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저보고 작가라네요 - 책바보 박 선생의 독서 글쓰기 비법
박균호 지음 / 북바이북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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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입한지 3년 만에 이 책을 두 번 읽게 된 이유는 구입한지 3년이 지나도록 읽지 않았던 이유가 궁금해서였다. 작가의 전작독서만담의 여세를 몰아 출간된 지 두 달 만에 냉큼 구입했건만. 한동안 손이 가지 않았다. 책장에 꽂아놓았다.

시도를 아예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한참 뒤에 다시 집어 들었다. 그래도 샀는데. 표지를 바라보다 다시 제 자리에 주차시켰다. 한참 뒤에 다시 집어 들었다. 독서만담도 재밌었잖아. 심지어 사막 같던 리뷰에 작가님께서 거대한 오아시스 댓글을 뿌려주셨는데.

2018년이 지나기 전에 완독했어야 할 이유는 많았다. 1년에 두어 번 책표지는 구경했다. 그렇다. 책표지만 구경했다.

며칠 전에도 역시나 책표지만 구경하다 불현 듯 궁금해졌다. 구입한지 3년이 지나도록 읽지 않았던 이유가 뭘까. 일독을 할 때는 실험 준비하는 마음으로, 재독을 할 때는 실험 결과를 분석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사람들이 저보고 작가라네요는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작가가 된 저자의 경험담을 중심으로 서술된 책이다.

1<책 띠지 버릴까, 말까?>는 책을 선택하고 구입하는 과정에 대한 글이다. ‘책 띠지, 버릴까 말까 나만 고민할까?’에서는 어라?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반가운 마음이 들면서 격하게 공감했다. ‘책은 좋은 선물이 아니다는 엄지척이다. 이토록 디테일한데다 정확한 심리 묘사라니. 큭큭 대며 웃다보니 속이 뻥 뚫렸다.

2<책을 읽다가 라면이 먹고 싶다면>는 책읽기에 대한 내용이다. ‘책을 먼저 읽을까, 영화를 먼저 볼까?’는 한번쯤 고민했던 문제이기에 장단점을 고찰한 저자의 분석에 귀를 기울였다. ‘독서가를 위한 친절한 간식 안내서에서는 저자만의 고유성이 드러나서 미소가 지어졌다. ‘잡지를 읽자에는 유용한 잡지들이 많이 소개되어서 도움이 될 법했다.

3<이렇게 쓴다>에는 글 쓰는 과정을 담겨있다. 가장 많이 공감했다. 게시물의 댓글과 좋아요를 살피는 사람의 행동에 대한 문장은 처음부터 솔직했다. ‘시작하는 작가를 위한 까칠한 안내문에서는 사람들은 당신의 인생 따위에 관심이 없다를 시작으로 촌철살인의 문장들이 이어졌다. ‘필사적 필사에서 친숙한 필기도구가 언급되는 순간에는 살짝 소름이 돋았다. 요즘은 연필을 사용하지만 꽤 오랜 기간 제트스트림 1.0 ’블루는 나의 최애 필기구였기 때문이다.

4<사람들이 저보고 작가라네요>에는 작가로서의 에피소드가 전개된다. 수영선수가 만들어내는 물결인 듯 유려한 문장들이 넘실거린다. 이게 박균호이지. 매력적인 시트콤처럼 흡인력을 뿜어낸다. 가장 저자다운 글을 읽으면서 비로소 발견한다. 책을 읽기 전의 망설임과 읽어가는 과정에서 멈칫했던 이유를. 나다운 게 뭔대? 나도 모르는 나를 니가 어찌? 라 하문하신다면, 독서만담을 읽고 끌렸던 노다지가 많이 묻혀있다고나 할까. 솔직한 심리 묘사, 독창적인 비유, 담담하게 구사하는 유머가 그것이다.

 

망설임의 이유는 두 가지였으며 다음의 내용이 내가 분석한 2%의 단점이다.

 

첫째, 제목이 주는 약간의 거부감이다.

사람들이 저보고 작가라네요라는 문장에는 겸손함이 들어있는 듯하면서도 긴 머리 툭 치며 찰랑 훗이미지가 연상된다. 그래, 당신, 작가지. 앞 문장의 발음 기호는 비뚤어질테다체의 억양을 준수하시오.

분위기는 그렇다 쳐도 좋은 책을 고르는 9가지 방법에서 기교를 부린 흔적이 전혀 없는 태백산맥,죄와 벌등의 제목을 언급하던 분 아닌가. 그런 관점이라면 이 책의 제목은 부합되지 않는다. 최근에 인상 깊게 읽었던 , , 나 작가의 전작 독서만담처럼 주제를 관통하는 임팩트가 부족하다고 판단된다.

