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이벤트 일공일삼 62
유은실 지음, 강경수 그림 / 비룡소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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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까지만 해도 장례식장은 매우 어색한 공간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검은 옷을 입고 가서는 뻣뻣한 표정으로 동료들과 밥을 먹었다. ! 밥 맛있다 생각이 들어도 드러내지 못하고, 웃긴 순간이 있어도 근엄한 그 곳에서는 애써 무표정을 고수해야만 했다.

장례식장에서 먹는 밥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고인이 마지막으로 대접하는 만찬이라는 말을 들었다. 어색함이 줄어든 건 그 때부터였을까. 출근했다 갑자기 문상 갈 일이 생겨도, 입던 옷 그대로 입고 가도 주눅 들지 않았다. 영정 사진을 바라보며 사진 속 주인공의 삶과 죽음을 생각했고 편안한 마음으로 육개장에 밥을 말아 먹었다. 번개처럼 찾아오는 갑작스런 죽음은 먹먹한 애통함이겠지만, 대다수의 유족들은 준비된 죽음 앞에서 담담했다.

 

할아버지의 죽음과 장례식장의 풍경을 손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동화이다. 장례식을 인생 졸업식장에서 벌이는 이벤트로 여기는 할아버지는 곳곳에 유머를 담아 마지막을 준비해놓는다. 그 장면 안으로 들어간 손자는 <벌거벗은 임금님>에 나오는 아이처럼 이벤트의 과정을 직설적으로 묘사한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적나라한 서술은 종종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지난 6월 과학 뉴스를 통해 보았던, 포항에서 발견되었다는 이족류가 떠오른다. 해파리처럼 속이 훤하게 비쳐 막 잡아먹어 배 안에 들어있는 물고기까지 보이던. 투명하고 편견 없는 시선으로 바라본 죽음은 삶의 나이테에 마지막으로 생기는 굵은 테두리인양 자연스럽다. 애써 포장하려하지만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위선은 아이 앞에서 여지없이 속살을 드러낸다.

 

죽은 사람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장례식장이야 수도 없이 갔지만 조의금 내고 동료들과 밥을 먹고 오면 그만이었다. 젊다고 할 수 없는 나이이지만, 고인의 모습을 직접 볼 정도로 가까운 이들의 죽음이 없었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늙음으로부터 자연스레 찾아오는 쇠약함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양가 부모님은 비교적 정정하시니. 형제자매나 절친들도 별 탈 없이 지낸다. 몇몇 돌아가신 친척도 멀리 해외에 계셨거나 그리 가까운 촌수는 아니었다.

허무가 하루의 대부분을 안개처럼 감싸던 시기가 있었다. 길을 걷다가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안고 다녔다. 갑작스런 죽음이 다가온다 해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잡고 싶은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 어제처럼 이어지던 시간들을 그저 견뎌야할 때, 삶에 대한 미련은 사라진다. 내게 죽음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마침표일 뿐이었다.

막연한 두려움은 있었다. 어릴 때에는 시체라는 말이 그렇게 무서웠다. 단 두 글자가 뿜어내는 음습함은 매번 나를 압도하며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어른이 되면서 언어로부터 벗어나기는 했지만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주춤거림은 한구석에 항상 있었다.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순간이라니! 늘 보던 얼굴을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무게감일까.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가 조금의 가능성조차 없이 이어지지 못한다는 건. 낭떠러지 앞에 갑자기 서게 된 듯 철렁한 느낌일까.

 

몇 번을 읽어도 눈이 따갑다. 같은 영화를 다시 본다면 두 번째는 감동이 살짝 사그라지기 마련인데, 매번 목 메이게 하는 미스터리한 동화다. 할아버지가 오줌을 싸 게 되는 장면, 손자와의 마지막 밤에 펼쳐지던 대화 장면 앞에서 나는 과속방지턱에 걸린다. 다음에 펼쳐질 전개를 훤히 알면서도 그 부분을 읽을 때마다 물마시다 사례 들린 사람처럼 되고 만다.

