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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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점의 철가루 정도였겠지. 분명 무겁지만 아직은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 느낌이었을 거다. 글자 몇 개가 하얀 종이에 천천히 나열된다. 조각이 커져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면서 감정이 실린다. 무의미하던 파편들은 모일수록 점점 힘을 갖는다. 가슴 속에 머물던 기억이 끌려나오는 순간, 글은 자석이 된다. 그때부터는 내가 글을 끌고 가는 게 아니라 글이 나를 끌고 간다.

글을 쓸 때마다 종종 받는 느낌이다. 어떤 말을 할까 이 말을 먼저 꺼낼까 저 말은 쓰지 말까. 무수히 많은 망설임의 시간이 흐른다. 더듬더듬 문장들이 나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을 넘어서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인다. 글의 흐름이 잡히면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화면을 채운다. 마지막에 내가 하는 일은 의도한 이정표를 세우고 나만의 방식대로 방문 순서를 바꿀 뿐이다. 내가 만든 여행 일정에 참여하여 무엇을 보게 될 지는 온전히 글을 읽는 이의 몫이다.

사랑에서도 글을 쓰는 과정이나 자석과 비슷한 면이 존재한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한 감정이 점점 커지면서 의미를 갖는다. 이성으로는 도무지 제어가 안 되는 시기에는 감정의 자석에 이끌린다. 그러다 어떤 식으로든 이별의 순간을 맞는다. 사랑은 전류가 흐를 때만 자석이 되니 전자석 같은 속성을 지닌다. 이별 이후의 과정은 작품이 되지 못한 채 버려지는 글들과 같다. 힘을 잃은 자석이 평범한 철가루로 부스러질 수 있는 것처럼. 그 과정까지를 품고 의미 있는 글로 붙들어낸다면 비로소 사랑은 한 편의 작품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 남게 되리라.

 

한 사람을 사랑하는 전 과정은 산을 오르는 과정과 비슷한 속성을 지닌다. 소설 단순한 열정은 산의 정상에서 출발하여 하산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디테일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윤종신의 노래 <오르막길>이 떠올랐다. 멜로디도 좋지만 무엇보다 가사에 매료된 노래이다.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라든지,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그 곳이 넓지 않다는 말은 올라갔다 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리라. 다만 이 책은 굳이 부제를 붙인다면 <내리막길>정도랄까.

제목이 적절하여 마음에 든다. 사랑에 빠진 이의 삶은 무척 단순해지기 때문이다. 모든 사건과 일상이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있는 답정너이니까. 부풀어 오른 마음은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볼록렌즈가 된다. 삶의 문제는 OX 문제로 변모한다. 그와 관련 있거나 아니거나, 그가 있거나 없거나 많은 문제들이 단순하고 선명해진다.

한 페이지들의 자연스러운 연결을 보았다. 작가의 서술 방식이 신선하다. 충분히 이해될 정도로 상황을 그려내고 열정에 빠진 이의 감정을 잘 드러낸다. 소설 팔코너의 작가 존 치버 연보에 실린 수상 소감이 떠오른다. “훌륭한 작품의 한 페이지는 그 어느 것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힘을 지닌다. 불연속적인 낱장 낱장이 연결되는 애니메이션 같다. 핵심은 자연스러운 배열과 속도감에 있다. 예리한 심리묘사가 적절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사건이 주를 이루는 작품이 아닌데 마지막 장면이 궁금했다. 완벽한 스토리로 짜인 형식도 아닌데 한 편의 소설을 보는 듯했다.

 

과거란 흔히 변하지 않는 시제로 언급되지만 나는 과거도 변한다고 생각한다. 명확하게 말하자면 과거의 사건이나 사람을 바라보는 현재의 관점이 변한다고 본다. 글에 실린 사람은 일종의 화석으로 남는다. 글을 쓸 당시 작가가 지녔던 관점으로 박제된다. 한 사람에 대한 글이 쓰였던 시기에 따라 수시로 변화를 겪는 이유이다. 글은 찰나에서만 진실성을 갖는다.

작가가 이 글을 쓴 시기가 마음에 든다. 한창 사랑이 진행되던 시기에 썼더라면 아름다운 동화로만 머물렀으리라. 이별 후 원망의 과정을 지나올 때였더라면 허무주의로 귀결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어느 정도의 객관성이 확보될 즈음 감정의 정점에서 내려오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통찰적인 시각은 이 시기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기간의 길고 짧음에 관계없이 사랑에 빠진 이의 영혼 속으로는 우주가 흘러들어온다. 온 우주가 자신을 훑고 지나갈 때면 마음속에는 수많은 문장들이 소용돌이친다. 그 문장들을 품고 있다 숨고르기를 하듯 천천히 꺼내어 쓴 작품이라 생각한다. 작가의 기다림이 존경스럽다.

사랑의 끝을 묘사한 부분에서 감탄한 문장이 있다. 여전히 그에게서 떠나지 못하는 지금도 자신이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글 안에 한 사람을 담는 이유를 이보다 더 솔직하게 쓸 수 있을까. 그를 아직 잊은 것은 아니지만 글에 담긴 대상과 어찌 해보려는 건 아니며 그저 쓰는 거라는 것. 이유 없는 이유를 매우 냉철하게 묘사한다.

 

사랑을 관통하는 과정을 그린 작가의 스케치는 크게 3단계로 이루어진다. 모든 단계가 윤두서의 <자화상>에 나오는 수염 한 올 한 올처럼 정밀하다.

첫째, 사랑에 빠져있는 동안의 모습이다. 한 사람이 나의 삶에서 차지하는 터무니없는 비중, 나를 관통하여 지나가는 시간, 그가 곁에 있든 없든 항상 그와 함께 지내는 일상, 오래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전혀 준비하지 못한 시험을 앞두고 있는 듯했던 이별의 순간, 사랑하는 동안에 느껴지는 두려움과 상상과 욕망과 혼란에 대한 심리묘사가 날카롭다.

둘째, 이별 이후의 장면이다. 주변과 자신을 바라보는 마음 역시 솔직하게 관찰한다. 하지도 않은 말에 대답하고 보내지 않을 편지에 답장을 한다든지, 행복을 향해 열려 있던 과거로 바꾸어 놓고 싶었다든지, 공허한 피로감이라든지, 처음부터 내게만 의미가 있었던 목욕 가운이 언젠가는 나에게조차 아무 소용이 없어져 헌옷 더미 속으로 던져지리라는 사랑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예측까지도.

셋째, 이제는 사랑이 삶에 어떤 의미를 남겼는지 통찰하는 과정이다. 가끔 세세한 기억이 되살아날 때 잠시 동안 거대한 고요함이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 된다든지, 이제 자신에게 세상은 그가 없이도 다시 의미를 갖기 시작한 걸까 생각한다든지, 언젠가 그도 다른 이들처럼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리라 예상한다든지, 세상에서 그리고 자신의 삶 속에서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든지. 결론적으로 작가는 라는 존재를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준 대상으로 규정짓는다.

 

그녀가 이 책을 쓴 이유는 명쾌하다.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 싶었다는 것. 글쓰기로 그 순간을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사랑 그 이후의 마무리와 해석에 대한 알파에서 오메가까지를 보여준다. 끝내고 싶지 않았던 삶이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영원한 반복을 말하기 위한 것이라고. 시제에서까지 디테일의 끝판왕임을 증명한다. 아 다르고 어 다름을 보여주신 이 치밀하신 분을 어쩔?!

