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이 어떻게 될지, 사실 한치앞을 확신할 수 없다. 

탄핵이 3월 둘째주안에는 이뤄질 거라고 어느 정도 일정이 나와있지만 ...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 

오늘 아침에는 기어이 대선 주자들에도 헌재 재판관들에게도 경호를 강화한다는 소식까지 들려온다.

백색테러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생각한다. 저들의 말과 행동이 심상치 않다. 조심해서 나쁠 게 없다. 


너무나 분명해 보이는 사안이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라고 그 사람의 생각과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기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인지 요새 부쩍 현실을 분석하고 해석하거나, 현실인식에 도움이 될만한 책들을 찾는 것 같다. 

내마음이 그렇다.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를 구입했다. 

국가를 주제삼은 국가론 교양서로 읽을만 할 것 같아서다. 

더불어 최근에 나온 책들 중 관심가는 정치, 사회과학쪽 책들을 장바구니에 담으며 도서관에 들어오면 읽어야겠다고 미뤄둔다.

유시민의 책 말미에 붙은 주를 보다가 참고문헌을 골라봤는데 인물의 전기를 참고한 것은 주로 브리태니커 사전이었다. 

지식검색을 할때 주로 구글링하거나 포털검색, 위키피디아 등을 이용해왔는제 의외로 브리태니커를 이용해본적이 없다. 

모르고 있었다. 이번에야 아, 검색기능 하나를 놓치고 있었구나 깨달았다. 맹하다.  


SF 바람이 며칠 계속 불더니 결국 아서 클라크의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와 몇권의 SF도 구입했다. 

[파운데이션] 시리즈도 그동안 구입하지 못했던 이빠진 것 같던 누락책들을 구입했다. 


그러나 정작 손에 들고 읽고 있는 건 슈테판 츠바이크의 평전들이다. 

왜 갑자기 오래전에 읽었던 몽테뉴에 관한 짧은 평전 [위로하는 정신]을 읽을 생각을 했던가. 

나보코프의 소설 [절망]을 읽고 이 소설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에 도전한 소설 어쩌구 하는 평을 보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고, 박형규가 번역한 [이중인격]을 읽기 시작했고, 갑자기 도스토예프스키 관련 책을 찾다가 츠바이크의 평전시리즈를 보게 됐고, 츠바이크 책 리스트를 보다가 문득 가지고 있던 [위로하는 정신]이 눈에 들어왔고 읽기 시작했는데 뜻밖에도 아주 흥미로웠다. 예전에 읽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20세기 전쟁을 겪으며 런던으로 피신했다가 남미 브라질로 유랑한 츠바이크 말년이 여러 작업을 하면서도 특히 이 16세기 종교전쟁 시기에 머물렀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한편으로 칼뱅, 루터, 토르케마다가 있고 다른 편에 에라스무스, 몽테뉴, 카스텔리오가 있었다. 

확신에 찬 신념을 타인에 대한 압박과 학살로 관철시킨 이들에 맞서 관용과 포용으로 싸웠던 이들. 일단 구도는 그렇다. 

16세기에 벌어진 종교개혁이니 종교전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고작해야 학교 다닐때 외웠던 수준인데 그나마도 이젠 잊어버렸다. 막연히 종교개혁이라고 불리면서 개혁적 측면만을 받아들였고 그뒤로 관심갖지 않았다. 

(그리스로마신들이 아니라) 종교에 대한 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개혁인가 신앙을 빙자한 광신과 불관용이었던가. 새삼 진지한 주제였다는 생각이든다. 이참에 개략적으로 들여다봐야겠다.


몽테뉴에 대한 회고로 시작하는 츠바이크의 서문에는 몽테뉴의 [수상록]이 그의 말년에, 유럽에서가 아니라 브라질에서야 비로소 자신에게 그 의미를 드러냈다고 고백한다. 

서문은 읽어볼만하다. 


츠바이크는 몽테뉴를 "아직은 젊어서 경험이 부족하거나 좌절을 겪은 적이 없는 사람은 그를 제대로 평가하거나 존중하기가 어렵다" 말한다. 


이런 집단 광증의 시대에 가장 내밀한 자아에 충실하기 위해선 얼마만한 용기와 정직성과 단호함이 필요한지를, 그리고 이 거대한 파멸의 한가운데서 정신적. 도덕적 독립을 흠없이 지키는 일보다 세상에 더 어렵고도 심각한 일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인류의 품위나 이성에 대해 스스로 의심을 품고 그것에 대해 절망해봐야 비로소, 그런 전체적인 무질서 한가운데서도 모범적으로 똑바로 서 있는 어떤 개인을 진짜로 찬양할 수 있게 된다. (서문 중에서)



아직 [수상록]을 읽어본 적이 없고 가지고 있지도 않다. 

나는 아직 젊고 경험이 부족한 모양이다.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선택해야 할 비극적 상황에서 나는 '옳은 쪽'에 서서 장렬하게 싸우는 이를 지지할 것 같다. 자신을 피로 더럽히더라도 대다수 인민을 위해 싸우는 자를 지지할 것 같다. 

자신의 고고함을 지키기 위해 대다수 인민을 적에게 던져주는 자를 옹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수상록]을 언제 읽을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다. 


인류에게 절망해 고개를 돌려 남미 대륙 브라질에서, 가지고 있는 자료도 변변치 않은 채 자신의 작업을 했던 츠바이크가 왜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를 탐구대상으로 삼았는지, '도덕적 독립을 흠없이 지키는 일'에 그토록 끌렸는지 그 마음이 다가온다. 그는 브라질에서 자살했다. 


나는 아직 그의 에라스무스([에라스무스 평전])도 카스텔리오([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도 읽지 못했다. 

그들의 생애는 또 어떠했는지, 칼뱅과 루터는 또 어떠했는지 궁금해진다. 

나의 독서 계획은 늘 엉뚱한 데로 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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