할아버지의 검버섯에서 토끼와 은하수를 발견하는 시선이 따뜻하다.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털 난다던데, 코끝 찡하게 눈물이 고이다가도 큭큭 대며 웃게 되는 이야기이다. 죽음을 다루는 동화가 이토록 유머러스하고 따뜻할 수 있을까. 보들보들하고 은은한 온기가 느껴지는 밀가루 반죽 한 덩이를 어루만지는 기분이다. 맑고 화창한 날, 바깥에 널어 바싹 마른 빨래를 만지는 느낌이다. ‘죽음하면 연상되는 질척함은 없다. 아이들이 처음으로 접하는 죽음의 이미지가 이랬으면 좋겠다.

 

당신의 죽음을 위해 유쾌한 이벤트를 준비하신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죽음의 순간을 새롭게 상상한다. 어쩌면 생각만큼 두려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가까운 사람들 혹은 나의 죽음이 이벤트와 같았으면 좋겠다. 갑자기 찾아오지 말고, 삶과 관계에 대한 미련도 남지 않기를, 그런 행운을 간절히 바란다. 마지막 이벤트의 장소가 남아있는 이들에게 고인을 편안히 추억할 수 있는 장소가 될 수 있다면, 그 삶은 완벽한 해피엔딩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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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고 밝은 곳 쏜살 문고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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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이 가늠되지 않는 싱크 홀에 빠져드는 꿈을 꾸다 깨어난 느낌. 질척이고 후텁지근한 공기가 피부에 들러붙는 것 같은 여운에 속이 울렁거린다. 글에서 맡아지는 익숙하지 않은 냄새, 이런 기분 별로다.

학창시절, 유일하게 읽었던 노인과 바다도 비슷한 분위기였다. 푸르고 화창한 바다가 아니라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잿빛 바다의 모습이 어쩐지 인간 삶의 모습과 중첩된다고 생각했었다. 사투를 벌이며 겨우 잡은 청새치가 해안에 이르러서는 뼈다귀만 남는다는 귀결은 허무의 극치를 달렸지. 그 거대한 물고기와 직접 대면했던 오직 한 사람, 자신만이 기억하는 성취라니!

 

<깨끗하고 밝은 곳>,<살인자들>,<병사의 집>,<킬리만자로의 눈>,<프랜시스 매코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 이 책에 수록된 다섯 편의 단편도 별반 다르지 않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단어는 죽음과 허무, 두 가지이다. 깨끗하고 밝은 곳이라는 표제작의 제목은 차라리 모순에 가깝다. 책 표지에 훤한 달덩이도 떠있고 제목도 밝아서 가볍게 읽으려고 집어든 책이었건만. 나는 거대한 빙산에 갑자기 부딪혀버린 타이타닉호가 되었다.

 

1차 시도. 뭐 이런 책이 있나 싶었다. 당최 뭔 말을 하려는 지도 모르겠고, 이국적인 정서라고 치부하기에는 마음에 남은 것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실질적인 내용이 수록된 분량만을 따지면 다섯 편을 모조리 합쳐도 130여 쪽이나 될까. 이 작은 책에 매달린 메시지가 어찌나 무겁고 오리무중이던지. 작은 몸집으로 어마 무시한 초강력 자기력을 자랑하는 네오디뮴 자석이 따로 없다.

 

2차 시도. 두 번째는 오기로 읽었다. 베스트셀러라고 다 나에게 좋은 것은 아니며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람의 작품이 매번 엄청나게 좋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헤밍웨이앞에서 이리도 허무하게 무너질 수는 없다.