단순한 열정의 등장인물은 나와 그, 단 두 명이다. 이마저도 상대의 관점은 배재된 채 철저히 1인칭 시점에서만 서술된 글이다. 작가는 존재 그 자체로 작가에게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책 속에서 잠시 언급되었던 미켈란젤로가 떠오른다. 조각하는 행위의 본질을 명쾌하게 정의했다는 생각에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조각이란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했던 말이다. 이 소설에서 필요와 불필요의 기준은 하나다. 그와 관련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면에서 소설 속에 불필요한 묘사는 단 한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어서 하나의 초점처럼 집중이 가능했을까. 한 사람을 통해서 우주를 본 기분이다. 우주의 확장으로 이어지는 빅뱅의 시작도 결국 한 점이었을 테니. 무한정한 확대를 보여준 작가의 심오한 통찰력이 감탄스럽다. 소설 형식을 갖춘 작품 못지않게 주제에 잘 접근했다고 판단된다. 사랑을 매개로 1인칭인 화자에게 일어나는 심리학적 변화의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한 사람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라는 마지막 결론 역시 깔끔하다.

 

왜 항상 지나고서야 아는 걸까. 시간과 공간의 좌표축을 일시적으로 공유한 사람들을 기억할 때면 종종 아쉬웠다. 사랑하는 과정에 그 가치나 의미를 알게 되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이 책을 읽고 나니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이 보인다. 지나고서야 아는 게 아니라 지나왔기에 알게 되는 거라고.

이재룡 문학평론가는 작품의 해설에서 연인의 상실보다는 자아의 상실을 다룬 작품이라 정의한다. 나의 생각은 다르다. 한 사람과의 사랑을 관통해온 작가가 자아를 찾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라 생각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과정에서는 소나기처럼 내리꽂히는 감정들을 온몸으로 흠뻑 맞으며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미 지나왔으므로 비를 맞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집으로 돌아온 사람이 할 일은 젖은 옷을 말리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던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한 순간, 오직 단순한 이유가 되어주었던 대상, 유일한 이유가 되어주었던 열정의 순간을 남기고자 하는 마음이 글에서 묻어나온다. 그녀는 사랑의 과정이 가져다준 의미를 찾으며 따뜻한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런 시도는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

작가는 에필로그처럼 잠시 다녀간 그가 글 속의 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한다. 그녀의 객관적인 시각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그녀의 손을 떠나 글에 실린 사람과 그와의 일들은 불륜이라는 세상의 윤리로 가두어둘 수만은 없으리라. 삶은 모든 윤리를 넘어서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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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1-07-15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만의 글쓰기를 엿볼수 있었던 짧고 굵은 작품이었어요. 글이 나를 이끌고 간다는 표현과 딱 맞는 이야기더라고요. 순수한 감정에 자석처럼 끌려가는 참 단순명료한 내용이었는데 처음에는 이게 뭔 고전소설인가 싶다가도 후반에 갈수록 느낌이 팍 오더라는ㅎㅎ 작가는 사랑의 파편들을 모아서 이야기를 만들기보다 파편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듯 했어요. 아마 세월이 지나서 책을 쓰다보니 감정들이 많이 정리정돈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산의 정상에서 내려가는 과정을 비유하신 게 재밌어요! 근데 뭐랄까 오를때도 내릴때도 주인공 혼자 걷는 기분이라 씁쓸해요. 주인공이 과연 둘이서 사랑을 했다고 생각한건지, 아님 혼자만의 사랑인걸 알고도 그 길을 걸었는지 모르겠어요. 후자라면 아마도 사랑에 빠진 그 단순하고도 달콤한 감정 자체에 만족했기 때문이겠죠.

글은 찰나에만 진실성을 갖기에 과거도 변한다는 말, 너무 좋은데요?? 또 과거는 흔히 미화된다고 하니까 변하는게 맞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별 후에 책을 썼다면 허무주의가 될수도 있었다는 말씀에도 공감합니다! 아픔을 터뜨리는 게 어울릴 때가 있고, 꾹꾹 눌러담는 게 어울릴 때가 있죠. 자신의 사랑을 관통하는 이야기들을 쓴 걸 보면 오랜 시간동안 과거를 곱씹어온 게 느껴져요. 역시 슬픔을 아는 사람들의 글은 깊이가 남다르다고 할까요ㅠㅠ

저역시 이 책이 일인칭시점이어서 더 좋았어요. 다른 이들의 시점이 개입되었다면 곁가지가 많았을테죠. 또 그랬다면 말씀하신것처럼 작가에게 온 단어들이 뒤죽박죽이었을지도 모르고요. 그래서 이 책을 쓰는 동안 작가는 순수한 나 자신과의 싸움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비를 맞으면서 스스로를 아낄 이유를 찾아가고, 젖은 옷을 말리면서 우산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을것 같아요. 우리는 이렇게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수고를 덜기 위해서 책을 읽고 간접 경험을 하고 교훈을 얻나봐요! ㅎㅎㅎ

이제 리뷰를 너무 빨리 쓰셔서 제가 막 초조해집니다 ㅋㅋㅋ 요즘 너무 더워서 이렇게 짧은 책도 잘 안읽혀져서 큰일이에요. 여튼 어찌어찌해서 7월모임도 잘 마쳤네요. 나비종님은 아직 휴가 전이신가요? 저는 이번주가 휴가라서 열심히 놀고먹고자고 합니다 ㅋㅋㅋㅋ 남은 7월도 수고하시고 더위조심하세요^^

나비종 2021-07-22 22:45   좋아요 1 | URL
파편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듯 했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그와 관련된 감정과 사건의 조각들을 하나 하나 찾아서 비즈 공예 하듯 마음의 폴더에 박아 장식하는 느낌이었어요.^^

둘이 있어도 고독한 절대 고독의 경지일까요. 예전에 선전했던 드라마 장면이 기억나네요.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지만, 제목도 정확히 모르지만,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면 핸드폰인가 뭔가가 울리는 그런 컨셉이었어요. 일반적으로 둘이 하는 게 사랑이건만 출발 시각이 달라서 혼자 달리는 구간이 반드시 존재하잖아요. 서로 첫눈에 불꽃이 튀지 않는 이상은 그 타이밍을 맞추는 게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음.. 주인공은 아마도 둘이서 사랑을 하다 혼자 걷는 길까지도 감내했던 책임감 강한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일단 시작한 사랑을 끝까지 마무리하는. 무의 세계로 돌아갈 때까지의 전 과정을요. 저는 사랑에 올인한 과정보다 사랑, 그 후에 더 방점이 찍혔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사랑의 여운까지 그러 모으는 듯했거든요.

글이 찰나의 진실이라는 건 종종 느끼는 감정이예요.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안 그렇다는 걸 느낄 때마다요. 과거에 대한 해석이 기분에 따라 계속 변하더라구요. 억울하다는 생각에 부르르 떨다가도 자기합리화를 시키기도 하거든요. 그래도 이건 좋았지, 이건 얻었잖아 하구요.
암과 같은 질병에 걸린 걸 알았을 때 사람들의 감정에는 패턴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라고 합니다. 이별 후에도 이런 감정의 변화를 겪는 겉 같아요.
슬픔을 아는 사람의 글의 최고봉은 웃음이라고 생각해요. 작가의 글에는 통찰력이 엿보이지만 최고의 단계로는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 자신과의 싸움을 하셨을 것 같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상당히 치열했을 것 같아요. 어디까지 드러내야 할까 하는 거요. 일종의 자기 검열?ㅎㅎ
오~ 스스로를 아낄 이유, 우산의 중요성^^ 역시 예리하십니다!!
사람이 얻게 되는 교훈에서는 시간과 강도의 비례 관계가 성립한다고 봅니다. 긴 시간 책을 읽으며 얻는 교훈은 상대적으로 약하고, 짧은 시간 직접 겪은 경험은 깊은 임팩트로 마음에 박힌다는~ㅋㅋ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 줄기차게 책을 읽어야겠군요^^

