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받아놓고 주말에 딴 책을 읽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몰락하는 자].

2012년에 구입해 놓고 몇 페이지 보다 뒀는데, 수다맨님이 얼마전에 올린 별점 리뷰 보고 다시 꺼냈다가 내쳐 읽었다.

제목 자체, '몰락하는 자', 가혹하지만 어쩔 수 없는 제목 같았다.

 

글렌 굴드를 등장시킨 것으로 입에 오르내리는데 정작 이 소설은 글렌 굴드로부터 만나자마자 '친애하는 몰락자'로 불린 베르트하이머에 대한 얘기다.

화자인 '내'가 먼저 알게 된 글렌 굴드를 베르트하이머에게 소개했고, 28년 전, 그가 음악학교 모차르테움 2층 33호 교실을 오후 네시에 지나가다 글렌굴드의 피아노 연주를 듣게 된 후 그의 몰락은 정점을 향해 가게 된다. 글렌 굴드의 천재성, 뛰어남을 알아본 그는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깨달음 때문에 피아노를 그만둔다. 몰락이 시작된 건 그때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몰락은 그의 어딘가에 이미 잠재해있었던 것이라 글렌 굴드는 그를 보자 마자  저렇게 명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소설 내내 이어진다.  시종 '나'에 의해 간접화법으로 소설은 쓰여진다. 그렇지만 소설은 분명 움직인다.

베르트하이머는 '사는 데 소질이 없는' 자이고 (화자인 '나' 역시 마찬가지고), 불행에 중독된 자였다.

자기자신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보지 못한 '막다른 골목형 인간'이었다.

글렌 굴드는 50세(우리 나이로 51세)에 뇌졸증으로 쓰러졌고 며칠 뒤 사망했다.

베르트하이머는 그의 죽음보다 늦게 죽음을 선택한다.

쉰 살이 되면 왠지 경계선을 넘은 것 같단다. '50년이면 살 만큼은 살았다'고 자신은 생각한단다.

 

쉰 살을 넘기고도 더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길이다. 쉰 살에 비겁하게 경계선을 넘으면서 우리는 몇 배로 더 비참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보니 내가 바로 그런 부끄러움 없는 놈이 돼버렸군. 죽은 자들이 부러웠다. 죽은 자들의 우월함이 잠깐이나마 증오스러웠다. (37)

 

한번쯤 생각해볼만한 일이다고 생각했다. 왜 계속해서 살게 되는 걸까? 죽지못하니까, 죽을 이유를 찾지 못하니까. 그냥 살게 되니까? 그냥 뭐 그냥 .... 그렇게 되는 거니까.

베른하르트는 쉰을 넘기고 8년을 더 살았다.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사생아였고, 아버지로부터 자식임을 인정받지 못했다.

 

<아마데우스>도 그렇고 음악쪽에서 천재성에 비춰보고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인물들의 얘기는 심심찮게 있다.

문학쪽은 어떨까? 문학은 좀 다르지 않을까 싶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절대적 비교대상이 있을 리 없을 것 같다. 할 이야기를 찾은 작가와 그렇지 못한 작가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닐까?

 

'예술의 절대성과 완벽성에 관한 3부작'(박인원)인 [몰락하는 자](1983), [벌목](1984), [옛 거장들](1985)과, 그리고 마지막 작품 [소멸](1986). 적어도 이 네 작품은 읽어보고 싶은데, [벌목]은 90년대 현대미학사에서 [벌목꾼]으로 나온 이후 아직 새로운 번역이 없는 듯하다.

[벌목]을 빼고 [옛 거장들]이 나온 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방침 때문인가?

자기 나라 오스트리아에 대해 그토록 엄청난 독설을 퍼부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나치 청산의 지지부진함 때문에? 보수적 문화정책? 오스트리아 사회주의는 어떤 것이었나?

그토록 독설을 퍼부을 정도의 나라가 오스트리아라면, 씨바, 한국 정도면 뭐 어째야 하는건데?

 

아, 이 작가 독설에, 실명 비판에(옛 거장들), 거의 실제 인물까기(벌목)를 마다하지 않는 작가다. 적나라하고 정조준되지 않으면 불편하기 쉬운데, 이 작가의 작품으로 처음 읽어본 [몰락하는 자]는 그럭저럭 견딜 수 있지만 계속해서 읽게 되면 어떤 느낌이 들지 한번 시험해 보고 싶긴 하다. 죽음과 절망의 작가라니, 그 절망스럽고 부정적인 기운에 중독되지는 않을지, 부정의 불편한 도가니탕에서 몰락하게 될지는 않을런지.

그보다는 차이있는 반복을 잘 봐야 할 것도 같다. 몰락하는 베르트하이머가 계속 반복되는 것 같지만 결코 같지 않다.  

베르트하이머는 피아노를 그만두고 '정신과학'으로, '나'는 '글쓰기'로 '도피'했지만 둘 모두 어느 것에서도 아웃풋을 만들지 못한다. 아웃풋이 없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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