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가 숨긴 '바람의 길'을 알고 있다.

 

 

 "바람의 길을 혹시 알아요?" 내가 묻고 형사가 이마를 와락 찌푸린다. "이 얼굴 가로 주름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컴퓨터로 복원한 그의 이마를 가리킨다.

"나를 더 이상 가지고 놀 생각은 말아요." 담당 형사는 기분이 크게 상한 눈치다. 나는 침묵한다. 나의 대답은 정해져 있다. 유골은 그의 것이 틀림없겠지만 형사가 내민 얼굴에 대해선 여전히 "글쎄요."다.

 

              - 박범신, 소소한 풍경, 65~66

 

공사를 위해 터를 파는데 유골이 나왔다. 시멘트로 된 데드마스크가 생겼다. 그 얼굴을 복원해 프린트 해 온 형사가 참고인으로 불렀지만 거의 피의자가 된 여자에게 보여주며 "이사람 맞아요?"라고 묻자 여자가 저렇게 말한다.

 

나는 줄곧 형사와 같았을 것이다.

박범신의 [소소한 풍경]을 읽고 있는데 왜 이렇게 글을 써야 하지? 라는 물음을 계속 하면서 읽는다.

 

박범신은 1946년 생이고 줄리엔 반스와 같다. 비교도 아니고 단지 [소소한 풍경]을 읽기 시작했고 줄리엔 반스의 책도 요즘 읽고 있고 해서 생각이 머문 것 뿐이다.

박범신은 1973년 단편으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많은 소설을 썼을 것이다.

줄리엔 반스는 사전 편찬 등 직장생활 하다가 1980년에 장편 [메트로랜드]로 등단했다.

 

갑자기 하일지가 궁금해서 또 찾아봤더니 그는 1955년 생이다.

최신작이 재작년에 나온 [손님]이었다. 읽어보지 못했다. 하일지의 작품으로 최근(아마 몇 년전)에 읽은 것이라곤 2000년도에 나온 [진술]이 다다. 멋진 작품이었다. 후반으로 갈수록 살짝 못마땅하긴 하지만 여튼 후반 이전까지는 압도적이다.

 

 

 

 

 

 

 

 

 

 

 

 

 

 

 

 

 

복도훈은 해설 첫머리(아직 다 읽지도 않았다)를 '불가능한 가능한, 사랑'이란 '~한 ~한'을 겹친 소제 하에 '시라고 해야 할까,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로 시작한다.

나 역시 처음 들었던 생각이 그랬다. 이 책의 리뷰나 페이퍼들에는 유난히 문장 인용이 많다.

와 이런 문장들을 만들려면 얼마나 머리를 써야 하는 건가. 연륜과 경륜이 쌓이면 이런 사색이 가능해지는 건가. 

이 정도의 문장들과 각종 상징과 은유 등을 사용하여 엮어야 소설이 되는 건가.

소설가로서 위기를 느끼며, 원인과 결과로 짜맞춰지는 플롯에의 거부, 그것을 작가의 깊은 우물에서 길어올린 시와 같은 문장의 힘으로 돌파하려고 했던 것인가.

'노화가 정지되는 느낌'(작가의 말)으로 완성된 소설이라고 하니 끝까지 읽어보긴 할텐데 담백했으면 좋겠다.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좀더 많이 봐야 할 것 같다. 왜 좋아하지 않는지 나를 좀더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작가도 작품도 너무나 생소한 책들임에도 어김없이 올라와 있는 100자 평이나 리뷰, 페이퍼를 보면 와 진짜 열심히들 읽는구나, 감탄한다. 

하일지 소설이 보고 싶다.    

 

소설의 기교라든지 소설작법서 등을 몇 권 보면서 든 생각이 우리 나라 작가나 저자들이 쓴 소설작법서와의 비교도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작가들은 뭘 중요시 하는지 볼수도 있지 않을까. 작법서 말고 작가론이나 소설론 같은 소설에 대한 생각들을 좀 들여다보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러고보니 우리 나라 작가들의 산문집도 전혀 읽지 않는구나. 

생각보다 편견과 편식이 심한 편이었다. 검은머리 외국인도 아니고... 내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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