

우주와 나무를 연결하는 저자의 문장을 따라가니 상상하는 공간의 크기가 넓어진다. 땅과 우주의 무언가에 나무라는 고리가 걸려 연결된 선을 붙잡으면 우주의 기운이 훅 끼얹어질 것 같다. 나무 아래 서면 우주의 기운을 들이마셔 확장된 폐가 적당히 서늘해질 것 같다.

 

멋진 은유가 많은 책이다. 다만 너무 과도하다. 나무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아는 저자의 열정은 충분히 이해하나 전체적으로 산만하다. 설익은 과일을 잔뜩 가져다 놓은 듯 어느 걸 맛보아도 살짝 떫다. 느긋한 산책길도 아니고 전력 질주도 아니고 어정쩡한 속도로 걸어가는 문장을 지켜보는 기분이다.

문장을 꺼냈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근육이 부족하다. 슬림한 몸도 근육 짱짱한 식스팩도 아닌, 어설프게 운동하는 아마추어를 보는 듯하다. 서사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지 못하는 느낌이랄까.

뚝뚝 끊기는 내용이 몰입을 방해한다. 식어버린 피자치즈 같다. 문장의 흐름을 따라가다 작가가 애초에 무슨 말을 꺼냈었더라 갈 길을 잃어 몇 번이나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확실한 장점은 관점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나무는 생각보다 더 굉장한 존재라는 것. 특히 주변과의 상호작용이 중요함을 인지하게 된다. 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만 우는 게 아니라 줄기와 뿌리와 잎이, 햇살과 비와 바람과 흙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나무의 복수형은 나무들이 아니다. 숲이다. 숲은 나무뿐 아니라 공간까지 품는다. 나무 사이를 흐르는 공기, 흙내음, 나무 위에 생명을 누인 자그마한 벌레, 새들, 짐승들까지 아우른다. 이들로 둘러싸인 나무의 존재 의미를 생각한다.

비를 기다리고 바람을 기다리고 햇살을 기다리다 그들이 오면 미련 없이 떠나보낸다. 빛으로 뜨개질한 양분과 산소를 정갈하게 다듬어 밖으로 내어준다. 소유하는 거라고는 잠시 머금고 있는 물뿐이다. 이마저 절반 이상은 공간으로 돌려보낸다. 나무는 기다림과 무소유의 다른 이름일까.

과학 교사에게 광합성은 무심코 들이마시는 공기처럼 일상의 언어에 속한다. 명반응과 암반응 등 화학적 과정으로 얽혀 있는 에너지와 물질 전환의 과정이다. 습관처럼 머무는 학문적 개념이라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적은 없다. 초록의 잎에서 일어나는 경이로운 장면이 드러내는 본질적인 의미를. 빛을 흡수하는 생명체라니! 무형으로부터 유형의 것을 만들어낸다니! 상상할수록 전율이 인다.

 

어떤 개체도 자신이 아닌 것과의 연결 없이는 유지되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개체가 자신의 환경과 분리될 수 없는 한, 개체는 잠재성 그 자체다. 개체로 존재하기 위해서 자신 속에 없는 것과 융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p101~102)

환경과 자연스럽게 손을 잡는 담대함을 나무에서 발견한다. 자연스럽다는 건 힘을 빼는 거다. 공기 반 소리 반을 말하는 누군가도 외치지 않았는가. 어깨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노래하라고. 힘을 뺀다는 건 사실 대단한 용기 아닌가. 새로운 환경 앞에서 주춤하는 본능을 극복한 결과일 테니까.

나이테의 결을 만들 때 나무는 고통스러웠을까. 온통 나무로 이루어진 책의 숲을 통과하니 자연스레 결론에 도달한다. 나의 답은 아니다이다. 날이 추우면 촘촘하게, 더우면 느슨하게, 힘을 빼고 자연스레 파도타기를 하는 능숙한 프로였던 거다. 경계를 허물어 무소유를 실천한 나무가 얻은 것은 한껏 품은 우주였을까.

 

 

p30, 각주의 마지막 줄: 잘환 질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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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단어 -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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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떼어놓고 보면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일들이라도 겹겹이 중첩되면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혼란스러운 상황과 결정짓지 못한 일과 망설임으로 채워진 갈등과 의기소침과 스스로 들여다보는 가식과 자책과 실망감과 불안함이 뒤섞였다. 소소한 일상들이 조금씩 심장을 할퀴었다. 영혼이 난시라도 된 듯 부정확한 초점으로 흔들렸다.

삶이 어떤 풍경으로 펼쳐지느냐, 마음이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마주치는 책은 다른 의미로 남는다. 이를테면 마실 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같다. 씁쓸한 듯싶다가도 시원함을 아작아작 부숴 넘기는 통쾌함을 안겨준다. 간질간질 향이 코끝을 어루만지는가 하면 손바닥이 시릴 정도로 냉철함이 스며든다. 차분한 갈색이 목구멍을 보듬다가도 헛헛한 낙엽이 미적지근하게 굴러들어온다.

책장에 줄지어 선 세상을 하릴없이 왕복했다. 36.5도가 너무 뜨거웠다. 사계절을 지나온 나무가 품은 담담한 말들에 기대고 싶었다. 아무 책이라도 좋았지만 아무 책이어서는 안 되었다. 사둔 지 몇 년이나 지난 이 책에 눈길이 머무는 순간을 시작으로 우연히 끌려 온 여덟 개의 별똥별은 내 삶의 대기권으로 날아들었다. 섬광처럼 빛을 내다 심장에 선명한 느낌표를 찍었다. 갈증 날 때 발견한 물처럼 필요로 하는 절묘한 타이밍에 마주친 책이었다.

 

여덟 단어20, 30대를 대상으로 2012년에 두 달여 간 이루어진 강의를 엮은 책이다. 작가 박웅현은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주제로 여덟 개의 키워드를 정한다. 자존, 본질, 고전, (), 현재, 권위, 소통, 인생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는 TBWA KOREA에서 크리에이티브 대표(CCO)로 일하는 광고인이다. 광고는 축약된 메시지를 15초에 담아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시키는 일이다.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작가의 글에 묻어난다. 문장은 간결하고 시선은 청중의 눈높이와 나란하며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확하다.

