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이른 아침 봉변이라면 봉변이랄 수 있는 일을 당했다고 할 수 있는데, 단정하여 말하지 못하고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아직도 생각중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양보하여 생각해봐도 그 여자가 좋지 못한 행동을 보여준 건 분명해보이는데, 그녀가 환자였기에 한수 접어준 면이 없지 않다.

또 예의바르고 진중한 그녀의 아버지가 옆에 있었기에 딸에게 퍼부어주고 싶은 말을 참았다. 그 순간에도 참아야 하는지 아니면 여기서 따끔하게 화를 표출하면서 말을 해야 하는지 계속 생각하며 망설이고 있었다.

그렇게 돌아서고 나서 어제 하루종일 그리고 지금까지 여전히 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니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고 대충 정리되지만 그 당시에 느낌만으로 내가 말을 했다면 분명 의도와 다른 얘기만 나오며 후회할 일만 만들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갈등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나는 언제나 제대로 화를 내거나 맞서는 걸 두려워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음을 나이들어 부쩍 깨닫고 있다. 한마디로 순둥이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지나고 나서 되씹고 되씹어보며 아, 그때 이렇게 말했어야 하는데, 이렇게 행동했어야 하는데 따위의 사후 드라마를 찍고 앉았는 것이다. 나는 무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언제 정당하게 화를 표출해야 할까? 이때는 분명한 의사표명을 해야 한다고 결정해야 하는 순간. 우물쭈물이 아니라 분명해야 한다고 결정나는 그 순간.

그런 상황에 강한 사람이 분명 있다. 순발력이 좋은 사람일 경우가 많은데 나는 분명 순발력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고로 내가 하루종일 생각하고 속상했던 것은 그 여자에 대한 것보다는 그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 같은 내 자신의 멍청함에 대한 것이었다. 결국 화살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유형의 사람이다.

 

모든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또 그들을 옆에서 돌보며 지켜봐야 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기운내라고 말해본다. 뭐 하나마나 하는 말이지만 별달리 할 수 있는 말이란게 얼마나 빈약한 것인지, 이해해달라고 덧붙이면서.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는데, '별 일 없이 살'고 싶다. 그럴리 있겠는가.

특히 이번 겨울은 마치 예고된 전쟁을 기다리고 있는 심정이다. 전쟁은 곧 터질 예정인데 준비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그래서 더 답답하다.

책을 대비책으로 사놓은 것일까? 어려움이 닥칠 때 책을 읽으며 견딘다? 그게 될지 잘 모르겠다.

간병을 위해 며칠 병원에서 보낼 준비를 하면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비뚤어진 집]을 가져갔다.

요즘 애거서 크리스티를 보고 있기도 하고 원래 추리소설을 좋아하기에 단순히 누가 범인일까를 추리해가며(성공해본 적이 거의 없지만) 읽다보면 걱정과 피곤함을 잊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가져갔었다.

나쁘지 않았다. 책읽으며 돌파해나가기............. 듣도 보도 못한 돌파전략이라고 여기저기서 난리군. 허허.

(간병과 관련한 보다 복잡한 문제는 일단 잊자. 생각보다 빠른 시간 안에 변화가 많을 거라 짐작해보지만 우리나라현실을 볼 때 또 생각보다 쉽지 않을 거란 생각도 든다. 정치권이 문제라고? 결국 그자들을 누가 만들었는가? 제길)

 

애거서 크리스티 자신이 베스트로 뽑은 10권을 내가 미처 다 보지 못했음을 이번에 알게 됐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오리엔트특급 살인

누명

0시를 향하여

끝없는 밤

비뚤어진 집

움직이는 손가락

화요일클럽의 살인(열 세가지 수수께끼-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황금가지])

예고살인

 

황금가지와 해문에서 나온 것 어느 것도 괜찮다고 본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하도 오래 전에 본 것들이라 몇 권은 분명 본 것 같은데 나머지는 읽었는지 어땠는지 별 기억이 없다.

아마 안읽은 거겠지, 누명, 끝없는 밤, 움직이는 손가락은 안 읽은 것 같다.

[끝없는 밤]은 피에르 바야르가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에서 비중있게 다뤘는데 ... 기억이 안난다. 당시에 [끝없는 밤]을 읽지 않고 바야르의 책을 읽었으니 기억이 선명치 않은 건 어쩌면 당연할 듯하다.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도 도착해있고, 읽기만 하면 된다. .....

번역자 박중서는 역자 후기에서 영화 <블레이드 러너> 때문에 많이 알려지기도 했지만 정작 원작을 생각만큼 읽지 않은 현상을 되짚으며 영화가 원작을 축소하고 많은 것을 건드리지 못하고 말았다며 영화를 원작으로 치환해버리는 걸 막고자 애쓴다.

"<블레이드 러너>를 잊고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읽자"

 

이번에야 말로 때가 왔다. 읽는 것이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미치도록 좋은 제목 아닌가?

우울증에 빠진 아내 아이랜과 위태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며 살고 있는 현상금 사냥꾼 릭은 , 아파트 옥상에서 죽어버린 진짜 양 대신에 전기양을 한마리 키우고 있는데 그에게 큰 기회가 될 화성에서 도주한 최신형 안드로이드 여섯 대를 쫓아가며 겪는 하루동안의 사건들을 다룬 이야기.

릭의 소박한 소원 중 하나가 진짜 양을 사서 키우는 것이라는데...... 진자 양, 진짜 양, 진짜 양..........

박중서는 마지막으로 '이 책의 명성을 더해준 특이하고도 중의적인 제목'에 관한 설명을 세가지로 간략히 정리하며 요점을 제시해주고 있다. 고로 다시 한 번 이 제목은 진짜 잘 지은 제목 중 하나다.

[흘러라 내눈물, 경관은 말했다]와 함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는 우선 순위로 읽으려 한다.

폴라북스의 필립 K. 딕 걸작선 12권, 모두 나왔다. 끝.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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