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어렵다. 요즘은 장르문학 보다는 고전이나 본격문학작품을 보는데 어떻게 읽어야할지 잘 모르겠는 소설들이 많다.

읽히긴 읽히는 데 겉도는 독서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소설들. 그렇게 읽고 나면 그 책은 여전히 새책인 채로 남는다.

데이비드 로지의 [소설의 기교]는 다루고자 하는 주제에 해당하는 소설의 한 대목을 온전히 인용한 다음 분석을 한다.

한 권의 책을 뭉뚱그려 소개하고 평을 하는 리뷰식 보다는 훨씬 구체적이어서 도움이 될만하다.

조금 아쉬운 건 고전이 대부분이고 20세기 중반경에 나온 소설들 몇 작품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이 이야기의 효용성을 온전히 믿었던 시절의 소설들이다.

아무래도 최근의 소설들, 현대소설을 읽기 위한 안내서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눈에 띄는 책은 K.M. 웨일랜드의 [무작정 소설쓰기?윤곽잡고 소설쓰기!]라는 제목의 소설창작방법서이다.

저자가 SF와 역사소설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는데 아직 우리에게 소개된바는 없고 이 책을 쓰면서 10명의 다른 소설가들을 인터뷰해 그들의 창작 노하우를 싣기도 했다.

'글쓰기에 길을 잃고 막혀버린 작가들에게'라는 부제가 붙기도 한 이 책이 제시하는 소설쓰기의 주요한 과정은 무작정 쓰기 시작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들여서라도 자신이 쓰고자 하는 소설의 설계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것 같다.

이 주장과 대척점에 있는 소설창작방법론을 말하는 이의 한 사람은 스티븐 킹이다.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킹은 '소설 창작이란 어떤 이야기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과정이라는 것이 나의 기본적인 신념이다'고 밝혔다. '도저히 손댈 수 없을 만큼 뜨겁고 싱싱할 때 얼른 써버리는 것이다'. 물론 초고 과정이긴 하지만.

웨일랜드식으로 윤곽을 잡고, 플롯을 설계하기 위해 열심히 세공을 하는 데 쓰는 시간을 킹은 조금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초고가 오래 걸리면, '마치 루마니아에서 날아온 공문서처럼, 또는 태양의 흑점 활동이 심할 때 단파 수신기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이야기가 왠지 낯설어진다.'(187)

 

하루키도 초고는 굉장히 빨리 쓰는 편인 것 같다. 일단 단편으로 쓴 다음 시간을 두고 그것이 장편으로 될만한지 계속 만지작거리는 방식인 것 같다.

시놉을 계속해서 정교하게 다듬으며 이야기를 준비하는 작가도 있다.

윤곽을 잡기 위해 갖은 테마들을 붙잡고 질문을 하며 답을 완성해가든 뮤즈의 감시 하에 가능한 선도를 유지하며 빠른 시일 내에 초고를 완성하든 한가지 해결하고 가야 하는 건, 자신이 최초에 생각했던 핵심적인 것, 이미지든, 주제든 절실하게 자신을 붙잡고 있던, 이야기로 만들어달라고 조르던 어떤 것, 그것이 과연 이야기가 될 것인가를 가늠해보긴 해야 할 것 같다. 

킹처럼 어떤 이야기가 될지 나도 모르지만 일단 써봤는 데 그것이 근사한 얘기가 되는 식은 킹이 아무리 겸손하게 얘기해도 타고난 이야기꾼일 때 가능한 것 같다. 킹은 노력보다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노력도 하지만.

킹의 작가 피라미드 분류에 따르면 제일 밑바닥은 '형편없는 작가'들이 우글거리고, 다음 층에는 '괜찮은 작가', 그 다음 층에는 '훌륭한 작가', 맨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한줌의 '위대한 작가'들로 이뤄지는데, 형편없는 작가들이 노력을 통해 괜찮은 작가가 될 수는 있겠지만, 괜찮은 작가가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위대한 작가는 ... 씨바, 지들끼리 놀라고 해. 넘사벽이니까.

괜찮은 작가가 되는 것만으로도 괜찮다. 괜찮은 작가들의 작품을 얼마든지 읽어줄 수 있다. 나는 그렇다.

 

제임스 조이스 같은 경우, 그는 평생 59년을 사는 동안(플로베르 또한 59세의 생을 살았다. 그 또한 다작의 작가는 아니었다.) 시집 2권, 희곡 1편, 소설 4편을 남겼다. 소설 4편은 [더블린 사람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율리시스] [피네간의 경야]다.