겉표지부터 내 스타일이다. 책 제목과 작가 이름을 이용하여 사람의 이미지를 표현한 점이 광고를 연상케 한다. 각각의 강연을 여는 페이지에는 제목 밑에 광고의 카피를 연상케 하는 한 줄의 보조문장이 적혀있다. 키워드를 관통하는 문장들이다.

뒷장을 넘기면 인상적인 이미지가 펼쳐진다. 작가의 글씨로 기록된 듯한 강의 메모 수첩이다. 살짝 훑어본다. 본문을 다 읽고 나서 되돌아가 다시 읽는다. 콘티 역할을 한 스케치일까. 강연 내용과 대조해본다. 처음의 의도가 반영된 내용도 있지만 빠지거나 추가된 부분도 보인다. 순간순간의 순발력으로 강의가 업그레이드된다는 거다. 투박한 메모에 보이는 고민의 흔적들과 정갈한 강연으로 다듬어진 내용을 함께 보니 괜스레 뭉클하다.

 

책을 읽을 때 음악을 즐겨 듣는다. 소설책을 펼칠 때 배경음악이 적절하게 어우러지면 등장인물의 감정에 더욱 잘 이입된다. 영화나 드라마에 삽입되는 OST가 감동을 짙게 만드는 경우와 비슷하다. 시각과 청각이 어우러진 공감각은 느낌의 깊이를 더한다. 문장의 맛이 풍부해진다. 애끓는 이별 장면에 드럼의 신들린 연주가 곁들여지면 곤란하겠지만 말이다.

글을 쓸 때도 음악을 들으면 헝클어져 있던 생각이 정돈된다. 쓰고자 하는 글의 성격에 따라 적절한 노동요를 선정하여 OST로 깔아준다. 방앗간 가래떡처럼 정갈하고 꼬들꼬들한 문장들이 방언인 듯 터져 나올 때가 있다. 글과 음악에도 궁합이 존재한다면 이 둘은 천생연분의 커플이리라.

이 책의 BGM으로는 <캐논 변주곡>이 적당하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주변의 공간이 3차원의 거대한 TV로 변한다. 그 속에서 나는 순간적으로 드라마 주인공이 된다. 다양한 버전의 선율이 흐른다. 가야금, 피아노, 첼로, 드럼, 바이올린, 일렉 기타, 어쿠스틱 기타, 하프, 테크노. 여덟 단어를 주제로 하는 에피소드가 하나씩 펼쳐지면 내가 겪은 일이 다양한 음색으로 울린다. 조화로운 음으로 편안하게 가끔은 불협화음의 시간으로 나를 데려간다.

박웅현의 여덟 단어가 마법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버튼이 된다. 친구가 되었다가 토닥토닥 다정한 손길이 되었다가 포근한 이불이 되었다가 예리한 얼음으로 화들짝 놀라게 만든다. 책 속의 문장과 내 삶의 문장들이 씨실과 날실로 얽힌다.

 

현상은 복잡하다. 법칙은 단순하다.……버릴 게 무엇인지 알아내라.’는 리처드 파인먼의 말은 선분으로 존재하던 나의 문제에 화살표의 머리를 만들어준다. 더하기보다 어려운 건 빼기이다. 수학뿐 아니라 많은 분야에서 적용되는 원리이다. 정리할 때도 버릴 물건을 정하는 과정이 훨씬 어려우니까. 미련 내지는 욕심 때문이다. 2강의 <본질>의 입구에 놓인 이 문장을 시작으로 지금 풀어내야 할 문제의 해결책이 담긴 정답의 노다지를 만난다. 불쑥 떠오르는 문제에 대하여 본질을 묻는다.

첫째, 내 글의 본질은 무엇인가?

글은 종이에 기록되는 목소리이다. 한때 즐겨보던 TV 프로그램 <복면가왕>이 떠오른다. 얼굴을 가려도 임을 알아볼 수 있는 건 이게 만드는 목소리의 본질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나의 글을 나의 글이게 하는 본질은 뭘까.

둘째, 나는 왜 화가 났을까?

얼마 전 과학실 뒷정리를 하다 실험대 위의 아크릴 칸막이를 보고 분노한다. 볼펜이나 연필 낙서는 애교다. 알콜 성분이 들어간 소독제를 한 번 뿌리면 클리어되니까. 한데 칼로 조각된 저 거대한 물음표 형상은 어쩌란 말이냐! 심장을 칼로 긁힌 듯 부르르 떨었다. ~ ~ 커터칼을 들었을 저 어린 장수를 어찌 처단할까. 그날 저녁에 만난 <본질>은 내가 그토록 분노했던 이유를 알려준다. 아이의 인성 때문이 아니었다. 내 수업을 지루해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이유가 가장 컸던 거다.

 

평범한 문장이 시인의 눈을 통과하면 특별한 전율로 살아난다. ‘저녁이야 /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안도현의 시 <스며드는 것>에 나오는 문장을 보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뭉클한 서사를 안겨주는 시인의 시선에 경외감이 들었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한가. 직접 찾아 시의 전문을 보기를 권한다. 시에 담긴 소재를 보는 시각이 사뭇 달라지는 체험을 하게 되리라.

수업 태도로 매번 신경 쓰이게 만드는 아이와 갈등이 있었다. 시작은 사소했으나 결말은 다소 창대해졌다. 나의 의도대로 행동하지 않는 아이와 몇 번의 강한 말이 오갔다. 평소보다 높은 진폭으로 감정이 일렁였다. 해프닝 정도의 일이었지만 찜찜한 기분이 며칠을 갔다. 그즈음 <()>을 만나 아이를 보는 시각을 곰곰 생각했다. 난 그 아이를 제대로 본 것일까. 제대로 알고 싶어 하지도 이해하고 싶어 하지도 대화하고 싶어 하지도 않고 본질을 놓친 채 그저 껍데기의 까칠함만 본 건 아닐까. 습관처럼 아이들을 불변하는 가구인 듯 보아왔던 건 아닐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다 보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다음 주 헤헤거리며 나를 대하는 아이를 보니 머쓱한 앙금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이미 마신 커피를 떠올리느냐 미처 들어오지 못한 얼음을 바라보느냐, 컵을 보느냐, 빨대를 보느냐. 고동색 커피, 투명한 얼음, 하얀 머그잔, 붉은 빨대 등 다양한 요소가 나의 선택을 기다린다. 안팎으로 기다리는 소재 중 무엇을 볼 것인가.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매너리즘 없이 세상을 처음 보는 아이의 맑은 시선을 가져야 하리라. 사물이든 사람이든 스스로 내면을 바라볼 때조차.

