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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평점 :
몇 점의 철가루 정도였겠지. 분명 무겁지만 아직은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 느낌이었을 거다. 글자 몇 개가 하얀 종이에 천천히 나열된다. 조각이 커져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면서 감정이 실린다. 무의미하던 파편들은 모일수록 점점 힘을 갖는다. 가슴 속에 머물던 기억이 끌려나오는 순간, 글은 자석이 된다. 그때부터는 내가 글을 끌고 가는 게 아니라 글이 나를 끌고 간다.
글을 쓸 때마다 종종 받는 느낌이다. 어떤 말을 할까 이 말을 먼저 꺼낼까 저 말은 쓰지 말까. 무수히 많은 망설임의 시간이 흐른다. 더듬더듬 문장들이 나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을 넘어서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인다. 글의 흐름이 잡히면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화면을 채운다. 마지막에 내가 하는 일은 의도한 이정표를 세우고 나만의 방식대로 방문 순서를 바꿀 뿐이다. 내가 만든 여행 일정에 참여하여 무엇을 보게 될 지는 온전히 글을 읽는 이의 몫이다.
사랑에서도 글을 쓰는 과정이나 자석과 비슷한 면이 존재한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한 감정이 점점 커지면서 의미를 갖는다. 이성으로는 도무지 제어가 안 되는 시기에는 감정의 자석에 이끌린다. 그러다 어떤 식으로든 이별의 순간을 맞는다. 사랑은 전류가 흐를 때만 자석이 되니 전자석 같은 속성을 지닌다. 이별 이후의 과정은 작품이 되지 못한 채 버려지는 글들과 같다. 힘을 잃은 자석이 평범한 철가루로 부스러질 수 있는 것처럼. 그 과정까지를 품고 의미 있는 글로 붙들어낸다면 비로소 사랑은 한 편의 작품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 남게 되리라.
한 사람을 사랑하는 전 과정은 산을 오르는 과정과 비슷한 속성을 지닌다. 소설 『단순한 열정』은 산의 정상에서 출발하여 하산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디테일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윤종신의 노래 <오르막길>이 떠올랐다. 멜로디도 좋지만 무엇보다 가사에 매료된 노래이다.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라든지,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그 곳이 넓지 않다는 말은 올라갔다 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리라. 다만 이 책은 굳이 부제를 붙인다면 <내리막길>정도랄까.
제목이 적절하여 마음에 든다. 사랑에 빠진 이의 삶은 무척 단순해지기 때문이다. 모든 사건과 일상이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있는 ‘답정너’이니까. 부풀어 오른 마음은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볼록렌즈가 된다. 삶의 문제는 OX 문제로 변모한다. 그와 관련 있거나 아니거나, 그가 있거나 없거나 많은 문제들이 단순하고 선명해진다.
한 페이지들의 자연스러운 연결을 보았다. 작가의 서술 방식이 신선하다. 충분히 이해될 정도로 상황을 그려내고 열정에 빠진 이의 감정을 잘 드러낸다. 소설 『팔코너』의 작가 존 치버 연보에 실린 수상 소감이 떠오른다. “훌륭한 작품의 한 페이지는 그 어느 것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힘을 지닌다”는. 불연속적인 낱장 낱장이 연결되는 애니메이션 같다. 핵심은 자연스러운 배열과 속도감에 있다. 예리한 심리묘사가 적절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사건이 주를 이루는 작품이 아닌데 마지막 장면이 궁금했다. 완벽한 스토리로 짜인 형식도 아닌데 한 편의 소설을 보는 듯했다.
과거란 흔히 변하지 않는 시제로 언급되지만 나는 과거도 변한다고 생각한다. 명확하게 말하자면 과거의 사건이나 사람을 바라보는 현재의 관점이 변한다고 본다. 글에 실린 사람은 일종의 화석으로 남는다. 글을 쓸 당시 작가가 지녔던 관점으로 박제된다. 한 사람에 대한 글이 쓰였던 시기에 따라 수시로 변화를 겪는 이유이다. 글은 찰나에서만 진실성을 갖는다.
작가가 이 글을 쓴 시기가 마음에 든다. 한창 사랑이 진행되던 시기에 썼더라면 아름다운 동화로만 머물렀으리라. 이별 후 원망의 과정을 지나올 때였더라면 허무주의로 귀결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어느 정도의 객관성이 확보될 즈음 감정의 정점에서 내려오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통찰적인 시각은 이 시기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기간의 길고 짧음에 관계없이 사랑에 빠진 이의 영혼 속으로는 우주가 흘러들어온다. 온 우주가 자신을 훑고 지나갈 때면 마음속에는 수많은 문장들이 소용돌이친다. 그 문장들을 품고 있다 숨고르기를 하듯 천천히 꺼내어 쓴 작품이라 생각한다. 작가의 기다림이 존경스럽다.