 

3차 시도. 세 번을 읽고 나서야 희미하게나마 작가의 감성을 따라잡는다. 이조차도 제대로 이해했는지 자신은 없지만. 이리도 강한 이질감이 느껴졌던 것은 작가의 서술 관점 때문이 아닐까 싶다. 흔히 밝은 곳을 말할 때에는 밝은 곳에 서서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마련이다. 내가 본 작가는 어둠을 적나라하게 묘사함으로써 밝음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사람이다. 이토록 질척이는 곳에 있으니, ! 빛이 그립지? 뭐 이런. 여백의 미로 풍경을 강조하는 수묵화처럼,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말한다. 허무를 그려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니게 되는 무언가를 표출하려한다. ‘모든 것이 오직 허무뿐, 필요한 것은 밝은 불빛과 어떤 종류의 깨끗함과 질서야.(p15,<깨끗하고 밝은 곳>) 마구 흐트러뜨린 퍼즐 속에서 질서를 찾아낼 테면 찾아보라며 툭 던져놓는 듯한, 이런 면에서 헤밍웨이는 불친절한 작가다.

 

다섯 편의 작품 중에서는 <킬리만자로의 눈>이 가장 마음에 남는다. 작가로서의 재능에 대해 언급한 문장들이 시선을 붙든다.

그는 확실히 파악한 뒤 훌륭하게 쓰고 싶은 생각에 안 쓰고 아껴 두었던 작품들을 이제는 영원히 쓰지 못할 것이다.(p51)’예상치 못한 죽음을 앞둔 주인공을 묘사한 글이다. 글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겪게 되는 많은 관계나 어떤 종류의 시도도 마찬가지일터이다. 가장 적절한 타이밍은 지금이다. 다음은 없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불완전하고도 불안정한 삶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으므로 무엇이든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미련한 행동일지 모른다.

그의 재능이란 그가 단 한 번이라도 실제로 성취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하면 이룰 수 있다는, 잠재적 가능성이었다.(p62)’물리학 용어 중에 위치에너지( potential energy)가 있다. 기준점으로부터 일정 높이에 있는 물체가 지닌 에너지이다. 이 에너지는 물체가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순간을 시작으로 언제라도 위력을 발휘할 수 있으니, 잠재적인 에너지라는 의미를 가진다. 여기에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포텐은 터져야 발휘된다는 점이다. 가능성만 지닌 채 평생 공중에 매달려있는 물체는 결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무능력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깨끗하고 밝은 곳>에서 모든 것이 오직 허무뿐이라는 나이 많은 웨이터도,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방안에서 기다리는 <살인자들>속의 올레 안드레슨도, <병사의 집>에서 삶은 어느 것 하나 감동을 주지 않았다는 크레브스도,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얘기할 만한 진실이 별로 없었다는 해리도,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에서 섬광처럼 스쳐간 기쁨 끝에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는 매코머도, 나는 그들의 깊이와 정서를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하겠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런 삶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할 뿐이다.

우울증, 알코올 중독증에 시달리다 63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엽총으로 삶을 마감했다는 헤밍웨이. 그의 마지막이 어떠했을지, 마지막으로 어떤 생각을 했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글을 쓴다는 것은 최상의 경우일지라도 고독한 삶입니다.(p6)’라며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밝힌 것처럼 그가 많이 고독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진정한 작가에게 작품 한 편 한 편은 성취감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을 이루기 위해 다시 시도하는 새로운 시작이여야 합니다.(p6)’작가 헤밍웨이의 성취감 너머에 있던 그 무엇은 무엇이었을까. 그 무엇이 이루어졌기에 그는 새로운 시작을 스스로 마감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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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6 0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비종 2017-07-26 09:20   좋아요 1 | URL
허무를 배경으로 중간 중간 순간적으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있어 느리게 이어져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해요. 그 반짝이는 것을 그런 방식으로 더 가치있는 의미로 가져다주는 걸까요?
대부분 외롭고 쓸쓸하고, 그런 시간들로 숨이 막힐 것 같으면 그제서야 쉼표 하나씩 던져주는ㅎㅎ

윤평 2017-07-29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읽으셨군요! 제 리뷰에 댓글 달아주신 걸 보고 한 번 들렀습니다.

