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작법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그저 조사만 생략하고 뭉텅뭉텅 자르면 되는 줄 알았다. 시 쓰기를 도전해보려 했을 때, 나는 무모하리만치 용감했다. 빙산의 일각만 보고 달려들던 작은 돛단배 같았다고나 할까.

무작정 썼다. 나름 목표도 세웠다. 2일에 한 편은 써야겠어! 벅찬 설렘에 가슴 뛰던 날, 봄바람처럼 마음이 살랑거리던 날, 가늘게 세상을 가르던 비요일, 손끝으로 배어나오는 따스함이 막연하게 그리웠던 날, 코끝 찡하게 눈가 뜨거워지던 날은 그렇게 서툰 시로 담겨졌다.

그 인간은 달변이 아니라 다..이야예능 프로그램에서 우스갯소리로 스쳐간 말이 떠오르던 날, 복습하듯 나의 시를 돌아보았다. 다작의 n분의 1이라는 느낌이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내 글에 내가 취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감정의 울림을 막상 종이에 옮겨보면 왜 그리 초라하게 느껴지던지. 시에 대한 개념도 문장에 대한 이해도 기본적인 운율에 대한 상식도 없던 글. 곧 한계에 부딪혔다. 다작이 아니라 좋은 시를 쓰고 싶었다. 시를 쓸 수 없었다, 한동안.

 

문예창작과에 들어가서 전문적으로 공부해볼까? 이과 계열 전공을 한 나로서는 망설여지는 생각이었다. 나이가 주는 무게감은 새로운 도전 앞에서 주저를 낳는다. 가정과 직장을 오가는 일상에 또 다른 뭔가를 더한다는 것은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사실 극복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어떤 틀에 갇히기 싫었다는 게 보다 솔직한 내 마음이었다. 정형화된 룰을 공부하게 되면 그것에 얽매이거나 휩쓸리거나 독창성이 떨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기우. 결국 전문적으로 공부한다는 생각은 생각으로만 그치고 말았다.

이런 불안정한 상황에서 이 책을 만났다는 건 나로서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480페이지 분량의 친절한 강연을 듣는 듯 했다. 좋은 시와 그렇지 않은 시를 구분할 수 있는 시각을 갖게 해 주었고, 시에 대한 막연한 궁금증이 시원하게 해결되었다.

 

세상에 나쁜 시는 없다. 시를 쓰는 마음 자체가 감정의 부산물인데, 나쁘다는 표현은 어쩐지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그렇지만 자신의 감정만을 표현한 시는 좋은 시가 아니다. 그저 지루한 글에 불과하다. 스스로의 감정에 취해 쓰인 1차적인 글은 그 얕은 깊이로 인해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알고 지내는 이가 아닌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의 감정에는 관심이 없다.

시를 읽는 이들은 시와 자신의 감정을 엮어낼 수 있는 공감의 연결고리를 찾으려 한다. 그것은 삶과 인간과 자연에 대한 깊은 사유 없이는 불가능하다. 좋은 시에는 깊이가 있다.

시 쓰기는 감정으로부터 시작이 되지만 의외로 냉정한 작업이어야 한다. 해설서가 없는 원문만으로 공감을 끌어내야 하기에 만만치 않는 내공이 필요하다.

 

좋은 시에 대한 이미지를 그려본다.

강아지풀을 이루는 섬세한 털을 한참동안 바라본 적이 있다. 디카를 구입하고 저녁마다 접사를 찍는답시고 미친 듯이 동네방네를 돌아다니던 기억. 비 그친 토요일 오후, 강아지풀의 털끝에 맺혀있던 빗방울 하나. 마지막 햇빛을 받아 반짝이던 순간, 신선한 전율이 일었다. 좋은 시에도 섬세한 시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멈춰있는 듯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작은 바람에도 미세한 떨림이 있다. 그 흔들림을 포착하는 감정의 터치가 있어야 한다.

작가가 예시로 들어준 좋은 시들을 감상하면서 나는 담백한 순두부를 떠올렸다. 현학적인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함. 화려한 꾸밈없이도 얼마든지 감성을 어루만지고 삶에 대한 또 다른 사유를 끌어낼 수 있다.

하얀 눈을 자박자박 걸어가듯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마음을 향해 소리 없이 내딛는 발걸음. 바람직하지 못한 시와 좋은 시를 비교하는 부분을 읽을 때면, 나도 모르게 조심스레 숨을 쉬었다. 호흡조차 정갈해야 할 것 같았다.

 

초보자들도 알 수 있도록 각 장마다 요소마다 예를 들어가며 시적 표현, 대상, 관점, 묘사, 구조, 시점, 진술, 화자, 비유, 행과 연, 의미 등을 설명한 책이었다. 가갸거겨 한글을 알려주는 유치원 선생님처럼 친절했다. ! 이래서 뭔가 찜찜했던 것이구나. 예전에 썼던 시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려하게 장식한 문구를 넣었던 기억이 났을 때에는 금새 드러나는 거짓말을 한 아이처럼 뜨끔하기도 했다. 예시로 들어주는 시들에 모르는 한자가 섞여있어 당황하기도 했지만,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슬쩍 넘어갔다.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배웠던 시적 용어를 더듬더듬 회상해보며, 10칸 공책에 한글 공부를 하는 기분으로 아 다르고 어 다름을 익혔다. 지저분한 방을 청소한 것처럼 개운했다.

 

란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장르다. 끄트머리만 살짝 드러나는 글 아래로 묵직한 깊이를 지닌 사유가 담겨있다. 매우 논리적이면서도 음악을 들려주기도, 때론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기도 하는 언어 예술이다. 몇 글자의 배열만으로 제각기 울림의 지점이 다른 마음들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낸다. 시를 쓴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 가슴이 두근거린다.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 이제, 시작해볼까?

 

 

*눈에 띄었다.

꽃을 쫓는꿈을 쫓는 (p52 마지막 줄)

도시와 구릉구름 (p347 42)

(p347 밑에서 6째 줄)

물매미 울 듯돌 듯 (p384 3째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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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6-26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시를 쓰면 내용이 시시해서 시 쓰기를 엄청 어려워합니다. ^^

나비종 2016-06-26 18:55   좋아요 0 | URL
내용이 시시할 리가 있나요?^^ cyrus님의 글은 방대한 양이라도 짧은 시를 읽은 듯 한 호흡으로 읽어내리게 하는 힘이 있는 걸요^^
정말 시 쓰기는 알수록 어려운 작업입니다ㅎㅎ

페크pek0501 2016-06-27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상당히 좋게 읽었습니다. 이 책으로 스터디를 한 적 있어요. 제가 이 책으로 정했었어요.
밑줄을 긋고 읽었고 여러 번 읽은 곳도 많았어요. 시뿐만 아니라 산문을 쓰는 데에도 유용한 책입니다. 오랜만에 들러 반가운 책 봅니다.

나비종 2016-06-27 17:42   좋아요 0 | URL
정말 좋더라구요^^ 소개받아서 읽은 책인데, 오랜만에 공부다운 공부를 한 기분이 들었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