사랑의 끝을 묘사한 부분에서 감탄한 문장이 있다. 여전히 그에게서 떠나지 못하는 지금도 자신이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글 안에 한 사람을 담는 이유를 이보다 더 솔직하게 쓸 수 있을까. 그를 아직 잊은 것은 아니지만 글에 담긴 대상과 어찌 해보려는 건 아니며 그저 쓰는 거라는 것. 이유 없는 이유를 매우 냉철하게 묘사한다.
사랑을 관통하는 과정을 그린 작가의 스케치는 크게 3단계로 이루어진다. 모든 단계가 윤두서의 <자화상>에 나오는 수염 한 올 한 올처럼 정밀하다.
첫째, 사랑에 빠져있는 동안의 모습이다. 한 사람이 나의 삶에서 차지하는 터무니없는 비중, 나를 관통하여 지나가는 시간, 그가 곁에 있든 없든 항상 그와 함께 지내는 일상, 오래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전혀 준비하지 못한 시험을 앞두고 있는 듯했던 이별의 순간, 사랑하는 동안에 느껴지는 두려움과 상상과 욕망과 혼란에 대한 심리묘사가 날카롭다.
둘째, 이별 이후의 장면이다. 주변과 자신을 바라보는 마음 역시 솔직하게 관찰한다. 하지도 않은 말에 대답하고 보내지 않을 편지에 답장을 한다든지, 행복을 향해 열려 있던 과거로 바꾸어 놓고 싶었다든지, 공허한 피로감이라든지, 처음부터 내게만 의미가 있었던 목욕 가운이 언젠가는 나에게조차 아무 소용이 없어져 헌옷 더미 속으로 던져지리라는 사랑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예측까지도.
셋째, 이제는 사랑이 삶에 어떤 의미를 남겼는지 통찰하는 과정이다. 가끔 세세한 기억이 되살아날 때 잠시 동안 거대한 고요함이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 된다든지, 이제 자신에게 세상은 그가 없이도 다시 의미를 갖기 시작한 걸까 생각한다든지, 언젠가 그도 다른 이들처럼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리라 예상한다든지, 세상에서 그리고 자신의 삶 속에서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든지. 결론적으로 작가는 ‘그’라는 존재를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준 대상’으로 규정짓는다.
그녀가 이 책을 쓴 이유는 명쾌하다.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 싶었다는 것. 글쓰기로 그 순간을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사랑 그 이후의 마무리와 해석에 대한 알파에서 오메가까지를 보여준다. 끝내고 싶지 않았던 ‘삶이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영원한 반복을 말하기 위한 것이라고. 시제에서까지 디테일의 끝판왕임을 증명한다. 아 다르고 어 다름을 보여주신 이 치밀하신 분을 어쩔?!
『단순한 열정』의 등장인물은 나와 그, 단 두 명이다. 이마저도 상대의 관점은 배재된 채 철저히 1인칭 시점에서만 서술된 글이다. 작가는 존재 그 자체로 작가에게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책 속에서 잠시 언급되었던 미켈란젤로가 떠오른다. 조각하는 행위의 본질을 명쾌하게 정의했다는 생각에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조각이란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했던 말이다. 이 소설에서 필요와 불필요의 기준은 하나다. 그와 관련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면에서 소설 속에 불필요한 묘사는 단 한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어서 하나의 초점처럼 집중이 가능했을까. 한 사람을 통해서 우주를 본 기분이다. 우주의 확장으로 이어지는 빅뱅의 시작도 결국 한 점이었을 테니. 무한정한 확대를 보여준 작가의 심오한 통찰력이 감탄스럽다. 소설 형식을 갖춘 작품 못지않게 주제에 잘 접근했다고 판단된다. 사랑을 매개로 1인칭인 화자에게 일어나는 심리학적 변화의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한 사람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라는 마지막 결론 역시 깔끔하다.
왜 항상 지나고서야 아는 걸까. 시간과 공간의 좌표축을 일시적으로 공유한 사람들을 기억할 때면 종종 아쉬웠다. 사랑하는 과정에 그 가치나 의미를 알게 되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이 책을 읽고 나니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이 보인다. 지나고서야 아는 게 아니라 지나왔기에 알게 되는 거라고.
이재룡 문학평론가는 작품의 해설에서 연인의 상실보다는 자아의 상실을 다룬 작품이라 정의한다. 나의 생각은 다르다. 한 사람과의 사랑을 관통해온 작가가 자아를 찾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라 생각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과정에서는 소나기처럼 내리꽂히는 감정들을 온몸으로 흠뻑 맞으며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미 지나왔으므로 비를 맞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집으로 돌아온 사람이 할 일은 젖은 옷을 말리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던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한 순간, 오직 단순한 이유가 되어주었던 대상, 유일한 이유가 되어주었던 열정의 순간을 남기고자 하는 마음이 글에서 묻어나온다. 그녀는 사랑의 과정이 가져다준 의미를 찾으며 따뜻한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런 시도는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
작가는 에필로그처럼 잠시 다녀간 그가 글 속의 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한다. 그녀의 객관적인 시각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그녀의 손을 떠나 글에 실린 사람과 그와의 일들은 불륜이라는 세상의 윤리로 가두어둘 수만은 없으리라. 삶은 모든 윤리를 넘어서는 실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