글 후반부에 ˝나는 그들의 깊이와 정서를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하겠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런 삶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할 뿐이다.˝라고 쓰셨지요. 조심스럽게 제 생각을 말씀 드리자면, 이미 충분히 좋은 독서를 해주신 것 같습니다. 문학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타인을 완벽히 이해할 순 없어도, 타인의 삶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모르던 삶의 단면을 긍정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독서는 너무나 멋진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작품을 읽고 이렇게 짧지 않은 감상을 남겨주시다니요. 헤밍웨이도 감사해할 것 같네요ㅎㅎ 종종 들러 구경하겠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나비종 2017-07-30 09:23   좋아요 0 | URL
어떤 면에서는 간접체험인 독서가 인간 내면의 심리나 삶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하더군요. 글을 쓰는 것 역시 작가의 손끝에서 문장이 흘러나오는 순간, 제3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거라고도 하구요. 그러고보면 문학이란 글을 매개로 하는 매우 냉철한 예술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 서늘하지도

뜨겁지도 않겠지

생명을 품고 있는

따뜻한 물은

엄마로 둘러싸인

사랑의 물은

 

어야 둥둥

자장가가 울리면

킁킁 킁킁

엄마 냄새 맡으며

포근한 물이 묻은

손가락을 빨겠지

 

갓 태어난 아가가

울음을 터뜨리는 건

온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던 촉감

엄마의 물이

그리워져서일거야

 

토닥토닥 우리 아가

금세 방긋 웃는 건

구석구석 흠뻑 배인

엄마의 물이

토옥토옥 한 방울씩

터뜨려져서일거야

 

 

* 2017. 7. 15. I백일장(시제: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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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 꽃피우기 위해 애를 쓴다
정목 지음 / 꿈꾸는서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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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엉엉 울고 싶다. 큰소리로 실컷 울어본 지가 언제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 어느 순간부터 종종 찾아들던 생각. 어른이라는 테두리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하는 울음이 때론 답답하고 서글프다.

위로받고 싶다는 생각이 스며들던 무렵 내게로 찾아온 책이다. 꽃도 꽃피우기 위해 애를 쓴다. 기다란 제목을 곱씹어보다 애를 쓴다는 대목에서 울컥한다. 안간힘을 다해 햇살을 향해 다가가려는 내게 너도 애 쓴다며 위로하고 있는 것 같아서이다. 브로콜리처럼 생긴 겉표지의 나무 그림을 한참 바라본다. 브로콜리는 초록의 봉오리 하나하나가 꽃 한 송이라는 말을 듣고 경이롭게 쳐다보던 기억이 난다. 안쪽 표지의 정목 스님 사진도 시선을 붙든다. 단아하고 정갈한 옷도 그렇고 마주 앉은 대상을 응시하는 가만가만한 시선에 덩달아 마음이 차분해진다.

 

오늘을 숨 쉬는 삶과 관계와 죽음과 쉼과 위로에 관한 산문집이다. 여러 책들에서 조금씩 나왔음직한 비슷한 생각들이 담겨있지만, 스님의 글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움은 느림의 미학이다. 스님의 호흡을 따라가며 어두운 구석에 고여 있던 감정의 찌꺼기를 조금씩 털어낸다. ‘따라쟁이라도 된 것처럼 스님의 문장을 따라 내 삶의 시계를 천천히 맞춰본다.

생은 간결할수록 아름답습니다.(p14)’란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며 널브러져있던 주변의 물건들을 정리한다. 관계도 마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한다.

