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는 대충 이렇다.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를 다 읽고 나서도, 왜 하루키는 메타포를 들고 나왔을까, 이데아는 뭐고, 메타포는 뭐며, 이 둘의 관계는 소설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며 결국 하루키는 뭘 말하고자 뜬금없다면 뜬금없는 부제까지 달아가며 이런 소설을 썼는지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저부제(장밍밍)의 [고로, 철학한다]를 읽는데 하이데거장에서 크게 감명받았다.

하이데거에 대해서는 한나 아렌트의 유부남 애인, 나치에 협력했던 철학자 정도로만 알고 있던 나는 장밍밍의 글에서 눈이 번쩍 뜨였다. 하이데거 철학의 요지는 차치하고, 우선 그가 지닌 스토리 자체가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자연인으로서 하이데거는 철저히 루저였다. 그가 나치의 품에 안긴 순간 그의 비참한 말로가 결정된 셈이었다. (172)

 

그런데 어떤 변명을 늘어놓든 하이데거가 이익을 위해 나치에 협조했으며 궁지에 몰리자 자신의 유대인 스승 후설과 유대인 연인 한나 아렌트, 친구 야스퍼스를 내팽개쳤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이데거는 인격적으로 고상한 인물이 아니었으며 한 치의 에누리도 없는 소인배였다. (172~173)

 

반전은 다음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자연인으로서의 하이데거는 그리 떳떳한 사람이 아니지만 철학자 하이데거에게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젊은 시절 신학의 굴레를 박차고 나와 철학을 연구했고, 나치에게 버려진 후에는 낭만파 시인 횔덜린의 시와 사랑에 빠졌으며, 말년에는 아무도 모르는 숲속에 파묻혀 노자의 『도덕경』을 연구했다. 어느 단계에서든 그는 사색가로서 찬연한 지혜를 발산했다. (173)

 

재승박덕(才勝薄德).

 

나는 하에데거의 철학을 읽으면 눈물이 터져 나올 정도로 어떤 힘같은 것이 느껴진다.(173)

 

[존재와 시간]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같은 글을 읽고 눈물이 터져 나올 정도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지적 능력과 감수성.

하이데거는 나치와의 전력 때문에 말년을 깊은 숲속의 작은 오두막에 숨어 살았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는 횔덜린의 시를 연구했다. "인간은 시적으로 대지 위에 거주해야 한다."

하이데거의 본 저작도 저작이지만 나는 그가 참담한 말년을 대지와 접하면서 읽었을 횔덜린의 시가 궁금했다.

하이데거는 1930년대 중반부터 이미 횔덜린을 연구해왔다지만 신상에 어려움이 생긴 이후 매달린 연구가 어떠했을지.

횔덜린의 시.

시는 어떻게 읽는가. 시를 어떻게 감상하는가. 다시 난제.

 

메타포와 시. 생각은 그렇게 흘러 '시인수업' 시리즈로 나온 엄경희의 [은유]에서 딱 멈췄다.

엄경희는 처음 접해보는 저자다.

현재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데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된 바 있고 미당 서정주 시를 연구한 저서도 있다. 근데 또 예전에 민주노동당 지지선언 명단에도 이름을 올린바 있다.

정치분야가 아니더라도 조선일보에 대해서는 학을 떼는 사람이라 어쨌든 이 신문에 기고한다든가 하는 사람을 선입견을 가지고 보기도 하는데 엄경희의 경우는 조선일보와 미당, 두가지에서 벌써 경고등이 켜졌었다.  

난 조선일보는 ㅈ자도 쳐다보기 싫다. 지 아무리 상식과 정보에 도움이 된다해도.

조심스럽게 시작한 [은유]를 읽고 난 지금은 엄경희의 글을 더 읽어보고 싶다.

시리즈 제목답게 '시인수업'을 더 받아보고 싶다. 은유의 세상인 시.

 

포켓북 형태의 작고 얇은 분량의 책이지만 곱씹어 읽어볼만한 문장들과 내용으로 꽉 채워져 있다.

은유의 전복적인 의미부터 은유가 문학에서 차지해온 위상의 변화와 이론의 변화까지.

