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 같은 사람은 조선왕조 말 세도정치 60년과 흡사한 느낌을 받을 것 같다. 흐흐흐.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지면서 파편화되는 백성. 뭐 그쯤되지 않을까.
강준만 교수의 [한국 근대사 산책] 5권-교육구국론에서 경술국치까지- 의 맺는 말 '조선왕조 500년의 신화를 넘어'를 읽다가 기시감같은 느낌이 들어 생각해본 것이다. 나의 근대사 산책은 여기까지 왔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매스커레이드 호텔] 때문에 발자크(1816~1850)가 끌려나왔고(알라딘 최원호MD의 통찰 덕분에) 발자크의 작품이라곤 [고리오 영감] 딱 하나 가지고 있는데 그나마 1/3 정도 읽고 던져둔 게 언제였는지 모른다. 책더미에서 찾아다 책상 가까운 곳에 꽂아뒀는데 ... 그대로 있다. 대신 슈테판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을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다.
660페이지가 넘는 '평전'을 읽으며 어쩐지 기진맥진했다.
가끔 진공상태에 빠진 것처럼 중력감을 느끼지 못한 채 뭉실뭉실 움직이는 때가 있는데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랬던 것 같다.
단테의 [신의 희곡 : La Divina Commedia]에 대응하여 [인간 희극 : La Comedie Humaine]이라는 건축물을 만들고자 했다는 것이 발자크의 야심이었음을 이제야 알았고([인간희극]은 그의 전집을 일컫는 말이다), 그의 죽음과 맞바꾼 무지막지한 작업량에 그저 놀라워하면서 그의 생애를 매일매일 조금씩 읽어나갔다. 소설의 영역이 아닌 다른 삶에서는 실패하고 또 실패해가는 발자크의 삶을 만나게 된 츠바이크의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츠바이크는 30여 년 동안 발자크를 읽고 또 읽으며 발자크에 대한 경탄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1942년 브라질에서 자살했을 때 [발자크 평전]은 최후의 손길을 거치지 못한 채 남겨져 있었던 것이라 한다. 남겨진 원고들을 남겨진 자들이 검토보완한 후 1945년에 출간했다.
"문학에서는 사회의 변화를 아주 분명하게 예견하고 그 기초를 다졌으면서도, 현실 정치에서는 사업의 경우처럼 언제나 잘못된 편에 섰다." (632쪽)
시민혁명이 일어나고 새시대의 변화를 직접 목도하면서도 왕당파로서 정치쪽도 기웃거렸던 발자크를 말한 거지만 '사업의 경우처럼 언제나 잘못된 편에 섰다'는 말에는 츠바이크의 발자크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도가 모두 담겨있는 말처럼 느껴진다.
사업 말아먹는 데 탁월한 재주와 운을 지닌 발자크(과도한 상상력이 현실적 치밀한 계산을 언제나 넘어선 자업자득의 결과라지만), 평생을 빚쟁이들과 집달이들이 앞문을 두드릴 때 뒷문으로 달아나야 했던 발자크, 두터운 커튼을 드리운 채 밤 12에 깨어 커피를 들이부으며(5만여 잔의 커피), 깃털 펜들을 닳아 없애가면서 밤 8시까지 12시간 혹은 15시간씩 작업에 몰두한 노동자, 작업기계.
'인간심정의 역사'를 기록하고 싶었던 발자크, 인간본성의 무한한 다양성을 그리고자 했던 발자크의 구상은 140여 편의 작품, 약 3,4천명의 인물들의 얘기를 할 계획이었으나 죽음이 가로막아 74편의 장편, 2천명의 인물로만 남는 '토르소'가 되었다고 츠바이크는 정리했다.
츠바이크가 안내한 대로 번역된 것만을 대상으로 삼아 발자크를 읽어볼만 하겠다.
츠바이크에 따르면 발자크의 평생의 모티프는 "삶의 마지막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다가 광증으로 끝나는 철학자의 이야기"다.
