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단장 죽이기]를 막 완독한 참이다.

마지막은 하루키로서는 처음 시도해보는 결말이라서 다소 놀랄만하다. 아, 결국 이런 결말도 내는구나 싶었다. 

나중에 언젠가 하루키에 대해 뭐라도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피곤한 편이다. 

반복되는 어린 소녀에 대한 시선도 유난히 불편함이 느껴졌고('반복이 리듬을 만든다'지만 대놓고 이러니 너무 편하게 익숙한 리듬에 올라탄거 아닌가 불만스럽기도 하다) 말했다시피 꿈을 빙자한 강간 의식은 불쾌함까지 느껴졌다. 하루키를 너무 많이 읽은겨..

어쨌든 이데아니 메타포니 이중메타포니 머리 아파가며 읽어가는데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아, 이건 아닌데.. 싶은 감이 온다.

왜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렇게 처리해야 했나. 재현이 무슨 의미가 있지?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린 아마다 도모히코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마사히코에게까지 말하지 않고 보여주지 않고 지켜져야 할 것이 무엇인가?

그 그림은 상처받은 도모히코의 차마 발설할 수 없는 사연이, 감정이 폭발해 담겨있는 것이었는데 왜 꼭 그렇게 처리했어야 했을까.

아주 단순하게 보면 이 소설 역시 '나'의 분노, 폭력성을- 즉 내 의식 깊은 곳(이른바 지하2층)에 도사린- 우회적으로 드러냈다가 '치유' 내지는 현현화함으로써 휘발시키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지도 모른다. 

("이대로 헤어지더라도 친구로 지내줄 수 있어?" 나의 아내는 더이상 같이 살 수 없다고 이혼통보를 해놓고서 짐을 챙겨 집을 나서는 '나'의 등 뒤에 '부탁이 있다'며 이런 말을 꺼낸다. ....)

어이없는 독해일수도 있지만, 그러니까, 한 사내가 자신의 '분노'라는 감정을 인식하기까지의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독해. 자신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현실에서는 인지하지 못하는 감정 지체자의 글쓰기.

 

그리고 세대별로 이게 맞는건지 계산이 잘 안된다.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린 화가이자 1937년 빈으로 유학가서 1938년 일본으로 송환당해 돌아와야 했던 전쟁세대인 아마다 도모히코는 1910년~1926년생에 해당하는 다이쇼세대 아닌가? (다시보니 92세인 걸로 나온다. ) 베이비붐 세대의 부모(베이비붐세대는 멘시키에 해당할 것이다. 정확한 나이는 나오지 않지만 대략 40대 후반에서 60세까지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아들인 아마다 마사히코는 '나'와 같은 36세이다. '나'는 이 일을 겪은 후 몇년 뒤에 동일본 대지진(2011)을 겪는 세대다. 그러니까 1970년대, 그것도 70년대 후반의 아이들일텐데.. 아버지 도모히코와는 한 세대를 훌쩍 넘는 나이차이가 나는 셈이다.

소설이 나오자마자 일본 우익에 의해 욕쳐먹은 하루키의 역사인식을 주의깊게 볼 이유가 우리에겐 있지 않나.

전쟁세대가 저지른 일을 하루키는 소설속에서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도모히코는 전범도 아니고 제 나라 일본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제국전쟁의 피해자인건 분명하다. 

화가의 꿈을 안고 빈에 유학갔다가 맞게 된 독일의 오스트리아병합. 그로인한 저항운동에 참여했다 모든걸 잃고 독일과 일본과의 정치적 타협에 의해 송환된 채 돌아와 젊은 시절을 은둔하며 보낸다.  

도모히코는 '내'가 그 그림을 발견하기까지 함구했다. 그리고 이젠 죽음 앞에서 의식을 놓아버렸다.

([1Q84]에서 덴고의 아버지 역시 요양원에서 의식을 잃고 누워 있다. 치매를 앓는다. 기억을 잃어버린 걸로 설정되었다. 아마 하루키 개인사와도 관계 있을 거지만, 하루키 아버지 또한 하나밖에 없는 아들 하루키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결국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과 중국에 얽힌 이야기를 남겼다고 하니 덴고의 아버지, 마사히코의 아버지 도모히코 모두, 하루키가 아버지에대해 사고하고 경험한 모든 것일 수도 있는듯하다.)

전쟁세대의 침묵. 강변보다는 차라리 침묵이 나은 것인가. 물론 예술가로서 그는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을 남겼다. 그 그림속에 자신이 본것, 자신의 마음을 남겨놓았다.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후대인 '나'의 문제라는 것인가. 

그렇게 발견한 그림을 '나'는 어떻게 하는가. .......

하루키다운 방식이라는 게 맞을 듯하다. 

그의 역사인식은 [해변의 카프카]에서도 [태엽감는새]에서도 비슷했던 것 같다. 

일본의 진정한 반성없는 역사인식이 어디서 기인하는지도 볼 수 있다.

하루키에게서도 이 역시 반복되니 좀 짜증이 난다. 물론 내가 오독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마침 읽을만한 책이 나왔다.  [이야기론으로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야자키 하야오].

저자 오쓰카 에이지는 문화비평가라는데 소설작법을 가르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책에서는 하루키와 하야오의 '이야기구조' 특히 신화적 구조를 분석한다. 하루키 소설의 이야기구조에 대해 좀더 아는척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일듯 예전에도 많이 지적된 내용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건 오쓰카가 [기사단장 죽이기]에 대해 쓴 평이다.

오쓰카는 하루키의 '피해자 사관'을 비판한다. "역사를 신화적인 '수난'의 상징으로 인용해온 행위의 반복 그 이상은 아니다'고 한다.

"죽임을 당한 입장에 서서 일본을 규탄하고 있지 않다" '죽이는 쪽의 윤리'에 서 있다, 는 것이다.

(연합뉴스, "죽이는 쪽의 윤리"…하루키 소설의 '피해자 역사관' (김계연 기자)에서 인용)

 

하야오의 작품은 본 게 몇작품 되지 않은데 이번 기회에 다뤄진 작품만이라도 읽어볼만 하겠다.

 

멘시키는 베이비붐 세대로 볼 수 있다. 그가 일으킨 엄청난 부.

그러나 하루키는 멘시키를 경계한다.

그가 더할나위 없이 굉장히 흥미로운 사내지만, 그는 거의 분명한 자신의 아이에 대한 '믿음'과 거리를 둔다.

'나'는 "그래도 멘시키처럼 되지 않는다."

'믿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기사단장'으로 현현시킨 분노와 응징의 힘(나는 그렇게 믿는다)으로 세상을 향한 긍정과 낙관을 밀고 나갈 것을 조용히 믿는 것.

하루키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봐줘야할 것 같다, 지금으로서는..

 

 

 

 

 

 

 

 

 

 

 

 

 

 

 

 

오쓰카 에이지는 어떤 책을 쓰는지 몇권 더 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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