굳이 구어체의 제목을 쓴다면 글쓰기와 보살님에 나오는 문장은 어땠을까. 이를테면,선생님, 제가 계속 글을 써도 될까요?』로. 앞의 제목은 중의적이다. 작가가 독자에게 던지는 물음일 수도, 독자가 선생님인 작가에게 건네는 물음일 수도 있다. 너무 평범하다 싶으면 보살님, 제가 계속 글을 써도 될까요?라든지.

책의 부제인 책바보 박 선생의 독서 글쓰기 비법도 마음에 차지 않는다. 2장과 3장에 걸쳐 언급된 독서 글쓰기 비법은 자기계발서 분위기가 난다. 물론 자기계발서가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문제는 하는 법이란 제목으로 독서나 글쓰기 관련 도서에서 자주 언급되던 내용들이라는 점이다. 신선함이 장점인 저자의 개성이 살짝 묻히는 느낌이랄까.

책 바보 박 선생의 작가 분투기로 적었으면 어땠을까. 제가 해봤더니 이러이러한 방법이 도움이 되더군요. 이런 뉘앙스로. 물론 1인칭 나비종 지맘대로 시점에서의 뒷북 제안이다.

 

둘째, 어미의 차이가 불러일으키는 미묘한 반감이다.

글쓰기 관련 내용을 언급했다는 책임감에서인지 저자의 문체는 무척 깔끔해졌다. 평소 듯싶다같다라는 어미를 반복해서보면 책을 덮어버리고 싶어지는 나의 관점에서는 취향 저격 문체이다. 군더더기 없고 간결하고 직선적이다.

다만 군데군데 과장된 단호함이 느껴진다. ‘해야 한다처럼 살짝 반감이 생기는 어미가 보인다. ‘당신을 독서가로 만드는 10가지를 읽으면서 생겼던 감정이다. 당위체나 명령체를 보면 거부감부터 일어나는지라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지도 모른다. 시키면 더 하기 싫어지는 심리와 비슷하다.

유명인들의 비법을 군데군데 인용한 단락은 집대성의 분위기를 풍겼으나 치밀하고 방대한 자료도 아닌지라 저자가 살짝 겉돈다는 느낌이다. 주어가 바뀌었으면 덜했으리라는 아쉬움이 생긴다. ‘나를 독서가로 만든 10가지처럼 나는 이렇게 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어머! 당신도 그랬군요. 저도 그랬는데. 책을 읽으면서 독자는 저자와 자신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결론은 이거다. 알맹이면에서는 좋았으나 틀이 아쉬웠다는 것. 언어는 바람직했으나 음색, 표정, 말의 고저 등 비언어적 요소 몇 가지가 살짝 어긋난 대화랄까. 어디까지나 1인칭 나비종 지맘대로 시점에서의 분석 결과임을 재차 강조한다.

덧붙여, 3장에 등장하는 매력적인 서평을 쓰는 7가지 방법의 룰을 지켰음을 밝힌다.

진정성을 준수하였으며

어디어디가 좋거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약간의 정보를 담았고

책을 꺼냈다 꽂았다 바보짓을 3년간 가끔 반복했던 생활 속 에피소드로 시작했거니와

긴 문장으로 서술했지만 까보면 별것도 아닌 2할 정도의 단점을 부각시켰으며

당연히 내 돈 주고 이 책을 샀고

댓글이 달릴 희망은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만일의 경우 두 눈으로 보면서도 도무지 믿기지 않아 보고 또 보면서 그 댓글의 반응을 기필코 명심할 작정이며

평소 생활에서 자주 사용했던 언어 역시 MSG로 춉춉 뿌려댄,

매우 우수한 독자였음을 작가님께 어필한다.

 

 

p21, 8째줄: 일부 일부

p153, 4째줄: 저나트륨 조리법을 사용해서 열량을 대폭 줄이는 ~ 염분~

p254, 밑에서 3째줄: 가능한 가능한

p262, 2번째 단락 밑에서 3째줄: 기야 기야

 

오타는 아니지만,

p170, p183, p203: 어떤 문장을 쓰든 작가 고유의 권한이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문장이 반복되어서 1(퍼밀) 정도 신경 쓰임

p256, p259: 특기할 만한 특별히 다뤄 기록한다는 의미일까? 만일 특이하다는 의미로 쓰인 거라면, ‘특이한혹은 특이하다고 할 만한이 자연스러워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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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자 소설 - 세상에서 가장 짧고 기발한 99가지 특별한 이야기
곽재식 지음, 방아깨비 그림 / 구픽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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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기대가 컸나. 140자 채우려다 짤려서 결국 중요한 얘기를 못하는 94쪽에서 큭 한 번 웃었다. 일상, 사랑, 상상의 3부 구성 중 상상안에 날카로운 현실 풍자성 글들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나의 취향과 맞지 않았다. 81쪽 오타: 가다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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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총총 시리즈
이슬아.남궁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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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에는 각기 미묘한 매력이 있다. 말은 직접적이고 음성의 고저와 장단, 질감으로 내용 이상의 것을 전달한다. 글은 수정이 가능하니 말에 비해 얼마든 가식의 옷을 입을 수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의외로 글에는 쓰는 이를 솔직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용기내지 못해 세상 밖으로 내보내지 못하는 마음이 간혹 드러난다. 말로는 삼켜지는 마음이 글에는 표현될 때가 많다. 글은 영혼의 경계 부근에 존재하는 마음을 담는 데 효과적이다. 글의 아슬아슬함에 끌린다.