킹은 조이스 같은 몇 편 안되는 작품을 남긴 과작(寡作)의 위대한 작가들에게 '신이 자신에게 어떤 일을 할 능력을 주었는데 어째서 그 일을 안하는 것일까?'(185) 라는 궁금증(질책이자 조롱)을 가졌다.

조이스 전기의 권위가인 리처드 엘먼에 의하면 조이스는 '하찮은 서정시로 시작해서 방대한 백과사전으로 끝나'(리처드 엘먼, [언어의 연금술사 제임스 조이스], 책세상)는 작품을 썼다.

뿐만 아니라 [더블린 사람들]에서 [경야]까지는 단계적 진전이 이뤄지며 상호관련되며, 전체가 하나의 책이며 [더블린 사람들]은 그 첫 장에 해당된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그런 의도를 지닌 설계도를 가지고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조이스는 첫 소설집부터 마지막 소설까지 자기완결적이면서 상호연결된 '하나의 책'을 썼다는 것이다.

[더블린 사람들] 조차도 철저한 구조를 바탕으로 배치하고 [율리시스]는 나중에 공개를 후회했다고 하지만 이른바 '설계도'를 가지고 있었다. 

 

조이스를 읽어보고 싶어서 관련 서적들을 훑어보고 있는데, 그가 자신의 작품에 '굉장히 많은 수수께끼와 퀴즈를 감추어 두었다'는 의도와 포부가 처음엔 우습긴 했지만 흥미로웠던 반면, 지금은 약간 시들해지기도 했다. 감춰진 의도, 찾으면 찾아지는 구조, 설계도에 맞춰보는 재미같은, 예전 같으면 퀴즈 맞추는 걸 열라 좋아했었겠지만 이젠 늙어서 심드렁하기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줄리엔 반스의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허버트 로트먼의 [플로베르]를 읽은 다음이라서인지 이해 속도가 조금 빨라진 것 같다. 반스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끝까지 궁금증을 가지고 읽게 될 것 같다.

그리고, 줄리엔 반스의 최근작이라는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Levels of LIfe].

제목만 보고는 반스의 최근 인기에 힘입어 그렇고 그런 에세이 하나 나왔나 보다고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았는데, 이게 2008년 아내이자 문학 에이전트였던 팻 카바나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오랜 침묵 후에 나온 책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읽어보고 싶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도 반스 특유의 연구를 통한 새로운 형식의 소설쓰기를 보여주는 것 같다.

원제 Levels of Life처럼 하늘, 땅, 지하로의 층위를 따라 각각 다른 형식의 글쓰기를 보여준다.

[플로베르의 앵무새]가 평전 형식으로 예술과 비평, 창작자와 수용자 사이의 수용 미학, 그 자장 안에서 벌어지는 긴장에 대한 정신분석적 탐구(열린책들의 작가소개)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책도 1부는 19세기 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랐다는 실제 인물과 비행에 대한 르포르타주이기도 하다는 것, 2부는 허구의 이야기, 3부는 에세이.

매끄러운 이야기로만 채워지지 않는 어떤 읽기의 갈망을 반스는 조금 보여주는 작가 같아서 최근에 흥미로워하고 있다.

책에 나온다는 군, '세상은 슬픔을 견뎌낸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

하늘과 땅과 지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슬픔을 견뎌낸 사람일까 그러지 못한 사람일까.

대체로 평탄한 삶을 살아왔는데, 갑작스럽게 가까운 사람들에게 닥친 슬픔, 그리고 앞으로 닥칠 나의 슬픔을 견딜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는 나이에 와있다. .... , 예전엔 잘 몰랐다. 앞으로는 어떻게든 더 잘 알게 되겠지. 두려운가? 두렵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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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설. 어떻게 써야 하나?
    from 월풍도원(月風道院) - Delight on the Simple Life 2014-11-26 00:09 
    좋은 이야기를 위한 소설 창작 기법.온종일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이 고작 열 마디 정도인 날이 있다. 아니, 꽤 많다. 그래서 누군가 오랜만에 전화통화라도 할라치면,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 소리를 듣는데, 그건 종일 말을 하지 않아 목이 잠겼기 때문이다. 목이 잠기면 목소리가 탁하고 이상하게 들리듯, 글쓰기도 이와 비슷하다. 블로그 포스팅도 한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