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탁오 평전 | 옌리 에산, 구지엔구오 (2000) | 홍승직 역 | 돌베개 (2005)

이탁오 (1527~1602)

중국 명나라 학자. 호 탁오(卓吾). 이름은 지(贄). 저서로는 《분서()》, 《속분서()》, 《장서()》, 《속장서()》등이 있다.

저자들은 그를 '중국 제일의 사상범'이라고 평했다.  책 부제가 "유교의 전제에 맞선 중국 사상사 최대의 이단아"이다.

그의 나이 54세였던 1580년에 관직을 사퇴하고 가족과도 떨어져 지인들이 마련해준 거처를 전전하며 문을 닫아걸고 오로지 책을 읽고 저술작업에 몰두했다. 결벽증이 있었는지 하도 마당을 쓸어대는 통에 그를 모신 이는 비를 마련하는 데 애썼다고 한다. 그 결벽증의 일환이었는지 어느 날 나이들고 병든 몸에 머리마저 부시시 해 그날로 삭발을 해버렸다. 사대부들이 난리를 쳤다.

1602년 나이 76세에 탄핵을 받았을 때 이미 유서까지 써놓고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던 병든 이탁오는 떼낸 문짝 위에 실려 압송되어야 했다. 감옥에서 칼로 자신의 목을 그어 자결을 했다. 칼로 목을 그었는데도 바로 죽지 않아 그는 이틀을 더 살았다.

오래 전에 그의 저서 《분서()》(홍승직 역 | 홍익출판사 |1998)를 읽었을 때 이탁오는 잘 다가오는 인물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주자학에 도전한 양명학을 받아들인 돌출적인 학자 정도로 이해했다. 이 평전은 이탁오 그의 일생과 행적, 그리고 그의 저술들을 통해 사상적 측면까지 가늠해 볼 수 있도록 해주어서 아주 흥미롭다.

1602년 언관(言官 ) 장문달이 올린 이탁오 탄핵소를 보면 이탁오가 얼마나 유가의 심기를 건드리는 행적을 했으며 따라서 그가 사상범이 되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 일부를 보면,

"중년에는 관직에 있다가 만년에는 삭발을 하더니, 최근엔 또 [장서] . [분서]. [탁오대덕] 등의 책을 출판하여 온 나라 안에 유포함으로써 심히 인심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여불위이원 같은 사람을 지모있다 하고, 이사를 재능이 뛰어나다 하며, 풍도를 사리사욕 없는 관리라 하고, 탁문군이 훌륭한 배우자를 잘 선택해다 하며, '상홍양이 무제를 속였다'고 사마광이 논한 것을 우습다 하고, 진시황이 천고의 유일한 황제라 하며, 공자의 시비 기준이 믿을 것이 못 된다 합니다. 허무맹랑하고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을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이고, 모든 것이 오류와 허점투성이라 이를 없애지 않으면 안됩니다."

'허무맹랑하고 이치에 닿지 않'으며 '오류와 허점투성'이라는 이 열거한 인물들에 대한 평은 이탁오의 저서 [장서]의 내용을 지적한 것이다. [장서]는 전국시대부터 원대에 이르는 중국 역사 인물 800명에 대해 정리하고 평을 한 책인 모양이다.

이 [장서]가 국내에 번역 출판된 것이 있는지 여러모로 찾아보았으나 없는 것 같다. 무척이나 보고 싶다.

평전은 전체적으로 재미있지만 특히 내 관심을 사로잡았던 것이 바로 이 [장서]에 관한 것이었다. 유교적 명분, 충절, 군신관계, 도덕 규범에 대해 깡그리 뒤집어가며 인물을 고르고 평했다. 명분 보다는 세상의 이익을, 도덕 보다는 지모를, 의니 불의니를 논하기 보다는 사회효과를 살폈고, 업적과 공과를 개인의 도덕과 분리해서 평했다.

'절의란 패망의 증거다', '정직,절의가 공적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었다면 물론 좋은 것이고, 단지 정직. 절의의 이름만 얻었을 뿐 세상에 이익이 없다면 그것은 한 푼의 가치도 없다.' '살신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가! 세상 사람들은 걸핏하면 살신성인으로 사람을 규율하는 데 심하도다!' 라고 단호히 말한다.

내가 모르는 인물들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다가 여기에 언급된 '풍도馮道'를 다룬 책이 있음을 알았다. 마침 도서관에 있길래 냉큼 빌려다 읽었다. 금방 읽을 수 있는 책인데 이 산만한 10세기 중국의 5대 10국과 그 줄줄이 이어지는 천자들과 인물들을 정리하는데 다소 짜증이 났다. 책은 주가 틀린 부분도 많고, 다소 의심가는 번역도 있어서 불만족스러웠으나, 풍도, 이 인물의 지그재그적 삶이 하 기가 막히기도 해서  그 힘 하나로 버텼다.  