누군가와 마지막으로 편지를 주고받은 게 언제였더라. 교류라 말할 수 있는 편지는 훨씬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른 살이 마지막인가보다. 일방적이거나 단발성으로 끝나는 이메일은 간혹 있었지만 편리함과 함께 등장한 이메일은 지속적인 교류의 물결을 마르게 했다. 학창시절 친구들과는 종종 손 편지를 주고받았건만. 문구점에서 편지지를 고르며 가졌던 설렘, 빨간 우체통에 편지를 넣었을 때 텅하고 떨어지던 경쾌한 소리, 답장을 기다리던 느린 즐거움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생각해보니 상대방과 비교적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된 건 대부분 편지를 통해서였다.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는 작가 이슬아와 남궁인 사이에 주고받은 서간문을 엮은 책이다. 책을 읽기 전에 알라디너 TV에 뜬 영상을 먼저 보게 되었다. 영상만으로는 그다지 커다란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약간은 들뜬 듯한 웃음을 보면서 거리감을 느꼈다. 갈등하는 마음이 살짝 겉돌았다. 제목만 들어본일간 이슬아 수필집, 좋은 느낌으로 읽은 남궁인의 만약은 없다. 하지만 이 둘의 콜라보는 글쎄.

서간문은 장르의 특성상 사적인 면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공개되는 글이라는 한계점은 차치하더라도 저자로서의 입지를 벗어난 글은 어떤 형태를 띠고 있을까. 사흘 만에 2쇄를 찍은 유명세가 허망하게 터지는 비눗방울 같지는 않을까. 읽어보지도 않은 책과 나 사이에 오해의 필름을 끼운 채 첫 장을 펼쳤다.

 

처음에는 남궁인의 문장에 눈이 갔다. 응급실에서 묻어나오는 진짜 삶의 이야기가 뿜어내는 현장감이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마지막 편지를 보는 순간, 이슬아에게 반해버렸다. 수학이 예상되지 않는 분야에 통계가 들어가니 기발한 시도에 웃음이 나왔다. 이 작가의 매력이 이런 것이었구나.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들의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전체적인 숲을 바라보니 그제야 이슬아의 글에서 서사를 이끌어가는 당찬 힘이 보였다. 편지를 읽어갈수록 오해의 꺼풀은 서서히 벗겨졌다.

남궁인의 글에서는 밖에서 안으로 다독이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진다. 이슬아의 글에는 진한 중심이 있어 안에서 밖을 향해 뻗어나가는 예리하고도 후련한 기개가 드러난다. 정반대의 성향을 발견한 나는 두 종류의 색채를 떠올렸다. 남궁인이 파랑이라면, 이슬아는 빨강이랄까. 빨강과 파랑이 만나 유연하게 어우러지는 태극마크를 보는 듯했다. 그들의 문장은 댓구를 이루며 조화로웠다. 남궁인의 글에서는 그의 작품과 같은 느낌의 결이 보였다. 이슬아의 글을 읽고 나서는 그의 작품이 궁금해졌다.

 

작가의 편지에는 그들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글쓰기에 대한 고민이 빠질 수는 없으리라. 진지하게 주고받은 내용들이 많이 와 닿았다.

자기 변호와 자기 복제와 자아 대잔치를 초월하는 글을 쓰고 싶지만 실패하는 날이 대부분이라는 것, 문장을 잘 쓸수록 독자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속이기 쉬워진다는 것, 과거에 썼던 표현을 쓰지 않음으로써 혹은 과거에 없던 표현을 새로 만듦으로써 작가들은 새로워진다는 것, 어떤 경험은 글로 쓰면 견딜만해진다는 것, 글쓰기는 변화에 관한 예술이며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전과 다른 자신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 작가 이슬아의 말이다.

글에는 까닭 있는 솔직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 글쓰기란 늘 누군가에게 간파당하고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따라다니면서 죄책감도 남겨주는 신기한 것이라는 것, 자신의 본질을 꿰뚫어보다가 갑자기, 불현 듯, 우리에게는 무엇인가 탄생한다는 것, 자신의 사연이 소진될 때가 글쓰기의 진정한 시작이라는 것,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세계를 확장할 의무가 있다는 것. 작가 남궁인의 말이다.

 

글쓰기의 본질을 생각하며 작가란 어떤 사람인가 스스로 물음표를 던진다.

작가란 등단을 한 사람을 가리키는가. 책을 낸 사람을 말하는가. 좋아서 글을 쓰기만 하는 사람은 작가라 말할 수 없는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 건가.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뭔가.