요즘은 어느 순간부터 의식적으로 숨을 깊게 쉰다. ‘부드러운 호흡으로 지그시 숨결을 응시해보십시오.(p50)’란 문장을 만난 이후이다. ‘숨결, 숨결.’ 숨결이란 말을 처음 보는 것처럼 조심스레 들이마신다. 숨에도 결이 있다는 의미가 새삼스럽다. 숨의 결을 음미하듯이 천천히 숨을 내쉰다. 그렇게 숨을 쉬며 주변을 천천히 바라보니 무엇이든 그 본질에 좀 더 가까이 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저 그 일이 일어났을 뿐입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은 어떤 조건에 의해 일어났다가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일 뿐, 그 조건을 낱낱이 설명하거나 알 수는 없습니다.(p67)’ 마음을 힘들게 했던 일들이 하나 둘 들썩이다 조용히 내려앉는다. 마음을 토닥이는 문장에 잠시 눈앞이 흐릿해진다.

관계에서 범하기 쉬운 실수를 일깨우는 문장도 마음에 남는다. ‘그에 대해 아무것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는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보세요.(p120)’ 잠시 반성한다. 얼마나 많은 편견을 바탕에 깔고 상대를 바라보았던가. 그의 순수한 의도가 내게로 와서 얼마나 많이 왜곡되었던 걸까.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담담하다. <다비>에서 헌 옷 벗어 장작 위에 누울 때(p168)’라 말한 김재진 시인의 표현 앞에서 한참을 머문다. 노래 타타타에서 언급되는 달관의 경지를 넘어선다. 육체와 삶과 죽음을 통달하는 시각이다. 몇 번을 곱씹어도 숙연하다.

가슴속에 있는 사연을 누군가가 이렇게 들어주기만 해도 위로가 됩니다.(p254)’ 스님의 책을 읽고 있으니 내가 스님의 이야기를 듣는 셈인데, 나를 이해하는 듯 마음을 다독이는 문장을 곳곳에 만나다보면 내 얘기를 듣고 난 스님이 토닥토닥 위로해주는 것 같다. 나는 나를 들어줄 어떤 대상이 필요했던 걸까.

 

중간 중간에 삽입된 이일순의 본문 그림도 좋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쉼과 위로를 주제로 그림을 그린다는 설명을 보고 주제에 아주 걸 맞는 그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둥근 모양과 연두 빛 색채가 좋은 여행자(p35)’, 진청의 하늘빛과 기린과 떨어지는 별똥별이 좋은  초대(p127)’, 나무의 갈색 빛이 좋은 함께(p173)’, 청보라 빛 하늘과 북두칠성이 좋은 -마을(p259)’. 특히 마음에 드는 그림의 제목을 하나하나 연결해보고는 놀란다. 제목까지 취향저격이라니. 그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휴식이 되고 많은 위로가 되는 시간들이었다.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나무가 주는 이미지 때문일까.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조심스레 내뱉으며 오늘을 바라본다. 다시 한 번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따뜻해진 공기가 내 안으로 들어와 부드럽게 마음을 어루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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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3 2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비종 2017-07-26 09:20   좋아요 1 | URL
깊은 통찰력에 한동안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더군요. 시인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했구요.^^;

2017-07-23 2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4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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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계만큼 시간의 흐름을 착각하게 만드는 장치가 또 있을까. 주기적으로 돌고 도는 바늘을 한참 바라보면, 시간도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오후 427분이 24시간마다 완벽하게 다시 돌아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직선이 곡선으로 왜곡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시계를 떠올린다. 삶의 시계는 이야기 안에서 직선으로 뻗은 철길처럼 펼쳐진다.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기에 반복되거나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한 시간과 관계들. 제각기 다른 이야기들이지만 공통적으로 펼쳐지는 상실감은 바다를 연상시키는 책 표지처럼 깊다.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을 즐겨본다. 보다,말하다,읽다시리즈로 추상적으로만 접하던 작가. TV를 통해 실물을 보니 호기심이 생긴다. 일단 목소리가 좋다는 이유 하나면 충분하다. 드라마 <킬미힐미>가 생각난다. 이런 목소리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어떤 글을 쓸까. 그의 소설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을까.

