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가 막힌 타이밍아닌가 싶다.
서울을 떠나 이곳에 온지 11개월이 지났다. 내달이면 1년. 딱 이때 이 난리가 났다.
언제나 중심은 서울이었지만 결국 희생되는 건 지방이었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적어도 나는) 가끔 악몽처럼(이제 다시는 결코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저렇게 서울은 축제처럼 모였다가 흩어진 그 시점 서울이 아닌 다른 어딘에선가 비극이 시작되는 건 아닌가 라는 환상을 보곤 한다. 고립된 채 말이다. 지금 다시 어딘가 누군가가 고립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그렇게는 안될 것이다.
사태 벌어진지 3주가 흐르고 있는데 그동안 읽고 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도저히 잘 읽히지 않았다. 읽다가 둔 [스토너]를 잡고서 완독했다. 많은 이들이 좋다고 할 때는 마땅히 그럴만하다. 좋다. 가슴아픈 소설이었다고 할까. 이 소설에 대한 탁월한 리뷰는 이미 나와 있기에 더 첨언하지 않아도 괜찮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순수한 감동을 오래 느낄만한 작품이다.스토너 그는 그냥 돌처럼 거기 있는 사람이다. 움직이지 않는다. 불행한 결혼에도, 스스로 벌하는 딸의 망가져 가는 모습에도, 그의 생에서 가장 따스했던 연인과의 한때도 그는 움직이지 않다가 맞이하고 보낸다.
결국 죽음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고작 1권 <스완네 집 쪽으로> 2부 스완의 사랑에서 이 소설을 내가 계속 읽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됐다.
[잃어버린 시간]은 총 7권으로 그중 이 1권이 가장 재미없다고 [고전의 유혹] 잭 매니건이 언급했기에 그러려니 하고 읽고 있는데 2부 스완의 사랑은 정말이지 꽤나 인내심을 요한다.
부르주아지 스완은 전통적 귀족가문인 베르뒤랭가의 살롱에서 오데트를 만난다. 스완 자신의 여인상도 아닌 오데트를 스완은 보티첼리의 그림속 여인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질 들뢰즈가 간파했듯이 [잃어버린 시간]은 추억의 전시장이 아니라 '기호들'을 배워나가는 과정이다. 1부의 화자 나(마르셸)가 아니라 3인칭으로 옮겨서 보게되는 스완의 사랑은 연인 오데트에게 '감춰져 있는(감춰져 있다고 보이는)' 세계가 던지는 기호들을 해독하면서 환희와 질투 사이를 진동하는 지랄맞은 시간이다.
오, 나는 이런 진동의 시간을 견딜 수 없다. 나는 왜 이런 게 재미없을까.
[잃어버린 시간]을 완독하기 위해 몇번의 독서 위기를 만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첫번째 고비다. 지금 3주째 붙잡고 있지만 건너 뛰고 읽으면 안될까를 몇번씩 생각한다.
[스완의 사랑]이 지겹고 지쳐서 [스토너]로 책을 바꿔서 머리를 식혔고(?) 다시 도전했다가 또다시 지쳤기에 다시한번 딴 책으로 우회했다가 돌아와야 할 것 같다.
신간도서로 구입한 책들은 맨부커상 수상작들이다.
맨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에서 한강의 수상으로 맨부커상이 특히나 관심받고 있는 모양인데 정작 한강의 작품은 읽은 게 없다. 내가 우리나라 작가들의 글을 안읽어도 너무 안읽는다. 번역문장에 너무 길들여지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되기까지 한다.
2015년 맨부커상 수상작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말런 제임스)과 2005년 수상작 [바다](존 배빌).
저마다 화제성으로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작품인 모양이다.
[일곱건의]는 '심사위원 토론 두시간만에 만장일치 결정', 자메이카의 전설적 레게 황제 밥 말리의 암살미수산건에 대한 이야기...
'살인', '역사', '밥 말리'... 키워드들이 충분히 끌어당길만하다.
2권 뒷표지에는 이런 문구가 채택되어 박혀있다.
위험한 거지, 평화라는 건.
평화는 사람을 멍청하게 만드니까.
좋은 시절은 누군가에게는 나쁜 시절이야.
자메이카라는 익숙치 않은 공간과 역사, 1976년 실제 사건. 평화콘서트를 준비하던 밥 말리의 암살미수사건.
인용한 말은 분명 악의 편에 선 사람의 말일 것이다.
혼돈과 폭력, 파괴의 시기에 이익을 얻는 사람의 말일 것이다.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로쟈님 말대로 '어떤 주제를 어느 수준으로 다루는지' 궁금해지는 책이다.
오늘도 광장에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나도 오후엔 이곳에서 벌어지는 집회에 참석할 예정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박근혜의 정체는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로 처참한 수준임이 드러나고 있다.
괴물도 아니고, 아니 괴물은 괴물인데 쓰레기같은, 바닥의 인간이다.
이제 저 괴물은 가면도 벗고 날것의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가히 말로 할 수 없는 천박함이고 벌거벗은 민망함을 보게 하기에 이런 보도듣도 못한 대상과의 싸움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끝이 어떻게 될지 긴장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견딜만하다. 우리의 싸움은 이렇게도 명랑하기도 하니까. 저 평화콘서트는 어떻게 되는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