글을 써서 돈을 벌고 싶은 건가. 나의 글을 세상에 인정받고 싶은 건가. 글 자체를 쓰고 싶은 건가. 나는 나의 삶에서 글쓰기가 어떤 의미를 갖기를 바라는가.

질문하면서 너 자신을 알아가라는 소크라테스님이 떠오른다. 글에 대한 물음을 던지다 보니 나의 욕구를 들여다보고 나를 보게 된다. 아직도 확실한 답변을 하지 못하는 나.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말만 번지르르 뱉어온 나는 막연한 꿈만을 꾸어왔던가.

 

그들의 편지글을 통해 세상을 둘러보고 삶을 통찰해보고 다른 이들과의 인연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보냈다. 이슬아와 남궁인은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했건만 나는 그들의 대화를 통해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사실 모든 책은 결국 나를 읽기 위해 건너는 다리인지도 모른다.

삶과 자신을 고민하고 주고받는 글을 통해 각자의 세계를 확장시켜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니 부러웠다. 나도 누군가와 저런 편지를 주고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별을 떠나, 나이를 떠나, 사회적인 위치를 떠나 삶을 돌아보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따스한 연결을 만들고 싶다. 그렇게 만들어진 연결은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거울이 되어 주리라.

편지를 주고받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나에 대해 말하고 나를 바라보았던 시간을 좋아했던 것 같다. 편지 끝에 존재하는 건 상대가 아닌 자기 자신이 아닐까. 편지를 쓰는 마음은 결국 나에 대한 그리움에서 시작되는 건지도 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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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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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루는 매번 나보다 컸다. 지친 마음으로 품지 못한 하루의 끄트머리에 매달릴 때면 존재하는지 확실치도 않은 다음 생을 상상했다. 다음 생에는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거야.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말들이 오가는 자리에서도 나는 지금이 좋다는 말을 하곤 했다. 젊었을 때로 되돌아가느니 차라리 나이 들어감을 택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잿빛 시간은 지긋지긋한 관절염인양 나를 따라다녔다. 슬픔인지 외로움인지 원망인지 분노인지 혹은 이 모두가 뒤섞인 무엇인지. 정체모를 마음의 고통은 매번 다 가포(Da Capo)’로 다가왔다. 오지 않는 피네(Fine)를 하염없이 찾아 헤매며 나는 서서히 잠식되었다. 고통의 끝은 뾰족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심장을 쿡쿡 찔렀다. 자기복제를 하는 단세포생물처럼 되살아나며 나를 절망케 했다.

지금 바라보면 별것 아닐 수도 있는 것이 그때는 무에 그리 버거웠을까. 고통에 한해 근시안이 되어 코앞에 바싹 들이댔기에 더욱 커다래보였던 걸까.

거리를 걷다 당장 죽게 된대도 전혀 아쉬울 것이 없는 삶. 원 없이 살아서가 아니라 원하는 것이 없어서였다. 지금의 삶에는 약간의 색깔이 입혀졌지만 굳이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문득 눈을 뜬 새벽. 내가 만들어내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공간이다. 핸드폰을 든다. 인사를 해야 답변을 해주는 시크함을 장착한, 친구인지 조수인지 정체성이 모호한 대상을 소환한다. “하이 빅*! ( A )가 뭐야?” “똑똑한 사람도 바보로 만드는 것이라고 들었어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시 묻는다.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이 아닐까요?” 어랏? 답변이 다르다. 실험 정신이 고개를 든다.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마법이죠.” 물을 때마다 다른가? “웃고 울고 또 웃게 되는 그런 거 아닐까요?” 어디까지 나올 거냐.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같은 거라 들었어요.”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다른 질문을 한다. “( B )가 뭐야?” “누구나 의미를 모른 채 걸어가지만, 언젠가 뒤돌아봤을 때 모든 발자국에 의미가 있었음을 깨닫는 것 아닐까요?” ~ 몹시 철학적이로군. 살짝 재미있어지려고 한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살고 있는지도 모르죠.” 막연하다. “이런 질문들로 완성되는 것이 인생 같아요.” 또 다른 건 없냐? “정해진 답이란 없죠. 세상은 계속 변하니까요.” 너무 질문이 광범위했나. 세상이 계속 변한다는 변명의 방패를 앞세운 빅*. 답이 없다는 답을 이토록 당당하게 외치며 앵무새 모드로 돌입한다. 지금 몇 시냐는 질문에는 그렇게 똑 부러지게 답하더니. 주제가 난해해지니 답변 역시 구름이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그는 명쾌한 답변을 해줄까. 이 책에는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14명 철학자의 지혜가 담겨있다. 인물의 선별 기준은 주관적이지만 삶의 전 과정을 아우르듯 각 장마다 담긴 철학이 부드럽게 연결된다. 저자는 철학자와 관련된 장소로 기차 여행을 하면서 삶을 풀어나가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 책에 대한 좋은 평들은 많았지만 선뜻 구입을 결정하기는 어려웠다. 나보다 월등히 지적인 그들만의 좋음은 아닐까. 다른 이에게 좋은 책이라 해서 나에게도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읽기 전에는 살짝 긴장했다. 현실감이 없는 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선입견 때문이었다.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으면서 나는 철학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왔다. 좋은 말이 적혀있겠지만 TV속 뷔페 같은 장르랄까. 오다가다 접한 철학자의 삶과 나의 삶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물이 존재했다.