 

몸이 움찔하게 되는 건 사소하게 베인 상처 때문일 때가 많다. 일상의 지질한 일들이 의외로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그럴 때마다 본질을 응시하고 제대로 바라본다면 조금 덜 아프게 다시 걸어 나갈 힘을 얻게 되리라.

2013년에 출간된 후로 10년이 다 되어가는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울림이 생기는 건 그가 언급한 문장 ‘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처럼 책 안에 담긴 본질이 나무처럼 곧게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리라.

리뷰를 쓸 때면 무의식적으로 그때 일어난 일들, 그때 보았던 드라마, 그때 읽었던 책, 그때 나누었던 대화, 그때 맡았던 향기가 소재가 되어 녹아들었다. 슬픔에 관한 책이라면 이 모든 환경에서 슬픔을, 행복이 주제라면 같은 환경에서 행복을 뽑아내어 그 실로 뜨개질을 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선택한 다음에 그걸 정답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문장에서 공통적인 맥락을 발견한다. 고민하는 선택 상황에서도 같은 방식을 적용하면 되는 거였다. 신중하게 선택할 것, 선택한 나의 답이 정답이니 다만 그 길을 향해 노력할 것. 작가의 문장들이 응원의 에너지를 전해준다.

마지막 책 장을 덮고 음악을 멈춘다. 박웅현 작가가 쓴 드라마 1부가 끝이 났다. 이제 배경음악부터 모든 걸 디자인하는 2부는 나의 몫이다. 다큐멘터리로 뛰어드는 대본 없는 실전이다. 내 안에서 빛나고 있을 나만의 별을 찾아 지금부터 큐!

 

p85 인용문 6째줄: 1년의 달수 ~ 날수

p85 인용문 6째줄: 대양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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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 - 문학 작품에 숨겨진 25가지 발명품
앵거스 플레처 지음, 박미경 옮김 / 비잉(Being)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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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영혼의 얼굴이다. 마음의 표정은 몇 가지나 될까.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사랑, 두려움, 믿음, 호기심, 상실감, 절망, 외로움, 그리움, 미움, 담담함, 아픔, 용기, 감사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감정들이 채도를 달리하며 담겨있으리라.

사람은 하루에 7만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중 얼마나 많은 감정이 영혼을 쓰다듬다 가라앉을까. 화수분에 담긴 듯 헤아릴 수 없는 감정들이 자라다 사그라들거나 단단한 얼음으로 굳어지기도 할 터이다.

워터볼 속에서 반짝이는 눈꽃인 양 영혼의 우주를 부유하는 마음의 파편들을 상상한다. 해파리처럼 물컹한 감정도 있지만 격한 감정은 심장을 할퀴며 돌아다닌다. 마음이 상처를 입는다. 문제는 상처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살펴볼 수 있다. 연고를 바르거나 꿰매거나 치료하면 된다. 몸이 부딪치면 멍이나 내출혈이 생기기도 한다. 저절로 스며들기를 기다리기도 하지만 외적인 상처보다 치유되는 데 오래 걸린다. 혈관을 막아 위험할 수도 있다. 마음의 상처는 내출혈보다 더 까다롭다. 멍처럼 피부 너머로 비치지도 않아 어느 정도인지 가늠조차 어렵다.

 

보이지 않기에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는 자동차 사이드미러와 같다면 실제보다 더욱 커다랄 터이다. 계곡에 담근 두 다리를 고개를 숙여 바라보는 상황이라면 보기보다 얕은 상처일 수도 있다. 평면거울에 비친 상처럼 정확히 같은 크기로 인지하기 어렵다. 마음은 보통 까다로운 대상이 아니다.

뇌가 일으키는 오류 중 착시 현상이 있다. 다양한 착시는 배경에 의해 발생한다. 보면서도 믿기지 않게 실제보다 밝거나 어둡거나 길거나 짧게 보인다. 마음에도 다양한 감정들이 배경으로 담겨있으니 종종 착시를 일으킨다. 감정은 SF영화의 액체 인간처럼 심장의 안팎을 드나들며 세상을 굴절시키니.

당신은 당신의 마음을 얼마나 정확하게 인지하는가. 살아가면서 우리는 크고 작은 상처를 받기 마련이다. 지금 마음에 상처가 있다면 얼마만큼인지 알고 있다 자신하는가. 여기, 나도 모를 때가 있는 내 마음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의 저자 앵거스 플레처는 그 방법을 문학에서 찾는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인간이 고안해낸 모든 것을 테크놀로지라 일컬으며 문학을 이 범주에 넣는다. 다양한 문학 작품에 숨겨진 25가지 발명품을 주제별로 소개한다. 이야기가 감정을 자극할 수 있다고 본다.

 

문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는 인간의 마음에 초점을 맞춘다. 문학을 매개로 살면서 품게 되는 의문이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석적으로 증명한다. 신경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심리학적, 생리학적, 약학적 효과를 입증한다. 각 장에는 적절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소개한다. 차례를 훑어보니 제시된 작품 중 접해본 게 네 권뿐이다. 소심하게 첫 장을 넘긴다.

수록 작품의 대부분을 모르는데도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니 소설을 읽고 싶어진다. 각기 다른 소주제로 나뉘어 구성되니 696쪽이 예상보다 짧은 호흡으로 넘어간다. 마라톤을 뛸 준비를 하고 잔뜩 긴장했는데 800미터 오래달리기 정도를 완주한 느낌이다.

소설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게 되니 의외로 매력적이다. 이야기는 마음을 노크하는 도구일까. 똑똑, 쾅쾅, 톡톡, 빵빵. 문학이 내는 다양한 소리가 가라앉아있는 감정을 떠오르게 만드니. 청진기로 나를 진찰하는 주치의가 되어 가만히 부유하는 감정을 응시한다.

다만 전체적인 느낌을 말한다면 문학을 향한 접근 방식은 신선하지만, 원제 Wonderworks정도로 그리 놀랍지는 않다. 내게는 표지에 소개된 대로 너무 환상적이거나 끝내주는 책은 아니었다. 몇몇 주제는 흡인력이 있었지만, 발명품이라는 정체성에 맞추기 위해 다소 억지스러운 설정도 보였다.

