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 모르는 사람들을.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늘 몰락한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 나를 뒤흔드는 작품들은 절정의 순간에 바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들은 왜 중요한가. 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책 머리에 - 




이제는 너무 유명해졌다고 할까...

몰락하는 자들에 대한 이 매료가. 
















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카](2008, 문학동네)를 다시 읽고 있다. 

가히, 2016년 여름의 독서라 하겠다. 

2009년에 읽었을 때는 시를 다룬 부분을 읽지 않았다. 

다시 읽는 책머리에서 부터 프롤로그, 그리고 1부에 이르는 글들은 새삼 감탄을 자아낸다.(상투적인 말밖에 쓸 수 없는 나의 무능함을 한탄한다).


이번에는 드디어 시를 다룬 2부를 읽기 시작했는데 ... 2000년대의, 법이 없는 '엽기적 시공간'이 주는 인식론적 불가해함과 '변태스러움을 즐기는(듯해 보이는)' 미학적 당혹스러움과 이 '즐기는 듯하는' 주체들에게서 느껴지는 비애감이 주는 상실감을 풀어가는 그의 논리를 따라 가노라면... 역시 난해하면서도 그냥 아름답다. 



...오늘날의 주체들은 큰 타자가 몰락한 곳에서 자유롭게 정체성의 유희를 즐기고 있다는 식으로 결론짓는 것은 얼마나 순진한가. '정체성의 유희'라는 비평적 상투어는 이론적 허상에 불과하다. 그들은 포스트모던하게 유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앓고 있다. (210)


현실이 전반적으로 가상화되면서 실재(the Real)에 대한 열망은 강해졌고 그것은 도착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드러났다. 그들은 사라져가는 '나'를 확인해야 했고 구별되지 않는 '나'를 증명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런 곤경이 얼마간 도착증적 태도를 초래했고 이런 환경이 새로운 시를 촉발했다. '나'를 말할 수 없다는 불가능의 상황이 역설적이게도 '나'를 다르게 말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고 해도 좋다. 그들의 과제는 도착증을 실연(實演)하면서 도착증과 실연(失戀)하는 것이었다. (211)


- 진실은 앓는 자들의 편에 : 2005년, 뉴웨이브 진단 소견, [몰락의 에티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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