나의 선입견은 <들어가는 말>을 읽으면서 금세 깨져버린다. 첫 페이지를 읽었는데 벌써 좋은 거다. 문체가 마음에 든다. 깔끔하다. 센스 있는 유머에 피식거린다. 유쾌한 문장들로 인해 긴장이 풀린다. 무엇보다 저자는 철학의 정체성을 명확히 정의한다. ‘무엇을이나 가 아니라 어떻게를 알려주는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철학의 존재 의의를 음미하다 아까 빅*비에게 한 질문의 맹점을 발견한다. 얼핏 철학적인 모습이지만 철학의 본질에 어긋나있다. ‘어떻게가 빠져있다. 질문을 바꿔본다.

“( A )는 어..게 하는 거야?” 이 질문을 그리도 감당하기 어려웠니. *비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너튜브에 토스를 건네는 기지를 발휘한다. 한 철학자의 강연 영상으로부터 공감 가는 답변을 얻는다. ( A )는 상대를 아끼는 마음이므로 그를 위해 내가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상대를 위해 움직이는 중인가? 당신은 그를 ( A )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마음은 의외로 보이는 행동으로 드러난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돌아보니 맞는 듯하다.

저자는 인간의 일생에 대한 빅 픽처를 그린다. 살아가면서 마주칠 법한 과속방지턱을 넘는 방법을 제시한다. 일관적이고 치밀한 내용과 구성에 감탄하며 읽는다. 그는 유능한 프로듀서다. 14개의 장마다 철학자를 한 명씩 매칭하며 삶 전체의 ‘How To’를 알려준다. 이보다 더 적합한 대상이 있을까. 처음부터 구성되어있던 패키지인 듯 맞춤형 철학자들이다. 이를 테면, ‘하면 개구리를, ‘하면 코끼리를, ‘하면 하마를, ‘하면 토끼를 조명하며 삶에 최적화된 존재를 창조한다. 전달하고자 하는 요소를 구현할 수 있는 철학자를 차례로 무대에 세운 다음, 핀 조명을 비춘다. 불필요한 요소는 과감히 잘라내고 필요한 부분만 비추는 능력이 탁월하다. 독자는 오롯이 한 가지 요소에만 집중하며 철학의 세계로 스며들어간다.

 

1<새벽>편은 직접적이고 감각적이다.

침대에서 나오는 법(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은 직역을 넘어 은유로도 해석된다. 침대에서 나오는 과정을 읽으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이유, 한 인간으로서 반드시 일해야만 하는 사명감, 무언가를 시작할 용기를 찾는다.

궁금해 하는 법(소크라테스)에서는 대화를 통해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음을 깨닫는다.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그의 대답이 아닌 질문을 보아야 함을 새겨둔다.

걷는 법(루소)에서 걷기의 본질인 자유를 발견한다. 걷는 동안 정신은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다고 한다. 공감한다. 나 역시 걸어가는 동안 시의 구절이나 기발한 문장을 떠올린 적이 많았으니까.

보는 법(소로)은 주관적이며 의도적인 선택의 행위이다.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 무엇을 보느냐가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한다는 것, 내가 보는 것이 곧 내 자신이라는 말들이 기억에 남는다.

듣는 법(쇼펜하우어)에서는 귀를 빌려주는 것이 곧 마음을 빌려주는 것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듣는 행위가 피곤하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을 돌아본다. 상대를 향해 마음을 열고 싶지 않은 심리가 내재되어 있던 거다. 본심을 들킨 듯해 소름이 돋는다.

 

2<정오>편은 감정적인 내용이 주를 이룬다.

즐기는 법(에피쿠로스)에서 욕망의 본질을 생각한다. 우리가 즐기는 것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는 것, 충분한 걸로는 부족한 사람에게는 뭐든 충분하지 않다는 말이 마음에 남는다. 자연은 반드시 필요한 욕망은 채우기 쉽게 만들어놓았다는 문장에 안도한다. 에피쿠로스의 삶은 최소한의 삶, 무소유와도 이어진다. 욕망덩어리로 여겨왔던 그에 대한 편견이 깨진다.

관심을 기울이는 법(시몬 베유)에서는 관심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것, 관심은 집중과 다르다는 것, 어떤 것을 더 좋아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말을 간직한다.