 

평소 듣던 노래가 유난히 깊숙하게 들리는 순간이 있다. 어젯밤에는 무심코 지나치던 노래의 가사가 솜털처럼 심장을 건드렸다. 아침 출근길에 마음속으로 박지헌의 <꽃이 핀다>를 흥얼거리면서 15분을 걸었다.

아픔이 와도 눈물이 흘러 내 가슴이 젖어도 지금 이 순간이 전부는 아냐, 시간이 가면 지나가리라, 봄은 오리라 믿어. 다시 꽃이 핀다. 내 텅 빈 가슴속에도 겨울이 가고 어느새 봄이 돌아오면 다시 꽃이 핀다. 내 아픈 눈물 속에도 시간이 지나 결국엔 사랑이 온다. (중략) 다시 꽃이 핀다. 내 얼어붙은 맘에도 햇살이 비춰 어느새 상처가 아물면 새살이 돋아 꽃이 핀다.~’

꽁꽁 싸맨 목도리, 장갑, 모자 사이로 매서운 공기가 스며들었지만, 따뜻한 난로라도 품은 듯 내내 든든했다. 노래를 들으면서 몰랐던 마음을 깨닫는다. , 그동안 내가 힘들었구나. 위로받고 싶었구나, 이런 말을 듣고 싶었구나.

마음에 들어오는 노래는 한동안 머릿속을 맴돈다. 문학을 접하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기쁠 때, 사랑에 빠졌을 때, 외로울 때, 슬픔으로 가라앉는 절묘한 타이밍에 문장이 스며든다. 2차원의 종이에 누워있던 글자들이 조금씩 들썩이며 3차원으로 되살아난다. 글이 리듬을 타고 음악처럼 출렁인다.

 

글의 힘에 대하여 종종 생각한다. 매일 먹는 스틱형 비타민 분말이 있는데 컵 속에 연필처럼 꽂혀 있다. 아침마다 한 개씩 뽑을 때마다 은근한 기대감을 품는다. 포장지에 적힌 세 글자 때문이다. 충전해, 응원해, 심심해, 사랑해, 좋아해, 운동해. 6종 세트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게 은근히 골라보는 재미를 준다. 오늘의 운세인 양 응원해를 뽑으면 친구로부터 격려의 말을 들은 듯 힘이 난다. 짤막한 몇 개의 글자로도 에너지를 받는데 한 권의 책에 담긴 글자들이 밀물처럼 밀려든다면 그 힘은 어떠할까.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문학이 주는 힘의 근원을 정의해본다. 나만의 결론은 세 가지이다. 첫째, 자기 객관화이다. 글자를 마주 보는 독자는 그 거리만큼 객관적이다. 내면으로 함몰되려는 시선이 문장으로 옮겨지면 스스로 심장을 관찰하는 사람이 된다. 나를 바라보는 친구 한 명을 얻게 된다. 둘째,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이다. 시선이 문장을 따라가면 메아리처럼 나의 목소리가 마음속에 울린다.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셋째, 공명이다. 문학 속 이야기나 특정 문장에 내밀한 감정이 등장하면 이에 상응하는 나의 감정이 공명하며 큰 폭으로 반응한다. 숨어있던 마음이 떠오른다. 드러나면 반창고를 붙이든 붕대를 감아주든 약을 바를 수 있다.

 

문학은 햇살 같은 친구이다. 다양한 파장의 빛을 한 줄기로 모아 심장을 비춘다. 마음에 감춘 감정을 일깨우며 상처를 도닥인다.

전능한 마음으로 북돋는 용기를, 비밀 공개로 지피는 로맨스의 불을, 공감으로 떨쳐내는 분노를, 평정심으로 딛고 올라서는 상처를, 미래의 이야기로 자극하는 호기심을, 경계심 유발로 해방되는 정신을, 동화의 반전으로 버리는 비관적인 생각을, 슬픔의 해결로 치유하는 상실감을, 절망을 떨쳐내기 위한 마음의 눈 뜨기를, 나비처럼 훌훌 날아 달성하는 자아 수용을, 실연의 아픔을 물리치는 밸런타인 갑옷을,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메타 호러를, 온갖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가상 과학자를, 갈수록 진화하는 삶으로 성장하는 자신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딛고 일어서는 실패를, 머리를 맑게 하는 다시 살펴보기를, 마음의 평화를 찾아주는 의식의 강둑을, 무질서로 길러지는 창의성을, 인간성의 연결로 풀어내는 구원의 자물쇠를, 혁명의 재발견으로 쇄신하는 미래를, 이중 이방인으로서의 현명한 결정을, 자신의 목소리로 확인하는 자기 가치를, 임상적 기쁨으로 녹는 마음을, 소원 성취로 펼쳐지는 꿈을, 오페라로 달래는 외로움을.’

언제든 햇살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면 된다. 저자의 말대로 비극은 슬픔을 몰아내며 위로해주고, 희극은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니까. 굴곡진 삶의 길을 따뜻한 친구와 걸어가면 된다.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신문지 맛만 날 듯한 글자에서 단맛, 쓴맛, 짠맛, 신맛, 감칠맛을 볼 수 있으니. 글자에서 색깔을 보고 온도를 느끼고 고통을 느끼고 음악을 듣고 향기를 맡는 존재. 이야기에 반응하는 당신의 심장도 문학 못지않게 놀라운 대상이리라.

글을 쓴다는 건 가상의 독자를 향해 공을 던지는 행위이다. 던진 공은 차원을 넘어 실재하는 독자에게 도달한다. 작가가 상상 못할 장소와 느닷없는 시간과 아마도 마주치지 못할 확률이 더욱 높은 간절한 누군가의 앞에.

나의 공이 부드럽고 따스한 느낌이기를 바란다. 시리고 헛헛한 당신이 무심코 굴러가는 공을 잡았을 때 은은한 온기를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 “당신의 글이 항상 진실일 필요는 없다. 그 글로 당신이 무얼 하려는 지가 중요하다.” 퀸틸리아누스가 했다는 말이 마음에 남는다.

