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 태종무열왕과 통일전쟁시기 신라를 읽는다는 것.

 

문무왕은 진짜로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동해 바다에 묻혔나?

 삼국 본기를 읽은 지금까지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신라 문무왕 본기였다. 상,하로 기록된 문무왕대는 본기 중 가장 길다. 아버지 김춘추 태종무열왕이 당을 끌여들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를 이어 문무왕은 고구려까지 무너뜨렸다. 일이 많았기도 하거니와 문무왕과 당 고종, 신라와 당 사이에 오갔던 외교문서를 거의 그대로 싣고 있기 때문에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헤아리기 힘들게 부식은 이 문서들의 내용을 무척이나 성실하게 옮겨놓았다. 후세에 어떤 뜻이 전해지길 바란 것일까?

 

어쨌든 고구려와 백제를 합하여 한 나라를 이룬 뒤 또 하나의 남은 문제는 당과의 관계였다. 고구려와 백제를 치기 위해 끌어들여 온 외세였지만, 그 외세가 일이 끝났다고 '죽엽군' 사라지듯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훈은 당에 보내는 글에서 문무왕 그는 거의 빌고 있다고 썼다. 맞다. 구구절절하고도 통절하게 이유를 설명하고 선처를 구하고 있다. 문무왕은 당의 (臣)이 되어 충성하고 있음을 빈번히 고한다. 그러다가도 국가(唐)의 은택은 비록 한이 없지만 신라의 충성도 또한 알아 주어야 할 것이외다 처럼 일방적일 수만은 없음을 완곡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그리곤 군사를 몰아 당 원정군을 쳤다. 대국 당을 앞에 두고 문무왕이 겪었을 신산함을 느낄 수 있다.    

 

태자 시절에 당에 거의 볼모로 가 있으면서 당을 보았고 재위 20년 동안 전쟁의 시기를 살았던 왕은 56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그의 마지막 유조(遺詔)의 정조는 허무다.

운은 가고 이름만 남는 것은 고금이 한가지라 황천에 돌아간들 무슨 한이 있으랴. . 아! 산곡은 변천되고 세대는 바뀌기 마련이다. . 옛날 만기(萬氣)를 총괄한 영웅도 마침내 한무더기의 흙이 되어 초동 목수는 그 위에 노래하고, 여우.토끼는 그 곁을 구멍뚫는다. 한갓 자재를 허비하여 역사의 조롱거리를 끼치며 헛되이 인력만 수고롭게 할 뿐 죽은 넋을 살릴 수 없는 것이니 고요히 생각하면 그지없이 슬픈 일이다. 이와 같은 것은 즐겨하는 바 아니니 죽은 뒤 10일이 되거든 고문의 바깥 뜰에서 서국의 식에 의하여 화장하고 필요한 것이 아니면 다 폐하고 율령과 격식도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개혁하라. 소속 관원은 즉시 시행하라.

 

흔히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동해 바다에 묻혔다는 얘기는 후세 사람들의 기원이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 왕이 평시에 죽어서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고 나와 있다. 왜구가 아니라 문무왕을 끈질기게 괴롭혔던 당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고 믿는 편이 더 그럴 듯하다. 그래서 중국에서 한반도로 건너오는 길목이나 서해 바다 어디에 묻혔다면 완전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무왕의 조국은 신라땅이었다. 그리고 신라땅의 바다 동해였다. 문무왕의 나라를 지키는 용의 기원은 뒤를 이은 신문왕대의 만파식적으로 완결된다. 부식은 <잡지>편에 이 만파식적 얘기를 적었지만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부식이 거부했던 아버지 문무왕으로부터 받은 평화와 치유의 악기를 일연은 엄연하게 밝혀 놓았다. 여기에 이르면 삼국사기를 읽으며 거칠어진 마음이 무화되는 듯 하다. 문화선전용이면 어떠리, 고급스런 얘기다. 

