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내가 가지고 있는 번역서 중 천병희 선생의 번역의 책이 가장 많은 듯하다.
어쩐지 자꾸 과거로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
19세기로 가더니, 이젠 그리스신화와 비극의 세계로 가고 있다.
예전에 그다지 마음이 가지 않던 그리스비극 작품들을. 끝내는 ... 읽어야 하는구나, 로 마음이 바뀌었다.
이게 저 유명한 '음수사원(飮水思原)'에서 시작된 건 아니고, 호가스 출판사에서 셰익스피어 사후4백주년을 맞아 기획한 리라이팅 작품을 읽어볼까 하던 중 [시간의 틈]의 원작인 [겨울이야기]를 보려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겨울이야기]는 번역본이 몇 종 나와있지 않다. '이끌리오 달궁'이라는 출판사에서 이윤기. 이다희가 번역한 [겨울이야기]를 빌렸다
이윤기 선생의 서문격의 글이 있는데, 선생도 [겨울이야기]를 처음 읽을 때 재미도 느끼지 못했고, 이야기 자체가 낯설었다고 한다. 흔히 고전을 읽을 때 느끼게 된다는, 읽고 나서 이게 도대체 뭔 이야기? 혹은 이게 고전이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거야, 왜?... 이런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선생은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셰익스피어 작품이 고대 그리스 비극과 희극에 원류를 대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고 이후 호메로스부터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같은 신화 작가들,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뤼피데스 같은 그리스 비극작가들, 헤로도토스, 플루타르코스 같은 역사가들로부 흘러온 길고 깊은 강(13)을 선생은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지금으로선 어렴풋하지만 어떤 주제를 향해 더듬어가는데 그리스신화나 비극을 빠뜨릴 순 없을 것 같다.
[철학자 오이디푸스]가 이 시기에 딱 나온 건 화로에 장작더미 하나 더 보태준 느낌이다.
오이디푸스만 하더라도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만만한 사내였다. 답을 맞춘 사내. 결국 마지막 맞춰야 할 답이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 그 오만의 대가로 눈을 찌르고 나라를 떠나는 운명을 받아들였던 사나이.
그런데 소포클레스가 죽음을 앞두고 쓴 마지막 작품이라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는 자신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것, 오로지 신들이 정해놓은 운명앞에서 자신은 희생당했다는 격정을 토로하고 신들에게 다시 받은 예언, 자신의 죽음을 돌보지 않는 자들과 나라에 내릴 저주를 안고 눈을 감는다.
(오이디푸스)
.......
필연과는 싸우지 말자꾸나
(191행. 161)
그런데.. 무엇이 필연인지 모른다는 게 함정 아닌가?
천병희 선생은 작품 소개에서 이렇게 결론내린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신들은 인간들이 예견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오이디푸스가 제 손으로 제 눈을 멀게 하지만,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는 신과 인간의 대립이 지양되어, 신은 수많은 시련을 겪게 한 뒤 인간을 긍휼히 여기고 죽음을 일종의 은총으로서 내려준다. (152)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에게 내려진 신탁의 완성의 일면을 보여준다.
크레온에게 닥친 비극은 오이디푸스의 죽음과 그 돌봄과 관련있다.
안티고네 말고 크레온에게 초점을 맞춘 리라이팅도 흥미있을 것 같다.
크레온은 이후 어떻게 됐나?
크레온은 누가 위로해주지?
천병희 선생의 저 작품소개대로 받아들일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제 막 대략의 줄거리만을 파악했을 분이니.
오이디푸스와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의 프레데릭과의 차이는 있을까.. 차이가 어마어마해 보인다.
문득 든 생각이다. (수정하자면, 오이디푸스는 신화적 인간이다. 신탁의 결말에 끌려가는 듯 하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관철하는 명민하고 급하고 적극적인 인물이다. 반면 프레데릭은 19세기 프랑스를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는 '낭만주의적 환상'(김화영)과 몽상속에 '인생을 살지 않고 꿈꿀 뿐'(김화영)인 인물이다. 모든 게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고 사라지는 반복 속에서 삶은 관조적으로 보이며 스쳐 흐른다. 하나는 고대 정치 공동체에서 디오니소스축제 기간에 벌어지는 흐드러지는 감정 고양을 위해 상연되던 비극의 인물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에 개발된 소설이라는 형식 속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달라지겠지만, 오롯이 인물만으로 보자면 강한 의지로 몰락하는 인물과 의지 박약의 몽상속에서 꿈꾸듯 '그때가 제일 좋았다', 고 말하며 전락(굴러떨어지다)하는 인물을 경험하는 거 아닐까.)
여튼, 천병희 선생과 한동안 함께 해야 할 것 같다.
이제 고작 비극작품 정도만 접하는 단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