문학으로 무형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장면을 상상한다. 보이지 않는 감정이 흘러넘치거나 스며드는 상황을 떠올린다. 물질과 정신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환하게 빛나는 저 하늘로 자유롭게 날아오르고 싶은가. 문학은 이리저리 튀는 탱탱볼처럼 당신의 마음을 얼마든지 끌어올릴 수 있다. 심연의 바다에서 팽창하는 우주까지 어디든 데려다주는 힘이 문학에 있다.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이 원하는 만큼.

 

 

p80 3째줄: 켜져다. 켜졌다.

p117 1째줄, p118 1째줄, p119 4째줄, p122 밑에서 3째줄: 회환 회한

p129~130: 불가사이한 불가사의한

p167 중간: 멕베스》→ 《맥베스

p366 4째줄: 더렵혀지지 더럽혀지지

p421 밑에서 3째줄: 꽤했다는 꾀했다는

p629 밑에서 8째줄: 패니 페니

p651: 쪽 수 표시 없음

뒤표지, 닐 메케이의 말: 플레쳐 플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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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황보름 지음 / 클레이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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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냄새는 나무 냄새를 닮아서 좋다. e북보다는 만질 수 있는 종이책을 좋아하는 이유다. 닿을 수 없는 우주인 듯 까마득한 디지털 말고 손끝으로 느껴지는 나무의 감촉을 좋아한다. 편안하게 책을 둘러볼 수 있는 서점이라는 공간이 이래서 좋다. 서점에서 책과 책 사이를 거닐면 숲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편안하다. 서점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하나둘씩 사라지더니 이제는 동네에 하나 찾아보기 힘들다.

처음부터 완성된 건축물로 둘러싸인 공간은 없다. 기초공사를 하고 기둥을 세우고 자재와 자재를 연결하는 과정이 반복되어야 비로소 물리적인 공간이 만들어진다. 건축자재가 만드는 공간이 물리적이라면, 공간이 담고 있는 정서는 화학적이다. ‘몸이 긍정하는 공간,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공간,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공간’. 내게 이런 공간이 있던가. 황보름 작가는 이런 공간을 소설에 담는다. 상상만으로도 숨이 탁 트인다.

공간의 정체성은 물리적인 요소와 화학적인 요소와의 시너지로 결정되는 듯하다. 드나드는 사람들 사이의 케미가 조화로운 공간은 따뜻하면서도 향긋하다. 책에 소개된 킨(Keane)의 앨범 <호프스 앤드 피어스>를 찾아 들어본다. 산책하듯 책 속을 걸어간다. 나무 냄새가 나는 공간으로 둘러싸인 상상을 한다. 첫 장을 넘겼을 뿐인데 마음이 느른해진다. 시선도 마음도 모든 감각이 이완된다.

 

소설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는 작가가 꿈꾸는 화학적 공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공간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린 책이다. 서점을 매개로 등장인물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개개인의 삶에 담긴 마음의 공간이 변화하면서 그들 사이의 관계로 채워지는 공간을 완성한다.

일에 지친 주인공 영주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휴남동 서점을 만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무언가에 지친 사람들이다. 사람에 지치고, 관계에 지치고, 사회에 지치고, 삶에 지쳐있다. 이들은 말없이 기다려주고 지켜봐 주면서 마주 선 존재 그대로를 긍정해준다. 작가는 이들 사이의 대화와 심리변화를 통해 일과 글과 삶의 본질에 접근한다.

좋은 책에 대한 소설 속 정의가 마음에 남는다. ‘삶을 이해한 작가가 쓴 책, 작가의 깊은 이해가 독자의 마음을 건드린다면, 그 건드림이 독자가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좋은 책이라고. 작가가 엄청난 내공으로 삶을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느 누가 삶의 모든 면모를 이해하겠는가. 100년 가까이 오랜 시간을 걸어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흘러가는 광대한 우주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이 책은 좋은 책이라고 말하려 한다. 적어도 글쓰기와 일하기와 인간관계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여 애틋하기까지 한 작가의 마음이 묻어나오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나의 심장을 뛰게 하였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을 때면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다른 세계로 여행을 온 것 같아 마냥 신이 난다는, 자신만의 정서에서 벗어나 타인의 정서에 다가가게 해줘서 소설이 좋다는 주인공을 보며, 소설의 매력을 생각한다. 예전의 나는 소설이란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현실감이 없어서, 잡을 수 없는 허상을 향해 시선을 준다는 점에서 거부감이 있었다.

소설은 허구다. 한데 소설이 그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때를 종종 만났다. 소설 속 이야기가 다가와 내 삶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경우이다. 그 순간 종이에 새겨져 있던 평면적인 문장은 생명력을 얻는다. 꿈틀거리는 현실이 되어 나를 통해 살아난다. 소설을 현실로 구현하는 건 이런 면에서 독자에게 달려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관점이 서서히 달라졌다.

이야기 속 이야기.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책 안에 담긴 책들에 대한 소개가 자연스레 소설 속 등장인물의 서사와 연결되어서 좋았다. 소설과 책 소개.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기분이다. 점점 이야기가 좋아진다. 결국 세상은 이야기로 가득한 게 아닐까. 나의 이야기이거나 당신의 이야기이거나 혹은 나와 당신의 사이에 있는 이야기이거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아이러니한 건 그러면서도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좋아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색채가 자신과 얼마나 닮아있는가에 따라 저마다 공명하는 걸까.

 

거울 보듯 나를 자꾸 들여다보게 하는 책이다. 나의 일과 나의 글, 주변인들과의 관계, 현재와 미래를 자꾸 들여다보게 되었다. 즐겨보던 프로그램이 끝나면 마음이 리셋되는 것 같다는 주인공의 생각에서 내가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를 발견한다. 계속 삶을 리셋하고 싶은 욕구가 표출된 걸까.

스펙을 쌓는 과정을 단추에 비유한 내용에 마음이 아프다. 단추는 있는데 끼울 구멍이 없다는 말에 깊은 공감이 가 고개를 끄덕인다. 포기를 한 것이 아니라 그 길을 벗어나겠다는 선택을 한 것 뿐이라는 말이 멋지다. 무기력이 느껴지지 않아서, 주체적인 삶을 향한 굳은 심지가 보여서이다.