2005년 10월 4일자 한겨레신문에 권태호 기자의 <'치우천왕'과 '구역질나는' 삼국사기>

 http://www.hani.co.kr/kisa/section-005006000/2005/10/005006000200510041133245.html 라는 기사가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완성한 후 임금에게 올리는 에서 이 역사서가 명산(名山)에 비장할 것은 못되오나 바라옵건대 장독을 덮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라는 겸양을 겉으로 하여 학자로서의 소망을 밝혔다. 수없이 많은 것들이 세월 속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당했음에도 [삼국사기]는 끈질기게 살아남아 21세기 후손인 한 기자에게 구역질 나는 책이 되었음을 김부식이 안다면 차라리 장독을 덮는 데라도 요긴하게 쓰이길 발원했을까?

 

구역질나는 삼국사기를 이제야 읽고 있다. 삼국본기를 읽은 지금까지 구역질은 나지 않았다. 다만, 참담함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기자의 말처럼 보다 웅대하고 원대한 민족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면 오늘의 우리는 아니, 어제의 선조들은 우리에게 다른 오늘을 물려줄 수 있었을까? 김부식 같은 이들이 운을 타고 함께 나 맞서서 천하를 다투거나 또는 간웅이 틈을 타고 나와 신기(神器)를 노리는 처지가 아니면 천자의 나라에 소속된 편방 소국은 사사로 연호를 이름지어 쓸 수 없는 것이다는 식으로 가르쳐 오지 않았다면, 우리 역사는 달라졌을까?

 

삼국본기까지 읽기를 마친 다음 든 첫 번째 생각은 부식의 삼국사기는 (중국에 대한)조공의 역사다 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가장 많이 나오는 문장이 몸이 불편하다 이다면, 부식의 삼국사기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문장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일 것 같다. 삼국이 거의 같은데, 특히 고구려 장수왕 본기는 8할이 조공을 보낸 사실의 기록이다. 장수왕 시절, 중국 대륙에서는 남북조(북조-위와 남-남제)외에 송, 연나라 등이 대립하고 있었기에 장수왕의 고구려로서는 이를 잘 활용해야 할 형편이었을 것이다. 장수왕이 현명한 외교정책과 한편으론 한반도 남하 정책을 통해 영토를 확장해간 걸웅으로 인식되고 있는 지금이다.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삼국사기를 읽으면서도, 한편으론 곤혹스럽기도 하고 잘 읽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중국과 한반도, 일본이 뒤엉킨 것은 부식이 본 삼국시대나 지금이나 근저에는 변화가 없는 듯 하다. 물론 거기에 또 한나라 미국까지. 고구려가 중국에, 신라가 중국과 고구려와 백제에, 백제가 중국과 고구려와 때론 신라에, 일본이 중국과 신라와 백제에 등등으로 그 때 그 때의 국력과 상황에 따라 사신을 보내 조공하며 화친을 꾀하고 그러다 치고를 반복하였다. 사대교린은 배알없는 자들에게서 나온 외교노선으로 치부하기엔 사세가 복잡하다.

 

그렇다해도 곤혹스러운 건 부식의 세계관이다. 부식은 뼈 속까지 중국을 섬기고 사모한 자이다. 편방의 소국으로서 국력만이 아니라 문화, 학문 면에서도 비할 바 없이 대국이자 군자의 나라인 중국을 앙모하고 본받아 인정받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를 그는 사론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고려, 조선, 한말, 그리고 지금까지 죽 이어져온 사대의 지식인과 정치인들의 모습이 그대로 겹쳐진다. 우리는 부식을 지금도 여전히 많이 갖고 있고 보고 있다.

 

어쩌다 범우문고의 [조선사 연구(초)](신채호)에서 김부식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이 느껴지는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1대사건을 읽었다. 어느 부분을 읽다가 나는 웃음이 터졌다. 부식의 골치거리라는 말이었다. 소국이 일관하지 못한 채 주장을 내세워 대륙에 맞서려 했던, 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었던 세력이나 인물들이 바로 부식의 골치거리들이었다. 단재의 글에서 귀여운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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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쁜히 2008-01-28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ㅋㅋ 저두 삼국유사 읽고싶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