초조ㅋㅋㅋ 그래도 노쇠한 저는 가끔 병자 모드로 돌입하니 언제 전세가 역전될지 모르겠습니다^^; 일을 남겨놓지 않는 성격인데 일주일이 다 되도록 컴퓨터 앞에서 집중을 하기 힘들었거든요. 2주 넘게 위염 증상이 있어서 고생했어요.ㅠㅠ 냉동실에 있는 성심당 식빵을 못먹었던 게 가장 괴롭더군요. 이제 내일 조금 시도해보려구요.ㅎㅎ
지난 금요일에 방학식하면서 몸 상태가 조금씩 좋아졌어요. 역시 만병의 근원은 직장이라며ㅋㅋ 지난 주에 충전하신 에너지로 이번 주는 열심히 일하시는 중이겠군요. 물감님도 건강조심하세요~^^*

초딩 2021-08-06 17: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나비종 2021-08-06 18:53   좋아요 0 | URL
매번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달 축하받을 수 있도록 좀 더 부지런히 글을 올려야겠습니다.^^;
 
6도의 멸종 - 기온이 1도씩 오를 때마다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마크 라이너스 지음, 이한중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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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생물의 95%가 멸종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고생대 말, 끝내 세상에 담기지 못한 95%의 존재감이 선명해졌다. 무심코 지나쳐왔던 숫자가 새삼 각인된 건 멸망이 등장하는 TV 속 장면을 보고나서부터이다.

드라마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에서 남주인공은 멸망한 미래로 여주인공을 데리고 간다. 건물도 그대로, 거리도, 나무도, 하늘도, 강물도 그대로인데 오직 살아 움직이는 존재만 없는 풍경이다. 투명하고 묵직한 이불처럼 공간을 덮는 고요. 두 주인공이 만들어내는 소리만이 유일하게 울려 퍼지는 침묵의 공간이다. 과거의 지구는 한때 이런 고요 속에서 우주를 여행했을까. 이런 풍경의 미래가 온다면 인류는 그 옛날 살아남았던 5%의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

사라지는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는 건 사라지는 모든 것들 때문에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거야.” 드라마 속 대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멀게만 느껴지던 미래, 상상이나 판타지 드라마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세상이 다가올지 모른단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손으로 그런 세상을 만들 수도 있다는 거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죠스바 아저씨가 부르짖었던 말처럼, “....”

 

6도의 멸종은 지구의 평균기온이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가 제시한 1.4~5.8에 도달했을 때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를 기술한 책이다.침묵의 봄의 기후 버전이랄까. 체계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서술했다는 점에서가 생각난다.

이 책의 가치는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기후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 자료를 토대로 지구의 미래를 예측했다는 점에 있다. 기후 모델은 워낙 변수가 많고 다양해서 특정한 모델로 지구의 상황을 예측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해당 온도를 경계로 한데 묶인 자료들을 보면 온도별로 지구에 나타날 현상들이 대략 윤곽을 드러낸다.

아쉬운 점은처럼 지도가 곁들여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해당 지역이나 국가를 일일이 검색하며 위치와 상황을 파악하다보니 완독에 2주 정도가 걸렸다. 나는 세계지리에 무지한 인간이라 여기에 홍수가 터지고 저기는 땅이 쩍쩍 갈라진대도 여기와 저기가 당최 어떤 연관이 있는지 연결 짓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 학생은 에어컨을 틀어도 매번 덥다고 했다.’라는 문장만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교실 좌석의 지정학적 위치가 에어컨의 사각 지대라는 정보만 알아도 대번 상황이 파악되지 않는가. 글로벌하게 읽히려면 그림 자료가 추가되면 좋을 듯하다. 간혹 베개로 사용될 가능성이 예상되더라도.

 

<들어가기 전에>에서 저자가 한 말 중 특히 공감한 부분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구기온이 2, 4, 6도씩 올라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일교차가 15씩 나는 일상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변화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수 있다는 거다. 사실 과학과 비교적 친숙한 나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

6도라는 온도가 낯설지는 않았다. 오래전에 짧은 영상으로나마 접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2009, 네이버캐스트에서 지구를 위협하는 6라는 글과 동영상을 보았다. 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의 영상을 편집하여 곁들인 가상시나리오에서는 기온이 1, 3, 6도 상승했을 때의 세상을 영화 속 장면처럼 보여주었다. 그저 상상의 산물이려니, 가상의 시나리오라 생각했다.

12년이 지난 다음, 책으로 다시 접한 미래는 체감 온도부터 달랐다. 더 이상 나와는 상관없는 먼 일이 아닌 게 되어버렸다. 가상이 현실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지구 온난화 관련 최신 인터넷 뉴스를 자주 뒤적이게 되었다.

 

이 책이 출간된 2008년 이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을까. 당시에는 미래였지만 현재로서는 과거로 박제된 결과들이 궁금했다. 우리는 당시의 예측에 얼마나 근접한 미래를 살고 있을까.

‘2009년 코펜하겐 기후변화회의를 언급하면서 회담의 성패에 주목하고 있다라는 문장을 보고 회의의 결과가 궁금했다. 검색을 해보았다. 2050년까지의 온실가스 감축량 목표 정하기도 실패, 구속력 있는 감축안 마련도 다음 총회로 미뤄져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빠르면 2015년 북극해 빙하가 사라질 수도 있다거나 킬리만자로의 남은 얼음이 2015~2020년 다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을 볼 때에는 잠시 안도했다. 위태위태하지만 아직은 사라지지 않았으니.

현재 380ppmCO2농도를 350ppm이하로 끌어내리기 위해 인류가 결사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문장에서는 다시 철렁했다. 국가기후환경회의(현재 ‘2050 탄소중립위원회로 통합)의 블로그에서 2019년 현재 지구 평균은 409.8ppm, 한국은 417.9ppm라는 자료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결사적인 노력이 실패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가도 책 속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는 상황에서는 소름이 돋았다. 마음을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하는 이산화 탄소 앞에서 내 마음은 파도처럼 출렁였다. 체중계 앞에 선 다이어트 인간처럼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 탄소의 농도 수치를 조마조마하게 바라보았다.

 

1도가 오른 부분을 건넜을 뿐인데 벌써 갑갑하고 숨쉬기가 불편해졌다. 티핑 포인트에 도달해 균형이 무너져 인간의 능력으로는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 올까봐 두려웠다. 객관적인 데이터들은 현실감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켰다. 후다닥 지나칠 수 없는 상황들이 긴박하게 이어질수록 독서 속도는 더욱 느려졌다. 지구의 온도가 서서히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눈동자의 움직임을 늦췄던 것일까.

4도 상승 부분에서 2007년 남극에 있는 론 빙붕의 해빙이 등장하면서 다시 멘붕에 빠졌다. 시작은 사소했다. 무식한 나는 당연히 빙붕이 뭔지 몰랐으므로 빙붕의 뜻부터 찾기 시작했다. , 남극 대륙을 뒤덮은 얼음이 빙하를 타고 내려와 바다 위로 퍼지면서 얼어붙은 것이로군. 그럼, 론 빙붕은 어디쯤이지? 클릭 버튼을 누른 순간 론 빙붕 관련 뉴스 기사가 펼쳐졌다. ! 2021519일이라니! 지난달에 일어난 사건이 올라와있는 것 아닌가! 제주도 2.3배 면적, 서울 면적 7배가 넘는 세계 최대 빙산이 남극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뉴스 기사가 조금씩 변주를 달리하며 올라와있었다.

4, 5, 6도 상승 부분은 짧은 분량이었지만 예측 가능한 먼 과거의 데이터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과거를 돌아보며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졌다.