통제 가능한 시간 안에서만 과거, 현재, 미래를 따질 것, 지금 이 순간에 완전히 존재할 것, 누군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사는 삶보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사는 게 더 맞다는 내용에서 힘을 얻는다. 짐이 무거우면 잠시 내려놓거나 덜어내면 된다. 감당할 만큼의 짐만 들고 걸어가면 되는 거다. 감당하지 못할 짐을 아등바등 움켜쥐고 있는 건 욕심이 아닐까.

희망을 얘기하는 작가의 시선이 좋다. 단춧구멍이 없는 옷에 대한 해답을 이렇게 제시할 줄 몰랐다. ‘옷을 바꿔 입었지. 그런데 그 옷에는 구멍이 먼저 뚫려 있더라. 구멍에 맞게 단추를 만들었더니 잘 꿰졌어.’ 순간 코끝이 찡했다. 모두가 같은 옷을 입거나 똑같은 단추를 지니고 있을 필요는 없다. 나에게 이쁜 단추를 나만의 스타일로 달고 다니면 그만이다.

 

마음이 가까워지는 과정을 이리도 담백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야하지 않으면서 설레는 느낌이 뭉클하다. 두 주인공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부드럽게 다가온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무의식은 본능적으로 내게 좋은 기와 안 좋은 기를 구별한다고 한다. 간혹 까닭 모를 느낌이 오가는 걸 보면 맞을 때도 있는 듯하다.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둘 사이에는 바람이 흐른다. 마음의 결이 일치하면 투명한 흐름이 만들어져 기분 좋게 출렁인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삶에는 마법이 걸린다. 넘기 어렵던 산이 후 불면 날아가는 먼지처럼 순식간에 쪼그라든다. 향긋한 비눗방울 안에 들어간 듯 둥둥 마음이 가벼워진다.

책 읽는 것 같아요. 지금 이 시간이요. 우리가 책 속을 걷는 거 같아요.” 출장 후 잠시 들른 초록의 산책길에서 함께 걷던 동료가 봄 햇살을 닮은 표정으로 말한다. 좋은 사람이 주변에 많은 삶이 성공한 삶이라는 책 속의 문장이 고리처럼 연결된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 나의 에너지와 공명을 일으켜 삶의 불꽃을 활기차게 되살려주는 사람,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따스하게 데워주는 사람. 좋은 사람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상상만 해도 행복감을 준다. 열심히 살고 싶다. 그런 사람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집 안에 있는 물건의 70%가 불필요한 물건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요즘 나는 정리 삼매경에 빠져있다. 아름다운 쓰레기를 조금씩 정리하는 중이다. 지금은 쓰지 않지만, 내일도 쓰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쓸 것 같아 자리를 차지하던 물건이 의외로 많다. 지금 쓰지 않고 내일도 쓰지 않을 거면, 그 언젠가도 쓰지 않으리라는 걸 깨닫는다.

잘 산다는 건 잘 정리하면서 사는 거라는 걸. 두려워서, 눈치 보여서, 후회할까 봐 정리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아.’ 소설 속 대화를 떠올리며 물건을 정리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 속성이 있는 듯하다. 사람이 물건은 아니지만, 전화번호 주소록을 정리하면서 비슷한 속성을 본다.

오늘 연락하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연락할 것 같아 남겨두었던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삭제했다. 오늘 연락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내일은 연락하고 싶을까. 아마도 나의 삶은 전화번호를 삭제하기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으리라. 한결 가뿐해진다.

가족과 함께 할 때 불행하다면, 한 번 가족이라고 해서 계속 가족일 필요는 없다는 문장이 후련하다. 삐걱거리는 가족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의무감과 사회적인 시선에 묶여 스트레스를 받던 지인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러므로 지금 할 일은 오늘 연락하고 싶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을 무심코 흘려보내지 않는 것.

 

해를 바라보며 퇴근하는 것이 소원이던 나날이 있었다. 주섬주섬 퇴근 후까지 일이 이어지던 시절이다. 꾸역꾸역 모여들던 일에 질식해버릴 듯했다. 일에 깔려 소진되는 듯하여 종종 절망감을 느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일을 그리 열심히 했던 걸까.

나만 힘들면 된다는 생각이 잘못이었다. ‘일하는 재미는 적당한 일의 양에 달려있다는 것, 일이 사람을 소진시키면 안된다는 것, 남을 위해 일하는 순간에도 나 자신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 ‘일은 밥 같은 거였어요. 매일 먹는 밥. 이제 소박한 밥을 정성스레 먹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를 위해서요.’ 누구보다 힘들면 안 되는 대상의 1순위, 의미 있는 일의 기준점은 나여야만 했다.

퇴근 후의 시간으로 하루의 무게중심을 바꾼 지 얼마 되지 않는다. 나의 낮은 밤을 위해 존재한다. 집에까지 일을 가져오고 일이 남으면 잠이 오지 않았건만. 요즘은 퇴근 후에는 학교 일을 내려놓으려고 노력한다. 처음에는 어색하더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만의 시간이 좋아서,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아서 낮의 시간은 견딜 만한 것이 되었다.

만조는 하루 중에서 해수면이 가장 높아지는 때이다. 나의 만조는 퇴근 후 커피숍에 앉아있는 시간이다. 하루 중 이 시간만 확보하면 그런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라는 문장에 맞장구를 친다. 온전히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라는 말에도 공감하며.

 

자주 가는 커피숍의 아르바이트생으로부터 쪽지와 두부 과자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 나의 모습을 보고 많은 걸 배웠다고, 나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멋있으시다고. 그저 나를 위한 시간을 보냈을 뿐인데, 퇴근 후 이른 저녁을 먹고 나와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시를 쓰고 교재 연구를 했을 뿐인데.

나의 행동과 일상이 누군가에게 바라볼 수 있는 무언가를 줄 수도 있다니 기분이 묘했다. 비언어의 효과는 언어보다 영향이 크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직한 파도로 직진해선 바라보는 사람의 심장에 닿는 듯하다.

어떤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결국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는 문장에 공감한다. 나에게 쪽지를 건네었던 학생도 결국 나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 삶을 들여다본 셈이 아닌가. 서로 다른 종교라도 최상의 경지에서는 하나로 이어지는 것처럼,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에 대해서도 비슷한 속성이 적용되나. 계속 대상을 향해 걸어가다 마주치게 되는 사람은 자기 자신, 한 사람이니까.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음악을 하든, 예술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도 나를 바라보기 위함이 아닐까.

