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나이에 혼자 살고 있는 나보다 어린 한 지인이 최근 삶의 허무감 같은 거에 시달리고 있다.

어찌어찌해서 그냥저냥 가게 하나 차리고 살아가는데 지난해 우울증을 앓는듯하더니 병원에 가서 상담...보다는 그냥 의사 만나는 정도였던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약도 처방받고 해서 겨울을 넘기는가 싶었다.

다시 가게도 열고 운동도 시작하고 다잡기 시작한듯 했는데 한밤 중에 메시지로 가슴이 턱 내려앉는 문자를 마구 보내기도 한다.

어떤 것도 재미가 없다고 한다. 게다가 하는 일이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일인데 미치도록 힘들다는 것이다.

단순히 엄살같은 게 아니라 이 사람같은 경우 공허, 허무를 앓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릴 때 카뮈를 그토록 좋아해서 프랑스 유학까지 갔던 이의 중년이 이토록 힘들어질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세계 여러곳을 돌아다녔고 내가 넘보지 못할 자신의 세계로 가득했던 아름다운 젊은 날을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생각이 많게 만드는 이다. .... 언젠가 썼던 지하실의 니체, 니체를 낭독해주던 그이다.

 

들어줄 뿐 달리 뭐라 할 말이 별로 없다. 게다가 우린 떨어져 살고 있기도 하고.

죽음을 구체적으로 생각하자는 말을 했다.

그렇게 사는 게 의미없고 꾸역꾸역 살게 되는 자신을 참을 수 없다면 좋다, 죽는 걸 구체적으로 생각하자.

자, 재미도 없고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삶, 그만 끝내려한다. 어떻게 죽으려는가?

 

벌써 몸 때문에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 때가 되어 버렸다.

의사의 권유도 있고 자구책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아직 죽을 순 없고 버텨야하기에.

아주 운좋은 사람 빼고 대부분의 인간은 그렇게 되는가 보다. 운동이 나를 구원할 수 있을까, ..... 시바.

고작 운동이라니.

 

줄리언 반스의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는 <깊이의 상실>에서 정작 깊이 빠져들 수 없었다.

자신의 이야기, 아내 펫을 보내고 나서 자신의 상실감, 비탄에 대해 진단해가는 부분에서 아, 그렇구나, 이렇게 되기도 하는구나 정도의 느낌이 들뿐이었다.

결국, "우리는 각자의 성격에 맞게 비탄에 빠진다." (114)

상실감, 잃어버렸다는 것에 대해서도 정작 상실하고 잃어버린 건 죽은 사람, 아내 펫이지 자신이 아니라는 것.

"이제 인생은 더이상 그녀의 빛나는 호기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129)

지인에게 이 말이 자극이 될까? '빛나는 호기심의 대상'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은가!

지금 지인은 바로 이 '빛나는 호기심의 대상'인 인생에서 호기심을 놓아버린 혹은 놓아져버린 상태인데.

줄리언 반스는 현대를 사는 우리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시대처럼 죽은 이를 찾아 지하로 깊이 내려간다는 은유조차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은유를 잃어버린 시대의 우리.  

 

 

 

 

 

 

 

 

 

 

 

 

 

 

 

밀란 쿤데라의 어쩌면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를 신작, [무의미의 축제]가 곧 번역출간된다. 예약판매를 시작했다.

아, 번역본으로 152페이지. 아, 인심 좀 더 쓰시지. 뭐 길다고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152페이지는 감질나잖아요.

더 많이, 오래 보고 싶은데, 152페이지가 뭡니까, 쿤데라 옹.

 

책소개를 통해서 보자면, 여든이 넘은 소설가 쿤데라는 이 시대의 비극성에 마주하는 태도로서 '무의미'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그러니까 무의미함에 시달리거나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무의미해. 그래서 그렇게 느끼는 걸 뿐인데 그렇게 느낀다고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니까. 이건가?

 

“오래전부터 말해 주고 싶은 게 하나 있었어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죠. (중략)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

'하찮고 의미없다는 것'이 '존재의 본질'이다. 그것은 심지어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심지어 그걸 '인정'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도 삶의 무의미함, 존재의 하찮고 의미없음의 본질을 느낄 수 있을, 시달린 뒤에 깨달을 기회를 온전히 주어야 한다. 팔레스타인.

아침에 알라딘 서재에 오른 페이퍼들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과 관련한 글들을 보고 새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뉴스로만 접했지 제대로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는데 사태가 심각한 듯하다.

내가 이스라엘, 유대인 이야기에 그토록 혐오를 느끼는 건 물론 단편적인 지식에 기대서이기도 하지만, 거의 본능적이라할 정도로 즉각적인 면이 있었다. 홀로코스트 이야기도 내가 잘 읽지 않는 분야이기도 하다. 나의 편견도 쉽지는 않은 것이지만.

[미국의 목가]를 읽으면서 시모어 레보브의 비탄과 혼돈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필립로스의 다른 작품들도 더 보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다.   

 

 

 

 

 

 

 

 

 

 

 

 

 

 

그와 나의 공통점 하나는 눈이 약하다는 점이다.

그이는 나보다 어림에도 오래전에 이미 눈이 약해져 책을 읽기 어려울 지경까지 왔다.

나도 얼마전부터 그랬고, 한차례 앓고 나서 당분간 '책같은 거' 멀리하라는 얘기를 또 들어야했다.

인생, 뭐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안되고 있다.

무의미와 무가치를 인정하면 뭐, 어떻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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