 

은유metaphor는 그리스어 metaphora에서 온 것인데 '넘어로'라는 의미의 meta와 '가져가다'라는 의미의 pherein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하나의 대상이 다른 대상으로 옮겨감을 가리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은유란 부적절한 명사를 옮겨서 붙이는 것인데 이는 유(類)에서 종(種)으로, 혹은 종에서 유로, 혹은 종에서 종으로, 혹은 유추의 관계에 따라 이루어진다", 라고 정의내렸다.

여기서 전이(轉移 transference)의 개념을 만들어냈다. 

 

"시인은 사전속에 결박된 단어들을 해방시키고자 한다." (13) "여기에는 시가 도달하고자 하는 예술적 야심이 담겨 있다."

은유는 남에게서 빌릴 수 없는 것이며, 타고난 천품을 길러내는 징표라고 말함으로써 은유란 언어의 일상적인 양상에서 일탈될 것이며 은유적 표현은 특별한 정신행위라는 시각을 드러낸다.

은유가 단순히 수사법의 하나의 '장식'이 아니라 의미의 상호작용까지 나아가는 극도의 고급을 지향해나가는 단계를 설명하는 데서는 오랫만에 감탄이라는 감정을 기억해내야 했다.

예시처럼 다루고 있는 몇편의 시의 해석, 은유의 해석은 고차원적 사색과 잘 벼려진 감수성의 향연을 보여준다.

시를 읽고 싶게 한다. 더 많은 시를.

 

은유란 한 마디로 말해 사유의 층위가 움직여 의미의 양을 풍부하게 만드는 언어운용방식이라 할 수 있다. 원관념 A가 B로, C 로, D로 움직여갈 때 하나의 고립된 세계의 문이 열리고 섞이는 것이다.

 

 

왜 하루키는 '현현하는 이데아', '전이하는 메타포'같은 부제를 따로 단 소설을 쓰게 됐을까.

왜 부제를 만들었나

이를 통해 하루키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다시 한번 더 강조하지만 이 놀이는 움직이는 사유의 유희라할 수 있다. 움직이지 않으면 층위변동도 확장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루키는 인터넷시대 짧은 글, 짧은 사유에 대항하는 작업으로서 소설을 자신의 역할이자 임무로 여기고 있다고 밝혔다.

 

움직이는 사유의 놀이(유희)

 

하루키의 [기사단장죽이기] 2권 '전이하는 메타포' 에서는 내가 메타포의 세계로 들어간다. 

무엇이 움직였는가, 어디에서(A) 어디로(B) 전이되었는가, 어떤 층위인가.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이데아는 기사단장의 외피를 입고 나타난다. 

모차르트의 <돈죠반니>에서 기사단장은 초반에 나왔다가 돈 후안에 의해 칼에 찔려 죽음을 당한다. 초반에 죽어버린 기사단장은 극 후반에 석상으로 나타나 돈 후안을 초대하고 그를 지옥으로 떨어트려 죽음에 이르게 한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이 모티프는 모차르트와 아버지와의 관계선상에서 극적인 긴장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가면을 쓴(얼굴없는) 남자가 의뢰한 레퀴엠의 작곡과 더불어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이 모든 게 버무려져 있는 느낌이다. 오쓰카 에이지식대로 말하자면 '샘플링'.

 

요양원에 누워있는 도모히코 앞에서 <기사단장 죽이기> 그림과 같은 행동을 재현함으로써 '나'는 기사단장의 외피를 쓴 이데아를 죽이고 메타포의 세계로 들어간다. 일견 지옥으로 떨어짐. 이데아를 죽이자 메타포의 세계가 열린다. 메타포의 세계는 모든 연관성의 세계에서 오로지 '나'의 생각과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

 

나는 화가이다. 추상화로 시작해서 초상화를 그리며 생활한다. 아내의 갑작스런 이혼 통보로 집을 나와 아마다 도모히코의 집에 머물게 되면서 오랫만에 '나'는 추상화의 세계를 다시 불러내고자 애를 쓴다. 그러나 아무것도 그리지 못한다. 일종의 블록현상(writer's block)을 겪는다. 이 무렵 어디선가 나는 소리에 이끌려 다락방의 숨겨진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를 발견한다.

