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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평점 :
아파트 전지 작업으로 짤막한 가지만 흉흉하게 남아있던 나무. 왜 그 생명들이 죽었다고 여겼을까. 엄연히 땅에 뿌리를 내리고 꿋꿋하게 서 있는데 말이다. 4월 중순을 넘어서자 야들야들 연둣빛 이파리들이 빼꼼 빼꼼 고개를 내민다. 생명은 참으로 끈질기구나. 이렇게 절망을 뚫고 다시, 봄으로 걸어가는구나. 작은 쉼표 같은 뭉클함이 심장을 훑고 간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겨울철 표어처럼, 작은 여지만 있다면 기어이 불꽃으로 타오를 준비가 되어있는 걸까.
반면 손끝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눈꽃처럼 순식간에 사그라지는 것 또한 생명의 불꽃이다. 극단은 통한다던가. "사람 쉽게 안 죽어."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허무한 죽음도 존재하는 듯하다. 그런 죽음은 새하얀 빛깔의 속성과 닮아있을까. 빨주노초파남보 여러 감정이 뒤섞여 복잡하지만 결국 없는 듯 단순하게 보이는 색처럼.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이런 느낌을 닮아있다. 내내 시리면서 데일 듯한 이야기다. 극단을 품은 양 상반된 요소들이 혼재한다. 심장이 동상을 입은 듯 화끈해진다. 질식할 듯 춤을 추는 하얀 눈이 까만 밤을 뚫고 절규한다. 고요한 눈처럼 사락사락 내리는 문장을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쉼 없이 쌓이는 눈의 무게를 무방비 상태로 감당하지 못할지 모른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일적으로 만나 친구가 된 경하와 인선. 이야기는 인선의 어머니와 이모가 겪은 4.3 사건을 인선이 경하에게 들려주는 방식으로 펼쳐진다. 당시 상황과 역사적 현장에 있었던 이들의 트라우마가 생생하게 서술된다. 하루키의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나오는 도서관 관장님의 유령처럼 인선의 영혼은 경하 앞에 등장하여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역사적 기록을 펼쳐 보여준다.
경하는 유서를 써 놓을 정도로 삶의 구석까지 내몰린 상태이다. 불쑥 온 인선의 연락에 제주로 내려가게 된 그녀는 가장 낮은 곳에서 4.3 사건을 경청하는 독자의 아바타가 되어 역사의 장막에 가려진 사실을 목도한다.
몽환적인 시어인 듯 간지처럼 삽입된 문장들은 서사에 생생한 숨결을 불어 넣는다.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주변의 밝기와 소리와 온도를 조절한다. 몇몇 문장으로 핀 조명 안에 담긴 진실은 더욱 또렷하게 부각 된다.
작가는 4.3의 정체성과 연결된 소설적 장치를 선택한다. '새, 밤, 불꽃'이라는 1, 2, 3부의 제목부터 '결정, 실, 폭설, 새, 남은 빛, 나무, 작별하지 않는다, 그림자들, 바람, 정적, 낙하, 바다 아래'의 소제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목이 화룡점정인 양 주제의 핵심과 연결된다. 전개의 마지막에 가까워지면 픽션적 서사는 증발하고 작가가 알리고자 하는 역사적 장면만이 심장에 각인된다.
작가 한강의 문장은 섬세하다. 육각의 눈의 결정을 만들어내는 한 변의 나뭇가지처럼. 심장에 톡 닿으면 금세 녹아버릴 듯 물기 어린 문장들이다. 시를 읽는 듯한 간결함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글자가 후두둑 떨어져 나갔을까. 고갱이로 이루어진 가뿐한 문장들이 스르르 녹아들어 스며든다. 마음이 축축해진다.
작별하지 '않는다'와 '못한다'의 차이는 분명하다. 소설의 얼개를 구성하는 자료를 조사할수록 작가의 결론은 점점 선명해졌으리라. 부정어임에도 불구하고 전자에는 주체의 결연한 의지가 담겨있으니까. 그런 의지들이 진실을 향해 올곧게 나아가기에 잘려나간 가지 끝에 다시 잎이 돋아나는 지도 모른다.
작가의 인터뷰 장면이나 그녀가 구사하는 언어를 볼 때면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떠오른다. 연약해 보이면서 심지가 굳은 사람,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 작품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가벼워 보이면서도 무거운, 부드러워 보이면서도 단단한, 어둑해 보이면서도 빛이 보이는, 죽음을 다루는 가운데 삶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이야기. 이런 이유로 한강의 소설 세계를 통과하면 심연의 바다를 순식간에 다녀온 해녀가 된 기분이 든다.