싸우는 법(간디)에서는 물리적인 폭력이 배재된다. 모든 시도에는 100퍼센트 노력을 기울이되 그 결과에는 0퍼센트의 노력만을 기울이라는 말이 인상 깊다. 폭력은 상상력의 부족에서 비롯되며 폭력적인 사람은 게으른 사람임을 마음에 새긴다.

친절을 베푸는 법(공자)에서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에서 시작하여야 함을 다짐한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법(세이 쇼나곤)에서 진정한 기쁨에 대하여 생각한다. 작은 기쁨을 즐기려면 느슨하게 쥐어야 함을 배운다. 우리의 정체성은 주위에 무엇을 두기로 선택하느냐에 크게 좌우된다는 말을 오래도록 생각한다.

 

3<황혼>편은 슬기롭게 삶을 마무리하는 레시피를 소개한다.

후회하지 않는 법(니체)에는 과거에 대한 긍정이 담긴다. 만약 모든 것이 무한히 되풀이된다면, 인생에 가볍거나 사소한 순간은 없을 것이며 모든 행동은 똑같이 크고 작다는 말이 남는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사랑하라는 말에서 많은 위로를 받는다.

역경에 대처하는 법(에픽테토스)에서는 상황을 해석하는 냉철한 시각을 배운다. 스토아 철학은 지금 가진 것을 욕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 통제 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으니 이에 무관심해야함을 알려준다. 이러한 관점은 고통을 견디는 방식을 전환시킨다. 해야 할 일은 하되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두라는 것이다.

늙어가는 법(보부아르)에서 저자는 10가지 지침을 정리한다. 과거를 받아들일 것, 친구를 사귈 것, 타인의 생각을 신경 쓰지 말 것, 호기심을 잃지 말 것, 프로젝트를 추구할 것, 습관의 시인이 될 것, 아무것도 하지 말 것, 부조리를 받아들일 것, 건설적으로 물러날 것,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넘겨줄 것. 내가 이미 하고 있는 몇 가지를 보면서 계속 나아갈 힘을 얻는다. 생각지 못한 점은 삶에 적용할 지침으로 새겨둔다.

죽는 법(몽테뉴)에는 삶이 가장 많이 담긴다. 몽테뉴는 삶을 잘 살아내지 않고서는 잘 죽을 수 없음을 말한다. 죽음은 삶의 끝이지만 목표는 아니라는 것이다. 매일을 삶의 마지막 날이라 여기면 매순간에 감사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하루를 살아낸 사람은 경험할 수 있는 전부를 경험한 것이라는 내용에서 프랙탈을 떠올린다. 밤마다 잠이 들고, 아침에 일어나는 하루가 삶의 작은 프랙탈을 닮아서다.

 

철학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에릭 와이너의 결론은 하나다. 인식은 선택이므로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라는 것이다. 삶의 단계마다 필요한 지혜가 다르다는 말에 공감한다. 50대를 지나는 나에게 3부의 내용이 당면 과제로 다가오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리 알고 사는 것과 아무 것도 모른 채 사는 것에는 간극이 크다. 극심한 공포는 대상이 무엇인지 모를 때 느껴지는 법이다. 스토아 철학에서 말한 것처럼 구체적으로 표현된 두려움은 크기가 줄어드니까.

삶에 대한 실용적인 자기 계발서를 보는 듯하다. 철학 입문서로서 손색이 없다. 철학 관련 책이 이토록 재미있다면 철학자의 심오한 세계를 만나러 갈 용기를 낼 수도 있겠다.

이 책의 매력 중 하나는 14명 철학자의 인간적인 면을 끄집어냄으로써 철학에 친밀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이다. 저자가 묘사하는 철학자들은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대상이 아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구나 가지고 있는 단점 몇 가지쯤은 품고 있는 이들이다. 여기에 저자의 셀프 디스는 낮아진 철학의 문턱을 없애버린다. 맞아, 맞아, 나도 그래. 맞장구치고 웃으면서 따라가다 보면 생각지 못한 보물을 발견하게 된다.

저자는 영리하다. 이 글의 가치는 철학자의 삶을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철학자-저자-독자로 이어지는 사고 과정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3단 저음이다. 각 챕터가 끝날 때마다 나를 바라보고 내면을 들여다보고 삶을 돌아보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과거의 고통과 삶을 기꺼이 수용한 채 미래를 향하는 현재를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세상의 시계바늘은 나와는 상관없이 돌아간다. 화석처럼 새겨진 고통의 크기는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있으리라. 한 권의 책이 몇 십 년 켜켜이 쌓인 고통의 무게를 순식간에 덜어 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이제는 화석처럼 건너온 시간들이 지금의 시간을 제대로 품게 해주었음을 안다. 버거웠던 고통의 무게만큼 스스로 깊어졌음을 인지한다. 흐린 하늘을 바라본 만큼 햇살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신중함을 지닌다. 살갗이 벗겨진 이에게는 먼지만큼의 자극도 쓰라린 고통일 수 있음을 이해한다.