 

 

 

 

 

풍도의 길 : 나라가 임금보다 소중하니 | 도나미 마모루 지음 | 허부문.임대희 역 | 소나무 (2003)

 풍도馮道 (882~954)

 "재상으로서 다섯 왕조와 여덟 성姓을 섬겼다. ... 아침에는 서로 원수였는데 저녁엔 임금과 신하 사이로 변하자, 표정과 말을 바꾸면서도 부끄러워 한 적이 없다. 큰 절개가 이랬으니, 설사 그가 착한 일을 했다고 한들 어찌 괜찮다고 말하겠는가!" (사마광 [자치통감])

"(나라의) 사직이 중요하지, 임금은 중요하지 않다. .... 풍도가 비록 50년 동안 네 왕조를 거치면서 열 두명의 임금과 야율씨의 거란에 봉사했지만 , 백성들이 끝끝내 전란의 참화를 모면할 수 있었던 까닭은 풍도가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고 먹여 살리려고 노력한 덕분이다." (이탁오 [장서])

풍도에 대한 평가다. 사마광은 11세기 송나라 사람이다.

907년 당이 멸망하고 이후 960년 송이 건국되기까지 약 50여 년 동안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가 나라 이름을 올렸다 망하기를 거듭했고, 요로 통일국가를 세운 거란이 중국에 들어와 통치하기도 했다. 풍도는 후당의 장종, 명종, 민제, 말제를, 후진의 고조,소제, 후한의 고조,은제, 후주의 태조, 세종 그리고 거란(야율덕광)때 관직을 지냈다.(아니, 정리가 필요하군)

그런데 풍도에 대한 많은 사료가 없다보니 풍도의 분명한 뜻을 알 수가 없다. 물 흐르듯,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있었고 거절도 분명한 의사표시도 강하게 한 적이 없는 사람인 듯하다. 지방 절도사로 보내면 갔고, 재상으로 부르면 다시 왔고, 지방에 있다가 거란이 수도를 함락하자 자진하여 들어와 읍하며 현신했다.

저자는 E.H.Carr의 말을 언급했다.

"역사를 연구하기 전에 역사가를,  역사가를 연구하기 전에 역사가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환경을 연구하라. "

풍도에 대해 사가들이 평가한 것들은 그 사가들이 처한 학문적 지평과 관점의 배경, 시대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풍도에 대해 '불사이군'을 하지 않은, 유교적 충절 개념을 헌신짝처럼 버린 파렴치한 인물이라는 평가는 모두 유교적 덕목이 학계는 물론 규범의 보도가 된 이후 덧씌워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유교 덕목의 잣대가 아니라면 이탁오처럼 백성을 구했다는 점에서 평가해야 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의심이 갔다. 도대체 풍도의 처세가 백성의 존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이탁오의 말처럼 어떤 사회적 효과가 있었는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 사회적 효과란 또 무얼 말함인지?

오히려 풍도만을 얘기하자면 그가 재상이라는 지위를 차지하고서도 백성과 당대 시대의 사회적 효과를 위해 할 수 있는 역할 또는 사명을 어떻게 규정했고 그에 따라 실행했는지를 따지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통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천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또는 어쩔 수 없이)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형이 동생을, 동생이 형을, 조카가 숙부를, 무인이 또 다른 무인을, 장수가 문인을 죽여가며 하루를 열고 닫는 세월 속에 풍도 자신은 '원래 글쟁이로 그저 임금께 말씀을 올릴 뿐' 이라고 나약한 문인을 자처했을 뿐이다.

그래서 이른바 태평성대 때는 어진 재상일 수 있지만 환란을 구제할 수는 없는 사람이라는 당시 평가를 얻었을 것이다. 결국 시기를 잘못 만난 것이다. 단지 물 흐르듯 갔을 뿐이다. 파여진 곳, 새로 나는 길을 따라 물이 흐르듯 시대를 흘렀을 것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나 물이 되지는 못한다.

 

자신을 잘 알고 처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풍도는 자신을 잘 알았다. 자신이 물이란 것을. 난세에 물길을 뚫을 능력도 천성도 타고 나지 않았다. 뚫려지고 새롭게 나는 길을 따라 최선을 다해 공손히 따라가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 그에게 나라란 계속 관직과 식읍과 녹을 주는 지속성만 갖추면 그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유교적 충절, 충신에 대한 허명으로 논하기 전에 도가 아니면 나가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도가 아니라고 판단하지 못하는 것(또는 판단하지 않는 것)도 죄다. 풍도는 한번도 사직을 청하거나 물러나기를 먼저 요구한 적이 없었다. 설혹  '태백'(太白若辱 [노자]에 나오는 말로 태백은 누가 써도 써야 하는 오욕의 자리에 서는 사람)의 치욕을 감당하면서 역할을 떠맡는다고 백번 양보하더라도 그건 그가 보이는 행위를 통해 판단할 문제다.

송 이후 사가들의 풍도에 대한 평가는 편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탁오의 풍도에 대한 평가의 근거를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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