 

교과서에 적힌 과학 지식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첫째,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물에 대한 내용이다

지구상의 물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건 97.5%를 차지하는 바다이므로 인간은 나머지 2.5%의 민물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이 중 빙하 등 얼어붙은 물이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한다. 결국 우리는 전부 합쳐도 1%가 안 되는 지하수, 호수, 하천의 물을 이용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인간이 얼어붙은 물을 의외로 많이 이용하고 있었다는 점에 놀랐다. 만년설이 바다로 흘러들면서 물의 이용이 곤란해지는 상황이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빙하는 아무데서나 볼 수 없는 특수한 대상이지만 빙하 가까이에 있는 지역에서는 매우 중요한 생명수였던 것이다.

둘째, ‘불타는 얼음이라 불리는 메탄하이드레이트에 관한 내용이다.

과거 페름기의 대폭발이 언급된 6도 상승 부분에서 메탄하이드레이트의 위력은 무서울 정도로 강력하게 묘사된다. 그런데 예전에 과학책에서 보았던 메탄하이드레이트는 이런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바다 밑에 무한정하게 매장되어있을 차세대 에너지원이라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얼어붙어있던 메탄이 녹으면 많은 에너지가 발산되니까. 문제는 이용하는 걸 넘어설 정도의 엄청난 폭발력이다. 교과서에서 그런 위험성은 없었거나 별로 강조되지 않았던 것 같다.

 

흩어진 퍼즐 조각처럼 글씨와 숫자가 빼곡한 가운데 이 책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표가 있다. 이산화탄소의 농도에 따른 기온 변화와 각 단계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행동을 정리한 표이다.(302)

당시의 데이터로 저자가 추산한 이산화 탄소의 농도는 2007년의 382ppm 이후 매년 2ppm씩 상승하여 2015년에는 400ppm이 된다. 저자는 그런 상황이 된다면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폭은 상당히 줄어들 것이라 예측한다.

위 계산법으로 단순히 산술 계산을 하면 2021년에는 410ppm이 예상된다. 인터넷 자료에는 2021년 현재 416.3ppm으로 나와 있다. 당시의 예측을 웃돈다. 원래의 과정을 증폭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양의 되먹임의 한계치가 위험한 수준이다. 탄소 순환 되먹임의 한계선인 400ppm을 넘어섰다.

숫자로 드러나니 심각성이 확 와 닿는다. 흩어진 뼛조각들을 연대별로 하나하나 그러모으듯 연구 결과물을 종합한 저자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책이 발간된 해에 불과 30대 중반이었던데 현재 40대 후반인 저자가 이 책의 개정 증보판을 낼 수도 있지 않을까. 오늘날의 상황까지 더해진다면 어떤 내용이 더해질까. 주변을 둘러보면 변화가 조금씩은 일어나고 있는 듯하다. 가끔 가는 커피숍에서는 ECO 친환경 생분해 빨대를 준다. 탄소배출 관련 뉴스도 점점 더 많이 보도되고 있다. 온도 변화를 따라잡으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조금은 희망적인 내용이 추가되면 좋겠다.

 

쨍한 날. 하늘을 볼 때마다 빨래하고 싶어진다. 태양에서 내리쬐는 그 많은 열과 빛이 거리로 버려진 채 구르는 상상을 한다. 아깝다. 여름의 에너지를 모을 수만 있다면, 겨울로 가져갈 수만 있다면 이토록 많은 전기를 생산하느라 지구의 온도를 높이는 일은 없을 텐데. 한쪽에서는 물 폭탄이 쏟아지고 다른 쪽에서는 심한 가뭄이 일어나는 것도 결국 한정된 공간에서의 효율적인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아서일 것이다. 자연의 순환의 고리를 깨뜨려 아름다운 리듬을 파괴한 존재는 바로 인간이다.

거실 바닥에 일부러 쓰레기를 버리거나 한여름, 안방을 뜨겁게 한 채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다. 지구가 나의 집이라 한다면 이렇게 함부로 다룰 생각은 하지 않을 텐데.

무조건 빨리, 많이, 높아지는 게 최고는 아니리라. 조금은 느려도, 약간 부족해도, 다소 낮은 채 살아가도 되지 않을까. 우리가 지구를 버리고 다른 행성으로 옮겨가려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가 있어서 멸종으로 가고 있다면 멸종으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할 존재도 우리이어야 할 것이다. 과거를 통해 상상하는 미래는 두렵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는 현재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현재의 우리가 과거로부터 이어진 관성을 바꾼다면 미래의 모습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p26, 7째줄: 태양의 적외선 지구의 ~

p41, 2번째 단락 6째줄: 영거드라이스 영거드라이아스

p63, 5째줄: 그린데발트 그린델발트

p113, 밑에서 4째줄: 인도에서는 온난화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해야 오히려 안전하다. 안전하다가 무슨 의미일까? 여러 번 읽어봐도 잘 모르겠다.

p113~116 제목: 인도와 파키스탄이 전쟁을 하는 이유 파키스탄에 대한 언급이 마지막 문장 하나다. 제목과 연관 지어 한 문장이라도 추가했었으면 좋았겠다. 이유를 잘 모르겠다.

p122, 10째줄: 캐스케이즈 캐스케이드

p123, 2째줄: 샌트럴밸리 센트럴밸리

p274, 13째줄: 지각판의 변동에 의해 산의 완성되고 ~ 산이 ~

p283, 1째줄: 가스의 양을 ~ 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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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7-07 2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나비종 2021-07-09 19:5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팔코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1
존 치버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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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작가들이 작품 시작 전에 이 책을 누군가에게를 언급한다. 그 누군가는 작가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인물일터이다. 앤디 위어는 소설 아르테미스에서 어떠한 찬사를 보내도 부족한 이들이라며 달 사령선 조종사 7명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다. 독자는 작가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소설 팔코너의 첫 페이지에 등장한 페데리코 치버에게가 궁금했다. 작가 이름이 존 치버이니 가족의 일원이리라. 작가는 누구에게 이 책을 바치고 싶었을까. 맨 뒤의 작가 연보를 먼저 보게 된 이유이다.

페데리코는 작가의 셋째 아들이었다. 형과의 애착 관계, 양성애 스캔들, 알코올중독, 우울증. 연보 속에서 작가의 삶은 소설 속 인물로 등장해도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듯했다. 더 궁금해졌다. 그는 아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을까.

며칠에 걸쳐 이 책을 읽은 나는 도돌이표를 찍고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갔다. 꽤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었건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몹시 애매하다. 어어어 하다 벌써 마지막까지 와버린 기분이랄까. 도대체 존 치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뭐지.

두 번을 읽고 나서야 다가오는 메시지가 몇 개 있었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이니 작가의 의도와 충분히 다를 수 있다. 상관없다. 중요한 건 내가 이 책을 통해 무언가를 붙잡게 되었다는 것이니.

 

팔코너는 교도소 이름이다. 소설팔코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하나같이 불안정하다. 교수였던 주인공 패러것은 형을 죽이고 감옥에 들어온 마약중독자이다. 그는 독방동에서 수표 위조범, 비행기 납치범의 공범, 보석 강도, 아내살해범, 부친살해범, 누명을 쓰고 들어온 이들과 함께 살아간다. 이 책은 감옥 안에서의 일상과 인물들과의 관계를 그린 소설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메시지는 세 가지이다.

 

첫째, 삶과 사람의 속성이다.

이토록 지질하고 불완전해 보이는 존재라니! 시작은 사소했다. 사소해 보이는 사건들은 격변으로 이어진다. 주인공의 동료인 치킨 넘버 투는 모든 게 실수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살인도 끔찍한 실수가 된다. 작가는 아무렇게나 떨어지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건조기 속 빨래들에게서 영혼이나 천사의 부주의한 추락을 발견한다. 우연과 불확실한 사건에 지배되는 삶의 본질을 통찰한다. 다음의 위치를 도무지 예측하기 어려운 양자역학의 세계처럼 말이다.