이후 나에게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 이상한 일들의 절정은 마리에의 실종이다. 마리에의 실종은 이데아를 죽이고 '메타포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한다. 그곳에서 '나'는 메타포의 강을 건넌다.  

 

'전이하는 메타포'. 이제 A는 무엇이고 B는 무엇으로 전이되었는가. 이데아를 죽이고 비로소 창작의 뮤즈를 찾아가는 것으로 해석하면 어떤가.

메타포의 세계 이쪽에서 강을 건너 저쪽으로 가는 이유는 사라져버린 마리에를 찾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내'가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하루키는 어쩌면 작가로서의 어려움과 동시에 그럼에도 건너야 하는 운명같은 임무를 은유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가 인터뷰에서 밝혔듯 현재 이야기, 소설가가 처한 상황, '흑백을 구분짓는 인터넷'과 '단편적 사고, 짧은 문장'의 시대와 대면하고 있다는 작가로서의 자각을 은유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작가의 어려움. 작가의 블록.

[하이퍼그라피아](앨리스 플래허티)라는 책을 떠올리고 찾아봤더니 그책의 마지막 장은 참으로 의미심장하게도 '은유, 내부목소리, 뮤즈'이다.

 

이책을 읽었던 때가 까마득한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찾아봐야 할 것 같다.

하이퍼그라피는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생각들을 써대는 창작자의 상태이고 반대로 블록현상은 쓸 수 없는 상태다.

소설가의 임무가 재고되어야 할 지금, 하루키는 소설가가 겪는 블록현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강을 건너게 해주는 '얼굴없는 남자'. '나'는 '얼굴없는 남자'의 배에 올라타 강을 건넌다.

그전에 강을 건너게 해줄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그 '대가'는 마리에의 '펭귄 부적'이다. 그 '펭귄 부적'을 대가로 주고 나는 강을 건넌다.

이 장면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는 '하데스의 강', 죽음의 강을 건너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작가로서는 죽음의 도하(渡河)일지도 모르는. 죽음같은 도하를 이룬 뒤에야 작가는 글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속에 와타루 멘시키의 와타루는 '건너다'이다. 와타루를 '건너야'만 한다. 와타루가 은유 혹은 상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은유의 필연적 과정에 있는 남자이다. '믿음'이라는 키워드와 관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 포스팅은 머리속에서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 계속 읽기 연장선에 있다.

이데아를 죽이고 열리는 메타포의 세계에서 일종의 죽음의 도하를 하는 이야기작가 하루키.. 오늘 내가 떠올린 하루키.

 

 

 

 

 

 

 

 

 

 

 

 

 

 

 

 

 

폴 리쾨르 사상의 연구서 정기철의 저 책을 엄경희는 어려운 리쾨르의 은유이론을 매우 친절하고도 상세하고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은유연구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참고문헌'이라고 한 반면 이런 책 소개에서 반드시 만나야하는 로쟈님의 2006년 페이퍼에는 조금 읽어보고 도서관에 반납한 책이라고 되어 있다. 

연구자들에게는 손꼽힐만하지만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언급했다.

최근 은유관련 소개서에 다시 이 책이 들어있는데 아마도 기억하지 못하신 것은 아닌지.

 

폴 리쾨르의 은유까지 아우르는 은유의 이론에 대해서는 보다 전문적이고 깊이있는 독서를 원한다면 관련 도서까지 읽어보면 좋겠지만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괜찮다.

 

엄경희는 마지막에 은유는 궁극적으로 고착된 것, 소멸된 것에 활력을 불어넣고 보다 가치있는 세계를 향해 사유의 움직임을 열어놓는 풍요의 지평이다고 찬미한다.

A에서 B로 건너가는 순간이동의 긴 여정은 놀이의 즐거움과 삶의 진지함이 갈마드는 영역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한 위대한 예술가가 구현해낸 정교한 사유와 미감을 동시에 거머쥐게 된다고 끝맺는다.  

 

시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들게 한 책이었다.

시를 더 깊이 읽을 수 있는 도구를 하나 쥐게 된듯한 느낌. 각 다른 저자들이 다른 주제들을 다룬다. [패러디]와 [제유]가 이미 나와있고 앞으로 [직유](유성호), [환유](권혁웅)가 계속 나올 예정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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