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포스팅을 저따위로 써서 은희경 작가에게 살짝 미안하기도 했다. 신형철의 문학동네 팟캐스트도 잘 듣지 않는 편인데, 이번에 은희경 편을 들었다. 소설이 재미없으면 작가 인터뷰도 별달리 흥미롭지 않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우리 나라 작가들의 인터뷰나 대담도 별로 재미없다는 말이다. 은 작가 편도 내가 읽은 거라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딱 하나 읽은 게 전분데 새로 나온 작품집을 알 게 뭔가. 

산책하면서 참고 듣는데 그래도 하나 건진 건 은 작가가 글을 쓰기 위해 하는 준비운동 같은 방법이다.

작가는 새로운 작품을 쓰기 위해 어딘가로 떠나곤 했다는데 새로운 장소에 도착해서 우선 하는 일이 궁리가 많은 생각들을 좀더 가볍게 정리하는 방법으로 자신은 하루키 단편집을 읽는다고 한다. '이런 걸로도 소설을 쓰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면 너무 커다란 생각들에 짓눌려 있는 머리를 정리할 수 있다고. 이에 신형철도 격하게 공감을 했다. 자신 또한 글을 쓰기 위해서 하루키의 에세이집에서 아무 글이나 읽으며 가볍게 머리 근육을 푼다는 것이다.(머리근육을 푼다는 건 내가 쓴 말이다. 그런 의미의 말을 했다고 나는 이해했기에. 정확한 워딩을 기억할 수 있다면 내가 아니다.) 

그래서 내가 뭘 했겠는가? 한동안 보지 않은 하루키 단편집을 찾아 한 편 읽었다.

 

 

 

 

 

 

 

 

 

 

 

 

 

 

이 단편선의 첫 작품은 [중국행 화물선(중국행 슬로보트)]이다. 

아무래도 새 책을 더 구입해서 들여앉혀 놓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건, 거의 다 새책이기 때문이다. 읽지 못한 책들은 물론, 읽었지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새책처럼 기억이 별로 없는 책들이니까 내 집에 있는 책들은 최근에 읽은 것 외엔 다 새책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루키의 저 단편들도 몇 년전에 다 읽었던 것들이지만 .... 완전히 새 책 읽는 기분으로 읽었다.

여튼 [중국행 화물선]은 '처음으로 중국인을 만난 게 언제였더라?'라는 의문문으로 첫문장을 시작하는 단편이다.

그리고 살면서 만났던 중국인들 중 기억나는 세 명의 중국인과 야구 얘기로 단편을 만든다.

 

이 얘기보다 더 관심있게 본 건 [중국행 화물선]을 읽고 나서 맨 앞 '작가의 말' 첫 문장이었다.

 

소설을 쓰려고 할 때, 나는 온갖 현실적인 소재들을 - 그런 것이 가령 있다면 - 커다란 냄비에 집어 넣고 마구 뒤섞어서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될 때까지 용해시킨 후 그것을 적당한 형태로 잘라 내서 사용한다.

 

[중국행 화물선]을 읽고나서, 저 말을 봤을 때, 정확하게 규정해줄 줄 아는 능력에 감탄했고, 뒤에 이 단편에 사용된 얘기들이 '사실에 입각해 있다'고 강변하지만 역시 저 말처럼 이상하게 '용해'된 뒤, '적당한 형태'로 잘라진 내용물의 '기묘하고도 부자연스러우면서'도 우리의 일상의 사실, 삶의 무력함에 대한 공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게 하루키의 이상한 점이다.

 

P.S., [중국행 화물선]이 [중국행 슬로보트]로 새로 발간된 건 알았는데, 하루키가 새로 수정한 작품들이 있다는 건 미처 몰랐네. 완전 개작 수준은 아니더라도 작가 자신이 직접 수정을 했다면... 이거 또 봐야하나보다. 흠.

 

데이비드 로지의 [교수들 Small World](1984) 좀 읽어보려 했다가 그가 쓴 [소설의 기교 The Art of Fiction]라는 책을 발견했다. 읽고 있는 중이다.

1991년부터 92년에 걸쳐 영국 《인디펜던트 온 선데이》지에 연재했던 글들을 책으로 펴낸 것인데, 고전 작품과 현대 소설들을 직접 인용하면서 소설창작의 중요한 기법과 요소들을 설명하고 있다. 소설에 대한 비평서이면서 무엇보다 소설을 꼼꼼히, 풍부하게 볼 수 있는 읽기법에 대해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소설창작을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이미 읽었을 법 하다.

 

예를 들어, '서스펜스' 항의 토마스 하디의 [푸른 눈동자 A Pair of Blue Eyes](1873)에 대한 설명.

 

대중소설의 서스펜스 유발 장치를 의도적으로 빌려와 자신들의 목적에 맞도록 변형시키는 재능이 뛰어난 작가들도 있었다. 특히 19세기의 작가들이 그러했다.  그 중 한 명이 하디였다. ... 하디의 세 번째 소설인 [푸른 눈동자]는 콘월 북부의 낭만적인 무대를 배경으로 그가 첫 번 째 부인이 된 여인에게 구혼했던 실제 경험에 토대를 두고 있는, 보다 서정적이고 심리적인 작품으로 근대 자서전적 소설의 대가인 프루스트가 가장 선호하던 소설이기도 했다. 이 소설에는 고전적 형태의 서스펜스 장면이 담겨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이것은 완전히 새롭게 창조된 것이다. (33)

 

 

[푸른 눈동자]는 번역되지 않은 듯하다.

 

피츠제럴드의 [밤은 부드러워라](1934)에 나오는 '목록 lists', '그 묘사는 소설의 화법에서 목록의 표현력을 체현하고 있다.'(108)

 

'시점 Point of View', 헨리 제임스의 [메이지가 알고 있는 것](1897) 분석.

 

'헨리 제임스는 시점을 다루는 데 있어 대가급의 작가다'.(52)

 ... 게으르거나 미숙한 작가임을 드러내는 가장 흔한 표지 중의 하나는 시점을 일관되게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55)

 

또 한 편의 새책.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 2004년도에 구입한 걸로 되어 있는데 ... 내가 분명 읽었을껄?.....

다시 읽고 있다. 아, 완전 새책같다. .......

 

오스터의 [뉴욕 3부작] 중 하나인 뛰어난 중편소설 [유리의 도시]에서 인용한 부분(Q-U-I-N-N, 인물의 이름과 관련한 퀸과 스틸먼의 만남 장면)은 문학 텍스트에 있어서 이름이 가질 수 있는 의미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다. 이 세 편의 이야기는 모두 탐정소설의 진부함과 전형적인 패턴을 통해 정체성, 인과관계 그리고 의미에 관한 포트스모더니즘적인 회의를 보여준다.

(8장 등장인물의 이름, 72)

 

(하긴 요즘 탐정소설을 포스트모더니즘적으로 사용하는 기법은 전혀 새롭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 이제 조이스를 읽어도 되지 않을까?

좋은 글은 하염없이 읽게 하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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