 

둘째, 삶과 사람의 경계이다. 이성애와 동성애, 수감자와 교도관, 교도소 안과 밖의 삶,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형성되는 관계, 중독과 중독에서의 해방을 정의하는 경계가 허물어진다.

아름다운 아내와 결혼했던 주인공이 동성애에 빠지는가 하면 교도관들은 수감자들보다 더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살인자라고 해서 교도관들과 별반 다르게 묘사되지 않는다. 작가가 그리는 감옥 안에서의 삶은 암울하지만은 않다. 그들의 대화와 사연과 일상을 따라가 보면 교도소 밖에서의 삶이 과연 행복하다 말할 수 있을까 생각이 많아진다.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형성되는 관계에 틈이 생겼을 때 인간이 얼마나 피폐해질 수 있는가 돌아보게 된다. 마약 중독으로 정기적으로 지급받던 약이 어느 순간부터 가짜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과연 중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물질인가 정신인가 생각이 깊어진다.

팔코너 교도소 이름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변화한다.‘데이브레이크 하우스는 새벽을 여는 집이라는 뜻으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기관을 의미한다. 밤과 낮의 경계. 새벽은 아직 본격적인 하루를 출발하기 전이다. 가시적인 하늘만을 생각한다 해도 그날 하루가 맑을지 흐릴지 예측하기 난감한 시각이다. 천사와 악마적인 면을 모두 지니고 있는 인간의 본성 같다. 좋다 나쁘다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삶과도 닮아있다. 이 소설의 정체성은 이런 모습일까.

 

셋째, 해피엔딩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이 소설 속의 엔딩이 작가가 독자에게 주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소설 팔코너의 엔딩 장면을 보니 불현 듯 유은실의 동화마지막 이벤트가 생각난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매번 울컥한 미소를 짓게 하는 작품이다. 동화 속 할아버지는 당신의 장례식을 위해 유쾌한 마지막 이벤트를 준비한다. ‘마지막 이벤트의 장소가 남아있는 이들에게 고인을 편안히 추억할 수 있는 장소가 될 수 있다면, 그 삶은 완벽한 해피엔딩이지 않을까.’그때 썼던 내 리뷰의 마지막 문장이다.

삶에 있어 해피엔딩이란 어떤 모습일까. 왕자의 키스로 잠에서 깨어난 공주, 환하게 마주 본 두 사람의 모습이 완벽한 클로즈업으로 마무리되는 애니메이션. 깔끔한 해피엔딩이란 멋진 식당에서 후식으로 나온 매실차까지 마신 어떤 날의 저녁 식사 같은 거라 생각했던 적이 있다. 예전의 나는 딱 보여주는 것까지만 바라보았다. 삶이란 실제로도 그런 모습이기를, 해피엔딩의 매순간이 일상으로 이어지리라 착각했던 것 같다.

이게 뭐야! 거창한 것을 기대한 채 부라리던 두 눈은 읽어가는 책이 늘어날수록 종종 갈 곳을 잃었다. 뭔가 나오기도 전에 끝나버리는 문학작품이 의외로 많았기 때문이다. 점점 엔딩 너머를 바라보게 되었다. 왕자와 공주가 서로를 바라보던 그 이후에도 그들의 삶이 해피엔딩만큼의 기쁨으로 쭉 이어졌을까. 정답은 알 수 없다일 것이다. 열린 결말로 끝난팔코너의 주인공 패러것의 엔딩 그 후가 궁금했다.

 

존재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물체의 움직임이든 인간의 삶이든 관계이든 많은 대상은 끊임없는 변화를 겪는다. 물체의 운동만으로 범위를 한정지어 속력을 측정한다면 매순간 들쑥날쑥일터이다. 빠르다가 느리다가 멈췄다가 다시 되돌아갔다가 일정하다가 다시 나아가기도 하리라. 삶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당장 1초 앞도 모르는 상황이 매순간 펼쳐지니까. 확실한 속성을 정의하기도, 경계를 세우기도, 엔딩을 말하기도 모호하다. 그래서 불안하지만 그래서 다행이다.

예전에 기대했던 해피엔딩이란 완벽한 등속직선운동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삶의 어떤 구간에서 존재하기도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순간 말이다. 네버 엔딩 스토리처럼 같은 패턴으로 이어질 것 같지만 극히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다.

삶을 인지하는 마지막까지 우리가 맞이하는 크고 작은 엔딩은 그 후의 삶을 짐작하지 못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그 어떤 순간도 아직은 엔딩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많은 위안을 받는다. 이런 게 삶이고 관계의 속성이라면 끝이라고 생각해왔던 절망적인 관계에서도,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바닥이라는 생각이 드는 삶에서도 조금은 희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엔딩, 그 후가 삶으로 이어진다면 그 어떤 것도 함부로 정의되지 않을 것이니.


p155, 8~9째줄: 패러것으도 패러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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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1-06-20 2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야 나비종님, 두달 연속으로 리뷰가 LTE 속도십니다 ㅋㅋㅋ 이번 책은 짧은 편이었는데 리뷰쓰기가 어려워서 애좀 먹었어요... ^^; 저도 나비종님처럼 두번 읽었으면 작품의 깊이를 더 많이 느꼈을라나요... 도대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 모르겠다는 말씀, 백번 공감이요!

아무렇게나 떨어기길 반복하는 건조기 안에 빨래처럼 인간도 언제 어떻게 추락할지 모른다는 것. 의미심장한 말이에요.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 삶을 관통하는 것 같아요~ 역시 인생 선배님은 이런 부분을 놓치지 않으시네요!

저도 바깥보다 교도소 안의 생활이 더 행복하고 평안해하는 죄수들에게 포커스를 두었어요. 세상에서는 외골수인 죄수들이 감옥안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변모하는게 재미있더라고요. 상황에 따라서 악마도 천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에요. 말씀하신대로 소설의 정체성은 난감하네요. 딱 중립이라고 보기도 뭐하고요 ㅋㅋ

어떤 작가가 말하길 ‘모든 이야기는 납득할만한 엔딩이어야 한다‘라고 했는데, 딱 그 말과 맞아떨어지는 작품이었어요. 수많은 탈옥 이야기가 전부 도망치는 것만이 목표인 반면, 이 책은 나 자신을 찾고 단절된 세상과 소통을 시도하려는 게 목표였으니까요. 심지어 형에게 비밀을 듣고서 삶의 의욕을 잃었을법한데도 다시 일어서려는 모습이 영화 <로키>를 생각하게 하던데요^^ <마지막 이벤트>는 안읽어서 잘 모르지만요 ㅎㅎㅎ

꽤 난해한 책이었는데 그럭저럭 잘 넘긴거 같아서 다행입니다. 또 나비종님의 리뷰가 있어줘서 더 다행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리뷰 일찍 써주세요. 읽고 도움좀 받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느덧 6월도 중반을 넘겼네요. 남은 시간 잘 보내시고 더위 조심하세요^^

나비종 2021-06-20 23:24   좋아요 1 | URL
순서 하나 바꿨을 뿐인데ㅋㅋ 매번 또 다른 독서 모임 도서를 먼저 읽다가 지난 달부터 나물 모임 도서를 먼저 읽기 시작했거든요~^^
저도 이번 책 리뷰쓰기가 어려웠습니다. 남는 게 없어서ㅡㅡ;; 두 번 읽어서 겨우 쬐끔 건지기는 했는데 별점 3점과 4점에서 갈등하다 4점 주었거든요. 별점은 왜 소숫점이 없나 몰라~ 3.4점 정도인데 그냥 올림해버렸어요^^; <숨그네>읽고 나서 읽은 거라 더욱 대조적으로 느껴졌나 봅니다. 둘 다 갇혀 있는 컨셉인데 작가의 관점에 따라 확연하게 느낌 차이가 나네요.