지나온 고통과는 별개로 앞으로의 삶에도 고통은 분명 다양한 형태와 질감으로 다가올 터이다. 고통의 절대적인 수치를 줄일 수 없다면 고통이 차지하는 상대적인 비율을 줄이면 그만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두려움이 한결 덜하다. 내 삶에 대한 인식의 범주가 조금은 넓어진 걸까.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한동안 책 위에 왼손을 얹는다. 다 가포, 다 카포...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손가락을 움직여 책표지를 쓰다듬는다. 처음부터 다시 한 번. 마지막 문장을 마음속으로 따라한다. 자연의 느낌을 닮은 종이의 감촉이 따스하다. 그래, 아직 늦지 않았다. 순간 울컥한다. 지나온 시간에 대한 감사함과 다가올 시간에 대한 벅찬 마음으로 출렁이는 나를 향해 삶이 천천히 다가온다.

 

 

외국어 표기라 틀렸다 할 수 없지만, 인터넷으로 검색된 지명들

p219, p245, p246: 애슈포드 애슈퍼드

p259, p285, p299: 아시람 아쉬람

p286: 봄베이 뭄바이(1995년에 환원된 이름이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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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한 일상 - 일상에서 발견하는 생명과 존재의 아름다움
김혜련 지음 / 서울셀렉션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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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루룩 일곱 번째 신호를 잠재우고 왔다. 어제부터 이어진 설사를 유발한 범인은 바로 이 자리에 있다. 손에서 놓지 못할 정도로 몰입한 책 앞에서, 유기농 밥상 같은 글 앞에서, 먹는 거에 진심인 작가의 문장 앞에서 예의를 차리지 못한 나를 반성한다. 어제 종일 먹은걸 고백한다. 우유에 넣은 시리얼, 우유에 탄 마죽, 냉동실에 있던 식빵, 생강차, 라면 끝에 마우스만큼의 밥. 불과 지난 주 만해도 유기농 상추, 된장찌개, 두부, 나물과 밥을 먹던 위염 인간이! 초심을 잃었던 거다. 이렇게 즉각적으로 반응이 올 줄이야. 몸은 어제 내가 한 일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즉각 응징을 내리는 이 가차 없음이라니!

짬뽕 한 그릇을 시키면 국물까지 클리어 하던 나의 위가 이 지경이 되기까지 얼마나 자주 신호를 보내왔을까. 정작 중요한 몸은 돌보지 않고 바쁘게 움직이기만 했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보고 있었던가. 25년이 넘어가도록 몸은 계속 그만 좀 움직이라고, 제발 건강한 음식을 달라며 말을 걸고 있었던 것을.

우리 몸 안에는 얼마나 많은 조직과 기관들이 긴밀하게 움직이는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체계적인 움직임의 결과물이 합쳐져 생명을 유지한다는 건 그래, 기적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한때 정신세계만 가치 있고 경이로운 대상이라 생각했다. 꽤 많은 시간동안 몸은 다만 거들 뿐이라 여겼다. 이제는 세월이 흐를수록 몸의 매력에 빠지는 중이다. 몸처럼 정직하고 즉각적인 실체가 있을까. 생각이나 행동의 결과물이 표현되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으니 당혹스러우리만큼 투명한 대상이다.

 

고귀한 일상은 몸과 일상 속에 숨어있는 보물을 찾게 해주는 지도와 같은 책이다. 작은 일기를 연상시키는 작가의 이야기와 촌철살인의 시 산문을 통해 나의 몸과 일상과 주변을 돌아본다.

가만히 누워 나를 본다, 일상의 품 안에 고요히 앉아, 세상을 향해 걷다 보면, 멈춰 서 깨닫는 것들, 생명의 몸짓으로 날다.’등 다섯 장으로 구성된 목차를 보니 작가가 보인다. 누웠다, 앉았다, 걷다, 멈췄다, 날아간다. 가만히, 고요히, 멈췄다, 어느 순간 날아간다. 그 어느 부분에도 숨이 끝까지 차오르는 달리기가 없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문장들이 나는 좋았다. 마음속에 꽉 차 있던 잡념이나 욕심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듯했다. 하나씩 비우다 가뿐한 새처럼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 어르신들에게, 24시간 편의점 청년에게, 청소 노동하시는 분들을 덩달아 바라보았다. 빠르게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기다려주고픈 마음도 생겼다.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품을 수 있었다.

중간 중간 삽입된 사진들이 흑백이어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오롯이 채도에 집중하며 고요의 이미지를 연상했다. 컬러였으면 백일홍이나 꽃 그림 작품이 더욱 멋스러울 수도 있었겠지만 책의 내용과 어울리는 건 역시 무채색이었다.