책 속에 나오는 꽤 많은 문장을 따라 적었다. 등장인물을 통해 작가가 독자에게 하는 말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옮겨 적은 글씨를 바라보며 다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책은 기억이 아니라 몸에 남는다던가. 나의 몸 어딘가에 남아있을 문장이 마음의 외투가 된 듯 든든하다.

 

문장은 글로 만든 화살이다. 다른 이의 심장을 향하는 화살은 정확한 과녁을 가리켰을 때 비로소 시위가 당겨져 날아간다. 그리곤 찌르르 심장을 울린다. 이 책의 많은 문장이 나에게 그러했듯이. 내 생각과 같은 문장을 여러 번 마주쳤을 때 뜻이 맞는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작가님과 작가님의 글은 얼마나 닮았나요?’ 문장을 보는 순간 찔끔한다. 나의 글은 얼마나 나와 싱크로율을 보이는가. ‘작가의 목소리라는 여섯 글자도 며칠 동안 마음 언저리를 맴돈다. 좋은 문장이 목소리를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는 문장에 공감한다. 나의 글에는 나의 목소리가 담겼는가. 다른 이의 목소리를 따라 하는 재미없는 앵무새가 되는 순간은 없는가. 매 순간 경계하며 문장을 쓰리라 다시금 마음을 다진다.

주인공 영주는 유럽의 독립서점을 둘러보고 와서 책방의 정체성을 정립한다. 모든 책방이 개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개성은 책방을 운영하는 주인에게서 나온다는 점, 개성을 만드는 데 필요한 건 용기라는 점, 주인의 용기가 손님에게 가닿기 위해 필요한 건 진심이라는 점.

글에도 적용해본다. 글에도 자신만의 색채가 필요하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색채를 만드는 건 진심을 담은 올곧은 용기이리라. 이런 문장을 만들고 싶다. 나만이 쓸 수 있는 창조적인 글을 이 세상에 꺼내 보이고 싶다. 나의 문장을 주도적으로 끌고 나가는 모습을 상상하니 설렌다.

 

대형 유명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이면 서툰 문장이어도 실제보다 괜찮은 책으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은 정반대에 속한다. 발행인과 편집자가 동일인이다. 독립서점인 휴남동 서점처럼 독립출판사 느낌이다. 추천 글도 없고 이 출판사에서 출간한 다른 책 광고도 없다. 이런 유형의 책이 좋다. 겉표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온전하게 작가의 문장으로만 채워진 책 말이다.

읽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에 살짝 소름이 돋는다. 보고 싶은 문장들이 눈앞에 마술 글씨처럼 나타나서 이리도 공감이 갔던가. 나도 내가 읽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출발선에서 대기하는 달리기 선수처럼 가슴이 뛰었다.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물음에 결론을 내지 못했던 답을 발견한다. 진심을 담아 쓴 글이 누군가의 심장을 울린다면 그게 바로 작가라는 것을. ‘솔직하고 정성스럽게’. 제대로 잘 쓴 글을 정의하는 황보름 작가를 보며 글을 쓰는 마음을 정돈한다.

산들바람 부는 대청마루에 앉아 담백하고도 정성스레 차린 밥상을 받은 기분이다. 상추, 풋고추, 된장찌개, 쌈장, 오이와 밥공기에 묻은 밥풀까지 긁어먹은 다음 누룽지에 숭늉까지 마신 듯 개운하다. 작가가 만든 공간을 지나오니 멋진 화살을 만들고 싶어진다. 나만의 문장으로 만든 화살을 들고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공간을 둘러보는 상상을 한다. 홀가분하면서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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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림의 미술관에서 읽은 시 - 작가의 젊은 날을 사로잡은 그림 하나, 시 하나
신현림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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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예술분야를 아우른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한 가지로도 일품요리로서 충분하지만, 어울리는 두 장르는 밥과 반찬인 듯 조화롭다. 예술이라는 장르의 경계를 생각한다. 그림과 시는 분명 다른 장르이지만 표현 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는 차이가 없는 지도 모른다. 색과 색의 경계선을 구분 지을 수 없도록 채색한 스푸마토 기법의 <모나리자>처럼 내면세계를 그린다는 시각에서 보면 경계가 허물어진다.

작은 박물관 하나를 통째로 선물 받은 느낌이라는 이해인 수녀, 한 편 한 편의 글들이 주파수를 제대로 맞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처럼 한 점 잡음 없이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는 황인숙 시인, 미술은 말이 그친 자리에서 피어난다는 박영택 미술평론가의 추천 글을 보니 마음속에 설렘이 피어난다. 작가의 세계관을 알고 싶어 인터넷을 검색한다. 자신이든 남을 위해서든 영혼의 쓸모 때문에 시를 쓰는 거라는 생각에 공감하며 이제부터 읽을 책의 분위기를 상상한다.

우리들은 무언가와 이어지기를 바라며 그 이어짐이 사람과 사람일 때 더없이 따스하다는 서문의 문장이 모닥불처럼 온기를 준다. 명화와 시 속에서 깊고 뜨겁게 숨쉬기를 바란다는 그녀의 의도대로 책 장의 징검다리를 그런 호흡으로 건널 수 있을까.

 

신현림의 미술관에서 읽은 시는 그림과 시의 콜라보이다. 작가의 젊은 시절을 데워주었던 그림과 시를 연결한 에세이다. 책의 제목처럼 주 무대는 다섯 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진 미술관이다. , 절망, 사랑, 고독, 위로 등 다섯 가지 주제에는 정서의 색채별로 나열된 그림과 시가 매칭 된다.

수록된 시의 종류는 다양하다. 화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감성과 연장선상에 놓이는 듯 시가 연결되기도 하고, 동 제목의 시가 놓이기도 한다. 그림과 시를 양팔저울에 놓고 질량을 잰다면 그림 쪽으로 중심이 기운다. 시는 그림이 등장하는 순간에 흐르는 BGM 효과를 낸 달까. 작가가 고흐와 브뢰헬의 작품을 좋아하는지 이 두 화가의 작품은 두 점씩 수록되어 있다. 그림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사소한 요소에도 드러난다. 화가에 대해서는 출생과 사망이 표기되어있지만, 시인에 대해서는 푸시킨과 도연명을 제외하고는 이름만 실려 있다.

