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서재 하는 동안 이맘때쯤 나오는 말 중 하나가 난 11월이 싫다 라는 말이다. 
난 일년 중 11월이라는 달이 제일 싫다. 
무슨 초딩도 아니고 제일 싫다 고 징징대는 게 무슨 앙탈인가 싶기도 하지만 무거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아침에 한겨레 홍세화 칼럼 "불륜의 시대- 정치의 소멸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맺는 관계에 대해"를 읽다가 더 쓸쓸해져버렸다. 

우리가 사랑을 믿었던 때가 있었듯이, 민주주의를 믿었던 때가 있었다. 이제 사랑이라는 말이 누구의 마음도 흔들지 못하고 인간 존재들에게 어떤 생명력도 불어넣지 못하는 무료한 것으로 전락했듯이, 민주주의 역시 어떤 위험도 모험도 아니며 투표장에서의 선거행위로 축소되고 말았다. 격렬하고 난폭한 섹스에 매달리고 그것을 사랑이라 믿을수록 결합이 아닌 분리를 경험하게 되듯이, 민주주의를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대의제라는 제도와 일치시킬수록 그것은 사회적 실재를 설명하지도, 주어진 현실을 변화시키지도 못하는 형해화된 껍데기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런 질문으로 끝맺는다. 
"불륜의 시대,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민주주의가 다시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무료한 것으로 전락'한 사랑, 민주주의. 과연 그 지경이 되어 버린 것인가.

무료하게 읽은 것 중 하나가 애거서 크리스티 탄생 80주년을 맞아 출간된 스파이소설 [프랑크푸르트행 승객]이다. 
첫작품이 1916년에 출간되었으니 1970년에 출간된 이 작품은 그녀의 50년 넘은 창작 세월을 생각해보면 원숙하기 이를데 없는 글이다. 
초반부 주인공 스탠퍼드 나이 경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런던행 환승 비행기를 타기 직전 대기 중 한 여인이 다가와 여권과 그의 옷을 빌려달라고 말한다. 반드시 제네바행 비행기를 타야한다고 목숨이 걸린 문제고 스탠퍼드의 신분이 필요하다고 당당하게 마치 모험을 하듯이 말하는 것이다. 
긴급한 용무와 두 남녀의 수작이 결합된 대화 등은 흥미진진하다. 
60년대를 거치며 세계 곳곳의 폭발하는 '젊은 것들의 혁명적 운동'이 애거서 같은 이들에게 안겨주는 불안과 염려 혼돈이 십분 느껴지며 매우 불편하게 읽힌다.

젊은 것들을 진정시킬 수 있는 것들은 노쇠하여 여기저기 아프고 계속해서 아프기만 하다 죽을 노인들의 활약이다. 

마치 히치콕의 60~70년대 스파이물 영화를 볼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읽지 않아도 좋았을 책인데 겨우 겨우 읽었다. 
우리의 지금은 너무 쪽팔리는 거 아닌가. 이건 뭐 수준이하의 싸움이 여전히 반복된다는 지긋지긋함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여전히 수준이하의 대상과 여전히 싸워야 하는 걸까. 기획력과 공작력이 예전보다 세련된 게 달라졌다면 달라진걸까. 70년대에 나온 이 스파이 소설에서 본 노인들의 막후 활약이 신기하게 여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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