소설을 읽는 동안 넷플릭스 드라마<폭싹 속았수다>를 보게 된 건 우연이었을까. '완전히 속았다'는 말로 잘못 알았다가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의미라는 걸 알고 뭉클했던 작품. 내리 16부작을 보았던 이틀 간의 시간처럼 소설 속 문장이 시선을 옭아매곤 놓아주지 않는다. 제주어가 사라질 뻔했다는 4.3을 알고 나니 더욱 찡해진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제주 4.3이 어떤 사건이냐는 질문을 받았더라면 동공 지진을 일으켰으리라. 생소한 역사인 데다 굳이 알고자 하지도 않았던 사건이다. 카더라 풍문으로 이름 정도만 들어본 터라 그토록 디테일한 소설 속 표현에 혼란의 시간을 보낸다. 어느 정도까지 사실에 근접했을까. 작가의 묘사가 차라리 상상력에 의한 과장이길 바랐다.
1947년 3월 1일, 민간인을 향한 경찰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제주 남로당 무장대의 반란이 일어난다. 그 후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여에 걸쳐 제주도 민간인을 향한 초토화 작전이 실행된다. '반군 진압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들이민 학살, 이념이나 종교적 신념으로 인한 학살, 특정 지역 거주민을 대상으로 한 학살, 보복성 학살'. 지구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학살의 유형이 다 있다는 나무위키의 기록을 본다.
6.25 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다는 사건. 제주도민의 10분의 1이 죽거나 행방불명되었으며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촌락별 제사 일이 거의 비슷하다는 황망한 사실. 2만 5천 명에서 3만 명으로 추정된다는 사망자 수치가 실감 나지 않는다.
4.3 평화기념관에는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 '백비'가 있다고 한다. 역사적 진실에 입각한 이름을 새기지 못해 제주 4.3 다음의 어미를 명확하게 붙이지 못한다고.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어떤 이름으로 정의해야 희생자의 넋을 보듬을 수 있을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거짓이 없는 사실'. '진실'의 사전적 의미는 이토록 명료하건만 현실 세계에서 이 둘을 가르는 일은 만만치 않다. 탐욕이 개입된 세상에서는 부분적인 사실로 전체를 대표하는 양 커다랗게 부풀리는 적반하장은 카오스를 만든다. 안개처럼 진실의 주변을 뿌옇게 둘러싸 제3자의 시야를 가린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실화인지 만들어낸 일화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빨갱이'를 괴물로 여기던 국민학교 시절, 교육으로 배운 어떤 내용도 의심하지 않았다. 5학년 이후 어렴풋이 들었던 5.18 광주도 무섭고도 과격한 사람들이 일으킨 폭동 사태로 여겼던 날들도 있다.
하나하나 거짓의 꺼풀이 벗겨질 때마다 마음속 혼란은 점점 커진다. 무엇보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독특한 사람들로 간주하던 사람들이 놀랍도록 평범한 이들이라는 점이다. 오다가다 볼 수 있는, 동네에서 흔히 마주치는, 너무 평범해서 기억에 남아있지도 않은, 그런 이들이 역사의 중심에 담겨있다는 사실이다.
2025년 4월 11일 오전 6시 5분. 드디어 그들의 진실이 '진실을 밝히다: 제주 4.3 아카이브'라는 제목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다. 당시의 기록뿐 아니라 후대의 진상 규명, 상생과 화해의 기록도 등재 대상이라고 한다. 수많은 유골을 은폐했던 시리고 어두운 덮개가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렇게 조금씩 벗겨지는 걸까.
토닥토닥 영혼을 덮기 위한 수의 같다. 겉표지의 바다 위에 그려진 장막이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을 감싸주는 듯하다. 쓰나미인 양 몰려오는 무엇이라 생각했던 하얀 천을 가만히 응시한다. 작가의 표현대로 '바다 대신 흰 천 같은 눈이 하늘에서부터 밀려 내려와 그들을 덮어주는' 걸까. 성난 파도처럼 밀려드는 폭력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펼쳐진 얇은 울타리. 속절없이 당할지라도 함께 흠뻑 젖을 준비가 되어있는 장막은 어쩌면 소설 속 작가의 외침을 극대화하기 위한 오브제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머리에 쥐가 난 것처럼 미세한 전류가 뇌를 감싸고 도는 듯 저릿하다.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들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는 소설 속 문장처럼 정신이 번쩍 든다.
인간의 광기와 잔인한 본성의 결과를 지켜보는 내내 제주어 '속솜허라'의 주문에 걸린 듯 숨을 죽인 채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삶과 죽음 앞에서 영혼은 조금 더 깊어지고 보다 무거워지나. 무심히 지나친 진실들이 방향 지시등처럼 깜빡인다. 이제, 속솜허지 마소서. 당신들의 희생 덕분에 또 다른 평범한 이들에게 봄이 오고 있으니. 점멸등처럼 봄을 향해 반짝이는 연둣빛 신호를 따라 조심스레 코끝 찡한 봄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