 

책을 읽을 때는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는 편이다. 표지를 관찰하고, 표지 안쪽의 작가 소개를 꼼꼼하게 읽는다. 본문을 읽듯 차례를 읽고 마지막 표지 뒤편까지 한 장 한 장 눈자국을 찍는다. 이번에는 뒤에 실린 작가의 말부터 본다. 편집자의 의도대로 재배치된 순서대로 읽고 싶지 않다. 작가가 교정을 보며 다시 읽어보았다는 발표 순서대로 7편을 읽는다.

다 읽고 나서는 작가의 말을 다시 읽는다. 그 어떤 작가도 스스로 쓴 작품에 완벽하게 객관적일 수는 없겠지만, 자신의 글을 잘 분석하는 사람이다. 7편의 이야기는 상실이라는 기본 코드를 공통적으로 지닌 채 다양한 전개로 변주된다.

 

판타지적인 요소도, 추리 소설처럼 극적인 반전이 있는 요소가 곳곳에 펼쳐진다. 얼핏 황당한 이야기처럼 보이는데 은근히 다음이 궁금하다. 결말이 도무지 예측되지 않는다. 아버지가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표제작인 오직 두 사람에서는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가, 슈트에서는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한 후배가, 최은지와 박인수에서는 주인공 아버지의 죽음이 잠시나마 등장한다. 아이를 찾습니다에서도 아버지의 관점에서 실종되었다 찾은 아이와 아내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일부러 표현하지 않아도 절로 풍기는 고독의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아무와도 대화할 수 없는 언어가 모국어인 사람의 고독(p12, 오직 두 사람)’이 배어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은 어떤 말을 남에게 하고 살지요.(p38, 오직 두 사람)’ 소설이 다큐는 아니지만, 이 글들을 썼던 당시의 작가는 외로웠을 것 같다는 짐작을 감히 해본다.

 

묘하다. 마냥 슬픈 것도 아니고, 마냥 아픈 것도 아니고, 마냥 먹먹한 것도 아니고,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뒤엉켜서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아버지의 감정들이 그대로 내게 투영되어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이었다, 어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내 가족을 향했다, 언젠가 들었던 친구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옮겨간다. 내게 아직 남아있을 관계의 앙금들이 선명하게 다시 떠오른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새 그것이 일상이 되었다.(p65, 아이를 찾습니다)’는 문장이 무섭다. 꿈에서 깨어나서도 여전히 계속되는 상황을 겪는 신의 장난처럼 풀리지 않은 관계들이 화석처럼 굳어져 무감각한 일상이 되어 버릴까봐.

 

해피엔딩을 좋아한다. 드라마든 소설이든 열린 결말이나 비극으로 마무리되는 이야기 뒤에는 찜찜함이 따라온다. ‘그래서 그 둘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류의 동화 같은 끝맺음이 좋다. 밥을 먹고 나서 숭늉까지 마신 후의 개운함과 비슷한.

그런 걸 왜 좋아할까. 책을 덮고 나서 다시 한 번 내면을 들여다본다. 이미 알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 동화 같은 엔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애써 외면하고 싶던 건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향해 달려가고 싶은 안간힘이었음을.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p269, 작가의 말)’ 애써 가리고 있던 위선이 한 꺼풀 벗겨진 기분이다. 그래도 마음 한켠 위안이 되는 것은 이런 상실감을 깊이 느끼고 글로 표현한 사람이 세상 어딘가 있다는 사실이다.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겠지만, 조금은 덜 외롭게 견뎌내며 걸어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읽는 내내 먹먹하고 답답하고 뭉클했지만 해피엔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후련하다. 슬픔을 슬픔으로 위로해주는, 누군가와 함께 실컷 울고 난 후에 느껴지는 따뜻한 개운함이었을까.

 

 

*p40,6째줄: 실을 요전까지 쓰다~ → 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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