한적한 시골에 자그마한 미술관을 짓고 수집한 그림을 전시한 큐레이터가 우연히 들른 나그네에게 소장품을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장면을 상상한다. 지극히 주관적인 책이다. 한 작품 한 작품을 지날 때마다 작가가 계속 말을 거는 듯하다. 나는 이런 느낌을 받았는데 당신은 어떤가요? 나는 이 작품에서 슬픔을 보았는데 당신에게도 그게 보이나요? 하고.

 

노랑, 분홍, 카키, 스카이블루, 보라색. 각 장을 시작하는 페이지의 색깔이다. 간지처럼 끼워진 색깔의 장을 다섯 손가락에 끼워 한꺼번에 바라본다. 조화를 이루는 파스텔 톤의 무지개가 떠올라 마음이 안정된다.

그림 한 쪽, 시 한 쪽에 더해진 짤막한 해설은 대부분 한 쪽을 넘지 않는다. 그림과 시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라 판단한다. 작가는 그림과 시를 연결 짓는 것으로 8할의 역할을 한다. 예술이 뿜어내는 향기를 호흡하는 건 독자의 몫이다. 때문에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기 전에 한 호흡을 멈추게 된다. 여운을 음미하며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게 만들어준다. 한 점의 작품에 네 쪽씩 할당된 느낌이랄까. 그림--작가-독자의 연결고리가 자연스레 만들어진다.

김정희의 <세한도>에 숙연해지는 신경림 시인의 <다시 느티나무가>가 연결되며 누구나 인생의 세한도가 하나쯤은 있을 거라는 작가의 멘트가 이어진다. 그저 버틸 수밖에 없는 날들, 춥고 곤궁한 날들을 언급하는 말에 대학교 2학년 즈음의 장면이 불쑥 떠오른다. 식당 서빙을 하다 쓰러져 주방의 뒷방에 누워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담긴 날이다. 그때가 50대 어머니의 세한도가 아니었을까. 나의 세한도는? 그저 버틸 수밖에 없었던 30대 정도였던 듯하다.

 

칸딘스키의 <푸른 하늘>과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앞에서 오래 서성인다. ‘마음은 미래에 살고 /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이라는 문장이 따스하다. 그림에 담겨 꿈틀거리는 대상에게서 자유로운 생명체가 연상된다. 마음이 산뜻해진다. 언젠가는 날아오를 수 있다며 토닥토닥 부드러운 깃털 같은 위로를 준다. 드넓은 하늘의 색채와 어우러지면서 풍선처럼 둥둥 미래의 행복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 편안해진다.

아무도 걸어가 본 적 없는 / 그런 길은 없다 // 나의 어두운 시절이 / 닮은 여행을 하는 / 모든 사랑하는 이들에게 / 도움 될 수 있기를’. 나의 글이 시의 문장과 같기를 바라며 베드로시안의 <그런 길은 없다>에 나오는 문장에서 위안을 받는다.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볼 때마다 설렌다.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 내 가슴에 쿵쾅거린다 /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 (중략) /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 너였다가 /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 (중략)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언제 이토록 두근거리는 시를 쓸 수 있을까. 넘사벽의 시 앞에서 잠시 부러워한다.

 

몬드리안의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을 보는 순간 마음이 정갈해진다. 산다는 건 번잡한 물건들, 온갖 감정의 피로를 하나하나 정리하는 단순함에 그 본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해설에 공감한다. 요즘 물건을 하나둘씩 정리 중이다. 미련이 묻은 아름다운 쓰레기를 간택할수록 속이 시원해진다. 몸과 마음이 별개가 아니듯 감정도 마찬가지인가. 단순함에 깃든 아름다움에 매력을 느낀다. 과학자들도 이런 심정으로 자연현상을 공통적으로 아우르는 규칙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거겠지.

골비츠의 그림 <죽은 아들을 껴안고 있는 어머니>는 보는 순간 전율이 인다. 흑백의 선들이 꿈틀거리면서 어머니의 절망을 뿜어낸다. 선의 음영만으로 이리도 절절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니! 파울클레의 그림 <황금물고기>는 빛나는 햇살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하다. 고흐의 붓 터치가 좋다. <자고새가 있는 밀밭><별이 빛나는 밤>.

클림트의 <키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다. 실용성을 추구하는 내가 거의 유일하게 감상의 목적으로만 곁에 두는 아이템이다. 모든 날들이 좋았던 도깨비님처럼 그림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그저 좋다. 지인들에게 어필한 결과, 꽂지도 않는 머리핀, 쿠션, A4용지만한 종이액자그림, 2단 우산, 3단 우산, 머그컵을 선물 받아 소장중이다. 아이돌 굿즈를 모으는 심정이 이와 비슷할라나.

 

깊고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시처럼 읽히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그림인 듯 생생한 풍경을 펼쳐 보여주는 시도 있었다. 화가와 연결되며, 시인과 연결되며, 작가와 연결되며, 때로는 과거의 나와 연결되며 따스한 시간을 호흡했다. 보이지 않는 영혼의 흔들림을 시각화한다는 점에서 모든 예술은 자체로 경이로움이다. ‘어떤 시는 / 우주만큼 / 크다 // 어떤 / 그림은 / 연인만큼 / 다정하다는 뒤표지의 문구처럼 예술작품 너머의 마음들과 연결되다보니 한동안 잊고 있던 나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림들을 보니 사진과의 차이점이 보인다. 사진도 빛과 구도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는 장르이지만 그림은 내면세계를 보다 역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도구인 듯하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을 연결하고 때로는 영혼의 안팎을 한꺼번에 겹치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새로운 풍경을 보면 상쾌한 공기가 스며들어와 숨을 한껏 들이마시게 된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가슴이 답답하다는 건 고인 물처럼 꼼짝없이 마음이 정체될 때 그렇다. 차라리 한껏 흔들리고 나면 의외로 쉽게 정리될 때가 있다는 작가의 생각에 공감한다. 예술작품을 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 새로운 그림이나 글이나 음악은 가슴을 향해 이색적인 숨결을 불어넣어주니까. 예술작품은 그렇게 한껏 우리를 흔들어놓으며 영혼을 데워주는 게 아닐까.

 

 

p58 그림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의 색채: 보라색파란색

p15, p182의 작가 이름: 쿠스타프 클림트구스타프~

p269 1: 산모통이산모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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