건조기 빨래 묘사는 곱씹을수록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생각했어요. 규칙을 따르지 않는 인간의 운명도 저렇게 랜덤인가 싶더군요.

상황에 따라 악마도 천사도 될 수 있다는 게 한편으로는 매우 섬찟해요. 예전에 들었던 심리학적 실험이 생각나네요. 죄수 간수 역할극이요.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몰입하는 모습은 정말 충격적이었거든요.
이 소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ㅋㅋㅋ

엔딩은 마음에 들었어요. 탈출했다고 하면 보통은 해피엔딩인가 싶은데 개운하지 않은 찜찜한 기분이 들잖아요. 주인공은 행복했을까, 그렇지만은 않았을까 독자 니 맘대로 해석해~~ 이렇게 툭 던져놓은게ㅎㅎ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인간이라 <로키>의 내용을 몰라 어떤 부분의 싱크로율이 있는지 이해못했습니다.^^;;; <마지막 이벤트>는 가슴 찡한 동화였어요.~^^

재미는 없었어요. 몰입도 잘 안되고. 삶의 모습에 그런 면이 있다지만 모름지기 이야기란 기본적으로 재미나 몰입도가 높아야하지 않을까 싶거든요. 삶도 녹록치 않는데 책에서까지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책 속의 이야기라면 그걸 읽는 동안만큼은 빠져드는 것도 괜찮다싶어서요. 마약 정도의 강도는 아니라해도. 작가로서의 고민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겠죠? 저는 가끔 생각해요. MSG를 첨가하지 않고도 밍밍하지 않은 곰국처럼 진하게 삶을 우려낼 수는 없는 걸까 하구요. 그게 어렵다면 MSG 쪼끔 첨가하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요. 가끔 비 오는 날에는 땡기던데ㅋㅋ

제 리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셨다니 다음 달에도 분발해보겠습니다~ㅎㅎ
다음 달에도 즐거운 대화 나눠요^^
 
공간이 만든 공간 - 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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볶음 요리용 양파를 썰 때면 떠오르는 건축물이 있다. 호주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이다. 사진으로 본 게 전부이지만 강렬한 아름다움이 각인되어 비슷한 사물을 볼 때면 종종 생각난다.

실물로 본 건축물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서울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이다. 실용을 넘어 거대한 규모의 미술 작품을 보는 듯 주변 공간은 순식간에 미술관이 되어버렸다. 스케일과 디자인에 압도당했다. 한참을 바라보니 궁금해졌다. 저런 곡면으로 꿀렁거리면 무너지지 않을까.

A4용지를 이용한 다리 만들기를 주제로 융합과학탐구대회를 진행했던 기억도 난다. 견뎌야하는 무게와 미적인 요소까지 고려해야 하는 과제였다.

여러 건축물을 떠올리다보니 하나의 건축물이 완공되기까지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아주 많다. 건축은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분야임을 새삼 깨닫는다. 지반의 구조와 성질도 알아야하며 측량에서는 수학이, 주변 환경의 영향을 고려한 건축 재료를 선택하려면 물질의 특성을, 건축물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역학을, 채광을 위한 빛의 투과율을, 태양의 이동 방향에 따른 일조량을, 게다가 외관의 미적인 요소까지 고려해야 하니 종합 예술이라 할 수 있겠다.

 

과학적인 내용을 시작으로 문명의 발생과정을 따라가다 보니 의아했다. 건축에 관한 책인데 벽돌 한 장 언급되지 않고 뜬금없이 빅뱅과 문명의 기원이라니! 건축물에 적용되는 과학적인 원리가 아니라면 무슨 관련성이 있단 말인가.

베일은 서서히 벗겨졌다. 저자는 결과물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근원을 파헤치고 싶었던 거다. 빛이나 빅뱅은 건축물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기원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문명의 발생은 집의 필요성을 말하기 위한 역사적 배경이었다.

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아래의 뿌리를 보아야 한다.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 문명의 발생뿐 아니라 그 이전에 나타난 기후의 변화부터 성찰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과정일터이다. 기초 공사부터 건축물이 완공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공간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는 결국 문화의 차이로 발현된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과학적인 요소도 놀라웠지만 그 사실을 발견하고 적용한 사람들의 노력도 대단했다. 저자가 이끄는 대로 천천히 따라갔다. 이유 없다 여겼던 현상들이 긴밀한 인과 관계로 맞물렸다. 내가 몰랐을 뿐인 이유가 존재하고 있었다.

 

건축의 기원은 빙하기 이후 발생한 지구온난화에서 출발한다. 빙하가 녹아 바다로 흘러들어가면서 육지의 물이 부족해진다. 사람들이 물을 찾아 모여들다보니 식량문제가 생긴다. 이를 농사로 해결하면서 정착생활이 시작된다. 문명의 출발이다.

농사에 있어 강수량은 곡물의 종류를 결정하게 만드는 요소이다재배방식은 건축물의 형태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영향을 준다. 저자는 동양과 서양의 두 그룹으로 나누어 강수량의 차이에 따른 건축물의 차이를 설명한다.

강수량이 많아 벼농사를 짓는 지역에서는 농사가 집단으로 이루어진다. 상대적인 관계가 중요해진다. 건축물 역시 주변의 자연환경과 관계를 맺는 형태로 지어진다. 개방적이며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시야까지 고려하게 된다. 반면 강수량이 적어 밀농사를 짓는 지역에서는 농사방식이 개인주의적이다. 절대적인 가치관이 형성되며 기하학적인 건물의 형태를 낳는다.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시야를 고려하다보니 건물 자체가 웅장하다. 벽으로 가려진 사적인 공간이 만들어지며 무거운 벽을 지탱해야 하므로 창문은 작을 수밖에 없다.

강수량이 적은 서양의 땅은 단단하므로 돌과 벽돌을 사용한 벽 중심의 건축물이 지어진다. 반면 동양의 땅은 강수량이 많아 무르므로 상대적으로 가벼운 나무를 이용하여 기둥 중심의 건축물이 지어진다는 것이다.

 

저자는 서양의 체스와 동양의 바둑, 한자와 알파벳 등 동서양의 문화를 비교하면서 건축과의 연관성을 찾는다. 기본적인 골조부터, 지붕의 형태, 담장의 높이, 창문에 이르기까지 동양과 서양을 비교하며 차이를 서술한다. 책을 읽다 보면 무심코 지나치던 건물들을 한 번 더 바라보게 된다.

공간과 시간이 건축물에 미치는 영향도 흥미롭다. 공간이 넘쳐나는 지역은 시간 거리를 줄이는 방향으로 건축이 이루어지며 공간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지연시키는 방향으로 건축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적절한 예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차, 버스, 철길을 두 그룹으로 구분해보라 하고 이를 해석하는 부분은 감탄스럽다. 당연히 기차와 철길이지! 이 두 가지를 하나의 범주로 묶은 나의 사고방식이 동양적인 관점에서 나왔다는 해석을 보며 놀랐다. 원숭이, 사자, 바나나가 언급된 문제에서도 나는 원숭이와 바나나를 묶었다. 관계를 중시하는 사고방식이 유전자가 이어지듯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살짝 소름이 돋았다.

건축의 한가운데서 다방면으로 손을 뻗어 건축을 외치는 저자답게 다양한 요소들이 건축과 연결되어 있었다. 여행지에서 가이드를 따라가듯 저자가 언급하는 건축물들의 디테일한 매력을 발견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는 듯했다.

