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총총 시리즈
이슬아.남궁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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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에는 각기 미묘한 매력이 있다. 말은 직접적이고 음성의 고저와 장단, 질감으로 내용 이상의 것을 전달한다. 글은 수정이 가능하니 말에 비해 얼마든 가식의 옷을 입을 수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의외로 글에는 쓰는 이를 솔직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용기내지 못해 세상 밖으로 내보내지 못하는 마음이 간혹 드러난다. 말로는 삼켜지는 마음이 글에는 표현될 때가 많다. 글은 영혼의 경계 부근에 존재하는 마음을 담는 데 효과적이다. 글의 아슬아슬함에 끌린다.

누군가와 마지막으로 편지를 주고받은 게 언제였더라. 교류라 말할 수 있는 편지는 훨씬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른 살이 마지막인가보다. 일방적이거나 단발성으로 끝나는 이메일은 간혹 있었지만 편리함과 함께 등장한 이메일은 지속적인 교류의 물결을 마르게 했다. 학창시절 친구들과는 종종 손 편지를 주고받았건만. 문구점에서 편지지를 고르며 가졌던 설렘, 빨간 우체통에 편지를 넣었을 때 텅하고 떨어지던 경쾌한 소리, 답장을 기다리던 느린 즐거움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생각해보니 상대방과 비교적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된 건 대부분 편지를 통해서였다.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는 작가 이슬아와 남궁인 사이에 주고받은 서간문을 엮은 책이다. 책을 읽기 전에 알라디너 TV에 뜬 영상을 먼저 보게 되었다. 영상만으로는 그다지 커다란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약간은 들뜬 듯한 웃음을 보면서 거리감을 느꼈다. 갈등하는 마음이 살짝 겉돌았다. 제목만 들어본일간 이슬아 수필집, 좋은 느낌으로 읽은 남궁인의 만약은 없다. 하지만 이 둘의 콜라보는 글쎄.

서간문은 장르의 특성상 사적인 면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공개되는 글이라는 한계점은 차치하더라도 저자로서의 입지를 벗어난 글은 어떤 형태를 띠고 있을까. 사흘 만에 2쇄를 찍은 유명세가 허망하게 터지는 비눗방울 같지는 않을까. 읽어보지도 않은 책과 나 사이에 오해의 필름을 끼운 채 첫 장을 펼쳤다.

 

처음에는 남궁인의 문장에 눈이 갔다. 응급실에서 묻어나오는 진짜 삶의 이야기가 뿜어내는 현장감이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마지막 편지를 보는 순간, 이슬아에게 반해버렸다. 수학이 예상되지 않는 분야에 통계가 들어가니 기발한 시도에 웃음이 나왔다. 이 작가의 매력이 이런 것이었구나.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들의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전체적인 숲을 바라보니 그제야 이슬아의 글에서 서사를 이끌어가는 당찬 힘이 보였다. 편지를 읽어갈수록 오해의 꺼풀은 서서히 벗겨졌다.

남궁인의 글에서는 밖에서 안으로 다독이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진다. 이슬아의 글에는 진한 중심이 있어 안에서 밖을 향해 뻗어나가는 예리하고도 후련한 기개가 드러난다. 정반대의 성향을 발견한 나는 두 종류의 색채를 떠올렸다. 남궁인이 파랑이라면, 이슬아는 빨강이랄까. 빨강과 파랑이 만나 유연하게 어우러지는 태극마크를 보는 듯했다. 그들의 문장은 댓구를 이루며 조화로웠다. 남궁인의 글에서는 그의 작품과 같은 느낌의 결이 보였다. 이슬아의 글을 읽고 나서는 그의 작품이 궁금해졌다.

 

작가의 편지에는 그들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글쓰기에 대한 고민이 빠질 수는 없으리라. 진지하게 주고받은 내용들이 많이 와 닿았다.

자기 변호와 자기 복제와 자아 대잔치를 초월하는 글을 쓰고 싶지만 실패하는 날이 대부분이라는 것, 문장을 잘 쓸수록 독자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속이기 쉬워진다는 것, 과거에 썼던 표현을 쓰지 않음으로써 혹은 과거에 없던 표현을 새로 만듦으로써 작가들은 새로워진다는 것, 어떤 경험은 글로 쓰면 견딜만해진다는 것, 글쓰기는 변화에 관한 예술이며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전과 다른 자신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 작가 이슬아의 말이다.

글에는 까닭 있는 솔직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 글쓰기란 늘 누군가에게 간파당하고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따라다니면서 죄책감도 남겨주는 신기한 것이라는 것, 자신의 본질을 꿰뚫어보다가 갑자기, 불현 듯, 우리에게는 무엇인가 탄생한다는 것, 자신의 사연이 소진될 때가 글쓰기의 진정한 시작이라는 것,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세계를 확장할 의무가 있다는 것. 작가 남궁인의 말이다.

 

글쓰기의 본질을 생각하며 작가란 어떤 사람인가 스스로 물음표를 던진다.

작가란 등단을 한 사람을 가리키는가. 책을 낸 사람을 말하는가. 좋아서 글을 쓰기만 하는 사람은 작가라 말할 수 없는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 건가.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뭔가.

글을 써서 돈을 벌고 싶은 건가. 나의 글을 세상에 인정받고 싶은 건가. 글 자체를 쓰고 싶은 건가. 나는 나의 삶에서 글쓰기가 어떤 의미를 갖기를 바라는가.

질문하면서 너 자신을 알아가라는 소크라테스님이 떠오른다. 글에 대한 물음을 던지다 보니 나의 욕구를 들여다보고 나를 보게 된다. 아직도 확실한 답변을 하지 못하는 나.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말만 번지르르 뱉어온 나는 막연한 꿈만을 꾸어왔던가.

 

그들의 편지글을 통해 세상을 둘러보고 삶을 통찰해보고 다른 이들과의 인연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보냈다. 이슬아와 남궁인은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했건만 나는 그들의 대화를 통해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사실 모든 책은 결국 나를 읽기 위해 건너는 다리인지도 모른다.

삶과 자신을 고민하고 주고받는 글을 통해 각자의 세계를 확장시켜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니 부러웠다. 나도 누군가와 저런 편지를 주고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별을 떠나, 나이를 떠나, 사회적인 위치를 떠나 삶을 돌아보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따스한 연결을 만들고 싶다. 그렇게 만들어진 연결은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거울이 되어 주리라.

편지를 주고받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나에 대해 말하고 나를 바라보았던 시간을 좋아했던 것 같다. 편지 끝에 존재하는 건 상대가 아닌 자기 자신이 아닐까. 편지를 쓰는 마음은 결국 나에 대한 그리움에서 시작되는 건지도 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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