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씨와 무재 씨는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사랑을 시작한 연인이다.

황정은의 소설 중 나는 세편을 읽었을 뿐이다. 오래 전에 [상행](2012 이효성문학상수상작품집)을 읽었고, 엊그제 [상류엔 맹금류](2014 젊은작가상 수상작)와 [백의 그림자]를 읽었다.

앞의 두 작품은 단편이고 [백의 그림자]는 경장편이다.

묘하게도 세 작품 모두 여자인 '나' 1인칭 시점을 택한 소설이다. 

내가 경험한 사람들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 [상류엔 맹금류]는 결혼까지 할 뻔 한 옛 애인 제희와 그 가족의 얘기, 특히 한여름에 그들과 함께 간 수목원 피크닉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전해주는 소설이고, [상행]은 남자친구인 것이 분명한 오제와 그의 어머니, 셋이서 함께 오제의 친척집에 가서 고추를 따러갔다 오는 이야기, [백의 그림자]는 ... 경장편이기에 나의 남자 무재 씨만이 아니라 도심의 40년 된 전자상가 내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주지만 역시 무재 씨에 대한 얘기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젊은 여자인 '나'는 늘 관찰자이며 매우 정제된, 신춘문예를 거쳐 각종 문학지에 단편 게재로 무장한 작가들답게 우리의 일상 언어를 낯설게 하고, '일반화의 폭력'(신형철)과 한사코 싸워서 획득한 언어를 구사한다. 많은 이들이 저런 문장을 쓰고 싶다고 한다. 분명 황정은 작가의 글은 힘이 있다. 

 

[상류엔 맹금류]의 피크닉 장면은 영화를 많이 본 이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장면일 수도 있다.

이창동 감독의 <초록 물고기>의 막동이(한석규) 가족의 소풍이 떠오르기도 하고, 루이스 브뉘엘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유혹>에서 인물들이 한없이 걷던 어느 장면을 떠올리게도 했다. 조금씩 다 다르지만 죽을 둥 애를 쓰지만 어쩔 수 없이 절망적인 정서.

 

신형철은 [백의 그림자]를 '사려 깊은 상징들과 잊을 수 없는 문장들이 만들어 낸, 일곱 개의 절로 된 장시(長詩)'라고 한문장으로 정리하기도 했지만, 나는 어째 나와 무재의 사랑의 속삭임이 영혼의 내레이션 처럼 들렸다.

우습게도 첫 장면 '숲'에서의 두 사람의 대화는 Jean Francois Mourice의 <모나코>라는 음악에 흐르는 내레이션을 생각케했다. '모나코~'라고 시작하는 한 남자와 여자의 주고받는 내레이션만으로 이뤄진 노래말이다.

아, 미안하다. 장난이 아니라 .... 작품, 정말 재미있게 봤고 좋았다.

신형철의 해설도 정말 좋았다. '현실 - 자명성의 해체', '환상 - 불행의 단독성' 같은 해설은 1급 평론가답다.

 

근데 나는 읽으면서 가끔 허방을 짚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전자상가와 사람들, '자명성을 해체'하고 힘겹게 다가온 현실과 독자인 나 사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가 끼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 유리 저 너머에 있는 사람들. 

무재. 無在인가? '제희', '오제'가 아닌 '무재'.

 

무재와 나는 참으로 소박하면서도 애틋한 사랑을 하고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데, 마치 그들의 영혼 결혼식에서 틀어놓은 영상물을 보는 느낌이었다. '인물들이 겪는 불행이 현실 안에서 현실적인 수단으로는 맞설 수조차 없는 종류의 것일 때'(신형철) 환상 속으로 이미 걸어들어가 버린 두 연인의 노래를 듣는 것 같았다.

 

[백의 그림자]의 맨 마지막이다.

은교 씨,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노래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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