 

곤충의 탈피가 일어나듯 도약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건축물의 발달사를 지켜보면서 묘한 생각이 들었다. 무생물로 만들어진 건축물이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여겨졌다. 이 책이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열린 결말이라는 점이다.

철골과 콘크리트라는 단단한 재료는 건축디자인의 폭발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불필요한 구조물이 제거되자 상상 속의 건축물이 재현되었다. 미적이고 창의적인 현대 건축물을 보면서 우주처럼 확장해가는 인간 상상력의 크기를 상상했다. 저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발전하는 기술과 생각을 건축물에 적용하기위해 계속 도전하기를 권한다. 제약과 융합이라는 원리를 적용하여 제약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방향으로 발전할 미래의 건축을 전망한다.

건축물 자체만 보다가 건축물이 품고 있는 공간으로도 시선이 옮겨졌다유형의 건축물을 통해 무형의 공간을 바라보게 되었다동양화의 여백이 주는 의미를 새삼 느꼈던 시간이었다.

총, 균, 쇠문명과 식량이 떠올랐다. 총, 균, 쇠가 인간 존재의 이유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라면, 문명과 식량은 기본적인 식의주의 버전, 공간이 만든 공간버전이랄까. 패션 쪽에서도 문명부터 파고들어가는 이토록 거대한 스케일의 책이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동아리 수업 시간에 발명뉴스탐구반을 진행하면서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았던 집이 생각난다. 슬로바키아에 부부의 주말 별장용으로 지어졌다는 14평의 소형 목조주택이다.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전통 가옥인 유르트를 모티브한 건축으로 도면에서 구조 사진에 이르기까지 JRKVC라는 설계사무소에서 맡아 지은 것이다.

설계 도면에서 집의 구조 사진, 각각의 공간에 대한 설명을 보며 예전과는 다른 관점으로 건축물을 바라보는 나를 느꼈다. 건축가에 빙의라도 한 듯 나도 모르게 공간의 효율적인 분배와 채광, 디자인, 문의 형태, 통풍, 전망 등을 구석구석 살피고 있었다. 도면까지 자세히 분석하니 전체적인 구조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개안이라도 한 양 눈이 탁 틔어 뿌듯했다.

세상에는 이유 없이 나타나는 현상이 많이 존재한다고 여겨왔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원인과 결과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이유 없는 현상은 없다. 다만 이유를 모르는 현상만 있을 뿐이라고 나만의 결론을 내려 본다.

다양한 상상력이 적용된 집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만으로 가슴 뛰는 일이다. 공간이 만든 공간이 어떤 형태일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더욱 설레는 것일까.

 

p187, 그림 설명, 험프리 랩턴 ~렙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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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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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제대로 크게 쉴 수 없었다. 피부에 있는 솜털 하나하나를 묘사하는 듯한 뮐러의 표현력에, 그 안에 담겨있는 정서에, 정서가 품고 있는 무게에 압도되었다. 문장에서 묻어나는 질감이 잠잠했던 감각을 건드렸다. 감각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저 무기력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온 세상이 작가의 언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새로운 의미로 다시 만들어졌다. 그녀는 상황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세상의 모든 것을 활용하는 듯했다. 소제목 하나를 지날 때마다 세상의 의미가 휙휙 변했다.

진자인양 삶과 죽음을 왔다 갔다 하는 숨그네라는 조어와 작가의 문장은 닮아있었다. 진공의 우주까지 올라갔다 응축된 지구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문장의 진폭이 컸다. 왔다 갔다 하는 온몸에 부닥쳐오는 바람의 숨 막힘에서 간절하게 그네 줄을 움켜쥔 두 손의 실핏줄에 이르기까지. 부유하는 먼지 한 점의 미세한 까슬거림까지 더듬은 문장이었다.

 

소련의 강제수용소에 5년간 노역하게 된 17세 소년 레오폴트 아우베르크의 시각으로 그 안에서의 삶과 그 이후의 삶을 서술한 책이다. 동료 오스카 파스티오르로부터 실제로 전해들은 수용소의 일상을 묘사한 글이기에 현실감이 생생하다.

자유를 온전히 제지당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소설의 처음 부분에서 나는 속박당하는 자유를 생각했다. 나의 의지가 조금도 개입되지 않은 채 다른 존재의 꼭두각시나 무감각한 기계인 듯 도구로 살아가는 시간들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배우 윤여정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후 기자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녀는 60세가 넘어서는 사치를 부리며 산다고 말했다. 그녀의 사치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에 남았던 말이다. 자유란 스스로의 이유로 사는 것이라 했던가. 질문이 답이 되는 순간에서 언급되었던 자유도 생각났다.

 

소설 속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자유란 부차적인 화두임을 깨달아갔다. 주인공에게 고통을 안겨준 것은 자유로운 표현이나 자아실현의 억압이 아니었다. 떠난 적이 없는데도 다시 찾아온다는 하루치의 배고픔이 그에게는 가장 절실했다. 식의주로 일컬어지는 기본적인 욕망 중 가장 먼저 오는 욕망 말이다. 몸을 구성하는 물질을 받아들여 생명을 지속하고자 하는 욕망은 어쩌면 생명체가 지닌 가장 원초적인 본능일지 모른다. 작가는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본능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읽는 내내 허기졌다. 소설 속 인물을 마주하기라도 한 듯 배불리 먹는다는 행위가 어쩐지 미안했다. 책장이 낱 장 낱 장 느리게 뜯어져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가 거름종이로 펼쳐졌다. 내안으로 들어가는 음식을 가로막는 듯했다. 책장을 빨리 넘기고 싶은데 손이 제대로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다. 문장 하나하나를 꼭꼭 씹어 먹는 기분이 들어서 입 안에서도 종이 맛이 났다.

 

주인공이 슬래그 노동자로 내려갔던 지하실의 계단 수는 64개이다. 짤막한 소제목의 개수를 세어보았다. 에피소드와 계단 수가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살짝 소름이 돋았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어쩌면 우연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서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들은 그러데이션 되는 색채를 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주인공을 따라가며 수용소 곳곳에 담겨있는 인물들의 삶을 바라보았다. ‘를 주어로 전개되는 문장에서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분위기가 난다. 성별의 구분이 의미 없어지는 수용소 안의 삶과 닮아있다.

소설 속에서 나를 중심으로 다루어지는 삶은 두 가지 영역으로 구분된다. 수용소 안에서의 삶과 수용소를 벗어난 삶이다. 주인공은 집으로 돌아왔으면서도 수용소를 벗어나지 못한다. 수용소는 모순된 아득함을 지닌 용수철이 되어 그를 번번이 수용소 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넓어진 수용소에 갇혀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너비는 깊이가 된다는 책속의 문장이 떠올랐다.

 

사소해 보이는 것으로부터 입은 상처가 더 쓰라릴 때가 있다. 예린 칼날에 베인 상처는 생각보다 오래 간다. 한 방울의 물기만 닿아도 엄살처럼 몸을 움찔한다.

무형의 대상으로 인한 마음의 쓰라림에도 비슷한 현상을 발견한다. 사랑하는 이의 메마른 말 한 마디, 주변 사람의 차가운 눈빛은 심장에 날카로운 생채기를 낸다. 유려한 문장이나 단어는 전체적인 의미로 송두리째 다가오지만, 무심코 굴러온 알파벳은 획 하나도 한 줄 곡선을 따라 섬세하게 눈에 띄므로 날카롭다.

사소해 보이는 물건 하나에 삶 전체가 매달리는 경우도 있다. 주인공이 삶의 동아줄처럼 마음으로 붙들고 있던 대상은 거대한 무엇이 아니었다. ‘너는 돌아올거야.’라는 할머니의 말 한 마디, 물건으로 모습을 바꾼 손수건 한 장이었다.