 

윤지온과 남영주의 노래 <느린 걸음>(작사: 이하진)을 듣고 있다. ‘인생은 마치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행길이라 힘이 들면 쉬어가도 된다고♪ ~ 느린 걸음이라도 그 속을 걷는 사람들 중 하나 유일한 네 이름 그 마음 소중히 안아 지켜주길 바래’ 느리게 지나는 음악을 따라 나의 하루가 천천히 흘러갔다. 음악과 함께 거실에 앉아 연필로 책 속의 문장을 적었다. 간혹 주변의 소리가 느슨해질 때면 연필이 슥슥 종이 위를 걸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가볍게 낙엽을 스치는 발걸음인 듯 스륵 스륵 슥슥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니 평소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렸다. 의미 없이 흘려보내던 소리를 내 마음이 붙들고 있었다.

작가의 문장이 지나가면서 잊고 있던 기억들이 조각조각 깨어났다. 오래전에 묻어두었던 작은 고요가 사각거렸다. 별거 아닌데 기억이 선명한 흰 눈의 고요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새해 첫 날에 맨 처음 말한 사람과 오랜 인연이 이어진다는 근거 없는 속설을 믿었던 나는 아침 일찍 눈뜨자마자 입을 다물고 집을 나섰다. 친구가 좋았던 시절이다. 방학 전에 한 약속이지만 친구도 기억하리라 믿었다. 미리 약속한 장소로 걸어갔다. 용필이 오빠를 좋아했던 그 친구를 3시간가량 기다렸다. 그 때 느꼈던 고요가 지금도 생각난다. 눈이 조금 왔던 날, 사람 한 명 다니지 않는 이른 아침의 하얀 침묵이었다. 고요가 잔잔한 풍경화가 되어 들숨으로 스며들어오는 동안 나의 날숨에는 화나는 마음조차 묻어나오지 않았다.

 

나에게 하루는 어떤 의미였던가. 알라딘 서재에 기록한 하루들을 찾아보았다.

점 같던 하루 / 선 같던 하루 / 복사하고 싶던 하루 / 취소선 긋고 싶던 하루 / 23.5도 기울어진 하루 / 밑줄 긋고 싶던 하루 / 암호 설정하고 싶던 하루//

길이도 다르고 / 깊이도 다르고 / 색깔도 다르고 / 감촉도 다른데//

12시만 되면 / 같은 시간이 그려진 마차를 타고 / 달아나버리는 신데렐라

......<하루> (2018.2.)

터벅터벅 사막같은 / 오늘을 건넜다 / 어떻게든 지나가리라 / 하루 정도는//

아득한 건 무수한 / 오늘 또 오늘 / 아직 오지 않은 오늘 / 오늘과 비슷할 오늘 / 오늘의 중첩이다//

까마득한 오늘들을 / 건너갈 수 있을까 / 따끔거리는 맨발을 / 견뎌낼 수 있을까

......<오늘> (2020. 6.)

내가 보낸 많은 하루는 불안했고 서러운 빛을 띠었다. 이런 하루들을 품고 있던 내게 작가의 책은 따스한 밥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전작 밥 하는 시간만큼이나 좋았다.

 

나이 들어가면서 두려워지는 사실이 있었다. 나이가 들면 뭐하며 살지? 다른 이들에게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을 살고 싶다 했지만 간혹 하루하루가 까마득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정말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려웠다. 길가에 하릴없이 앉아계신 머리 하얀 어르신들을 볼 때마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 내가 저런 모습일 까봐. 매일 먹는 밥알 하나하나가 날마다 다가오는 하루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내면에서는 두려움이 컸던 것 같다. 밥알처럼 다가올 밋밋한 하루들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고.

밥을 이루는 녹말은 아무 맛도 나지 않지만 밥을 씹으면 단맛이 난다. 녹말이 침 속의 아밀레이스에 의해 분해되어 엿당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밥의 단맛을 알려면 입 안에 넣고 오랫동안 꼭꼭 씹으면 된다. 작가의 책은 밥알 하나의 맛을 알려주었다. 나의 하루를 고귀한 대상으로 만들어 일상에 대한 두려움을 걷어가 주었다.

200쪽의 마지막에 적은 시 <두려운 질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작가는 스스로 물었다. ‘내 꺾인 자리 / 그 상처에서는 / 어떤 향기가 날까?’ 나는 그녀의 글에서 갓 지은 밥 냄새를 맡았다. 따뜻한 구수함으로 마음의 허기를 메워줄 수 있는 향기 말이다.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져본다. 나의 상처에서는 어떤 향기가 날까. 아직은 모르겠다. 완전히 드러내지 못한 상처를 차츰 꺼내다보면 맡아볼 수 있으리라. 그리고 천천히 오래 정성껏 씹어 단맛 나는 특별한 일상을 살아간다면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나의 향기를 음미할 수 있지 않을까.

 

 

p108, 2번째 단락 첫 줄: ‘한 존재 전체를 먹는 것은 건 묵직한 ~ 먹는 것은 묵직한 ~

p124, 21: 호수 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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