결국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의도의 농도이며, 물건의 가치 역시 물리적인 크기가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의 농도로 결정되는 걸까.

 

비유와 상징적인 표현이 많았다. 329쪽 분량의 시를 읽는 기분이 들 정도로 작가는 고차원적인 비유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온통 비유와 상징으로 빼곡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떠올랐다. 두 책의 차이를 비교한다면, 숨그네의 문장은 온몸의 감각으로 생생하게 전달된다는 점이다.

인간의 본성을 소재와 연관 짓는 작가의 능력은 탁월했다. 사물을 이용하여 분위기와 주변 상황을 묘사하고 심리를 표현하는 문장은 볼 때마다 감탄스러웠다. 하아! 어떻게 이런 시각으로 이런 시적 표현이 가능할까. 소제목 하나 지났을 뿐인데 벌써 진 기분이 들었다. 지금껏 읽었던 책 중에 비유적인 표현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단연코 최고이다. 끌리는 표현을 옮겨 적었던 A4용지의 절반만한 종이가 17페이지에 이를 때까지 옮겨 적고 또 적었다.

엔딩까지 줄기차게 표현의 텐션을 유지하는 작가의 비결은 무엇일까. 부러워하는 단계를 넘어 존경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펑펑 쏟아져 내리는 눈처럼 시적인 문장들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차원이 다른 표현력에 그녀의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시멘트를 묘사하는 장면은 압도적이었다. 시멘트 포대로 훅 빨려 들어가는 듯 숨이 턱턱 막혔다. 둘러보는 온 세상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채색되었다. 팝송 ‘What a Wonderful World’가 떠올랐다. 폐허와 아름다운 선율, 가사와 배경의 상반된 어우러짐, 악기소리와 굵은 암스트롱의 목소리. 대조가 자아내는 괴리만큼의 공허와 아픔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쥐어짜는 통곡이 아니라 무감각한 카메라의 시선인 듯 세상이 투영되었다. 장면이 끌어내는 느낌은 독자의 몫이었다. 흑백 화면처럼 온통 시멘트로 보이는 소설 속 풍경이 책속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때의 노래처럼 이 장면들이 극대화된 이미지로 그려졌다.

넓게 펼쳐진 문장들은 나를 둘러싸다 내 안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겹겹이 입은 모든 옷의 감촉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속옷부터 티셔츠, 겉옷에 이르기까지. 장갑, 양말, 모자, 스카프의 감촉까지도. 그녀의 문장들이 머리카락 한 올까지 훑으며 내 안에 내려앉았다. 표현이 깊었다.

 

평범한 서술어로 정의할 수 없었다. ‘슬프다. 불쌍하다. 안쓰럽다?’ 아니다. 이런 느낌이 아니다. 처량한 것도 아니고 아픈 것도 아니다. 내게서 일어나는 이 느낌을 어떤 서술어로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뮐러의 언어가 붙든 것은 텅 빈 허기 안에 내재된 고통이었다. 3도 화상을 입은 듯 고통에 담담해 보이는 작가의 문장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소리 없는 짐을 들고 다닌다는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되었을 때, 울컥해지는 마음이 뒤늦게 느린 속도로 다가왔다. 실체가 없는 짐은 크고 묵직했다. 모순투성이인 세상에서는 이토록 모순적인 표현이 가장 진실에 가까운 건지도 모른다.

인간 존재를 생각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낱낱이 해부하며 가장 원초적인 세포 단계를 보여주었다. 분리된 세포 하나가 이물질처럼 심장에 깊이 박혀 마음을 깜빡일 때마다 욱신거렸다. 내면에 자리한 본성. 동물과 인간의 경계를 허무는 생명으로서의 본능은 깊었다. 넓고 짙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은 나의 시선에 세상은 더 이상 이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p22, 밑에서 5째줄: 파스트라마 파스트라미

p182, 7째줄: 의심의 담긴 병 의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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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1-05-24 1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비종님, 이게 머선 일입니까. 월초에 리뷰를 쓰시다니요... 저는 이번에 너무 늦게 올렸어요. 이번달은 바쁘기도 바빴지만 손가락 관절에 문제가 생겨서 타자 치는게 힘들더라고요. 관절 관리 잘하시길 바랄게요^^;; 그보다 리뷰의 깊이가 엄청나시네요. 이 책은 역시 나비종님한테 찰떡이었군요 ㅎㅎ 반대로 저는 맞지 않아서 고생 꽤나 했더라는ㅠㅠ

시종일관 배고파하는 인물들을 보며 저또한 미안함이 생기더라고요. 어쩌면 이 작품의 주인공은 배고픈천사가 아닌가 싶을 정도에요. 삽질 한번에 빵 1그램 공식만 봐도 모든 생각과 행위를 식욕하고 연결짓는다는 걸 잘 알수 있으니까요.

마음에 상처를 입는 것도, 그 상처가 낫는 것도 의미의 농도라는 말이 확 와닿았어요. 아무일도 아닌 단순한 기억도 평생 기억에 남는 경우를 보면 그 농도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겠거든요. 이 책은 그런 진한 농도로 가득해서 나비종님에게는 유독 더 압도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와는 다른 입장으로 느리게 읽혀진 작품이었군요. 저의 부족한 독서력을 실감했던 시간이었어요^^;

정신없이 5월도 이렇게 지나가네요. 날이 맑으면 황사가, 그렇지 않으면 비가 와서 5월 같지 않은 5월이었어요. 이럴땐 집에 콕 박혀서 독서하는 게 제일이죠.ㅎㅎ 이번 모임은 제가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였습니다. 다음달에는 저도 힘내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비종 2021-05-27 20:47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ㅋㅋ 이번에는 기필코 마지막 날에 모가지를 걸지 않을 테다! 두 주먹 불끈 쥐고 4월 마지막 주부터 달렸죠~ㅎ 읽는데 11일 정도 걸렸구요, 리뷰 쓰는 데 3일 걸렸습니다.^^;;
손가락 관절은 좀 나아지셨는지요?^^ 제 직업은 정신노동이다보니 애새끼들로부터 열받지 않도록 화만 잘 다스리면 되는지라 건강은 아직까지 무난합니다. 노화에 따른 저질 체력은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구요~ㅎ
천천히 읽다보니 책 내용이 서서히 스며들어서 초고속카메라를 느리게 재생하는 기분으로 읽었습니다. 가볍지 않은 내용이 주는 압력이 상대적으로 덜해진 것이 좋은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책을 읽으며 시종일관 허기졌습니다. 먹는 행위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어요.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더군요.

음.. 마음에 상처를 입는 것은 의.도.의 농도라 생각하며 쓴 문장이구요, 물건의 가치가 의.미.의 농도라 생각하며 쓴 문장입니다. 공감하셨나요?^^
물감님 독서력의 부족이라기보다 관점이나 취향의 차이가 아닐까요?ㅎㅎ

정신없이 지나간 5월이었어요. 물감님의 댓글을 보고 무지 반가웠는데 대댓글을 이제야 달만큼 바쁜 나날들이었습니다. 오늘이 또 다른 독서모임일이라 엄청 달렸어요. 7시 줌 시작인데 6시 50분에 겨우 리뷰 마무리를 했다는ㅋㅋ
24일을 아슬아슬 세이프라 하셔서 엘리베이터 문닫히기 직전에 발가락 들이밀어왔던 인간은 심히 부끄러웠습니다.ㅋㅋㅋ 다음 달도 힘내볼게요~^^*

초딩 2021-06-04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월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나비종 2021-06-05 09:0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