발자크의 [인간희극]은 '절반은 경탄을 품고 절반은 유감스러운 작품'으로 이뤄져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번역된 것은 대표작이라 할만하고 '경탄을 품'을만한 것이라 대충 이해해도 될 것 같다. 대충.
[루이 랑베르]. 자전적 소설.
[나귀가죽]. 평전에서는 [마법가죽]이라 제목을 번역했다. 도대체 '나귀'와 '마법'사이는 어떻게 되는건가. 프로이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선택한 책이라는데 뭔 사연일까? 츠바이크는 발자크의 '최초의 진정한 소설'이라고 평했다.
[루이 랑베르]도 그렇고 [나귀가죽]도 "지적인 정열에서 병리학의 경계선"까지, 천재와 광기의 결합을 조명하는 작품일 수도 있겠다. '불가능한 것을 갈구하고 과도한 인식욕으로 인해 몰락한 주인공'을 다룬 작품들이라면, 그 경쟁작이 괴테의 '파우스트' 정도가 된다면, 프로이트가 충분히 흥미로워하지 않았을까.
내가 가지고 있는(게다가 채 다 읽지 못한) [고리오영감]은 츠바이크에 의해 딱 한 번 언급된다.
"[고리오 영감]과 [잃어버린 환상]에 리어왕의 실망의 요소가 들어있다면, 마지막 소설들([사촌 퐁스]와 [사촌 베트])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의 자르는 듯한 날카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발자크의 걸작들. [사촌 베트]와 [사촌 퐁스 Le Cousin Pons]
[사촌 퐁스]는 번역되지 않았다. 이 소설들은 "초기작들에서 오늘날 우리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따라서 제대로 효과를 내지 못하는 잘못된 이상주의, 달콤한 낭만주의가 없다." 앞에서 말했듯이 셰익스피어 작품들만큼이나 '자르는 듯한 날카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츠바이크에 의하면 '가장 위대한 업적'이란다.
"그의 눈길이 이보다 더 명확한 적은 없었으며, 인물을 형상화하는 그의 손길이 이보다 더 확고하고 냉정한 적이 없었다."
여기에 덧붙일 수 있는 작품이 [잃어버린 환상]
예상한 바대로 절판된 상태다. 800페이지라니. 아!
발자크의 동료들이라할만한 빅토르 위고, 라마르틴, 알프레드 드뷔세, 이들과 발자크가 다른 점은, "그들이 낭만적인 것, 고귀한 것, 위대한 것을 추구했던 것과 달리 발자크는 인간 속에 감추어진 작지만 잔인한 것, 천박하게 추악한 것, 감추어진 폭력을 보았고 묘사할 수 있었다"고 평한다. 발자크는 당시 까마득한 후배이자 신예로 떠오르는 스탕달을 알아봤고 칭찬했다.
(책에 스탕달의 [빨강과 검정]이라고 나와서 순간 멈칫했다. [적과 흑]을 [빨강과 검정]으로도 말할 수 있다는 걸 누가 부정하겠는가.) 또 괴테는 저 멀리서 에커만과 '발자크, 그 녀석 좀 괜찮네...'라고 대화를 나누었다나 어쨌다나.
발자크의 소설들은 '리얼리즘과 상상력의 가장 완벽한 혼합체'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도 읽을 날이 언제일지 모르는데 발자크는 또 언제 읽겠나.
이 외에도 [골짜기의 백합] [시골의사]('도덕적인 천재'가 나오는, '천재만이 다른 천재를 묘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천재를 이해했고 묘사했다.")
[외제니 그랑데] 는 지만지에서 소설의 절반 정도의 분량을 발췌해서 낸 것만이 있는 모양이다.
[인생의 첫출발] [사라진느](단편집)도 번역되어 있다. ........ 있긴 있는데.... ..... .
번역되지 않는 작품이고 츠바이크도 크게 평가한 바는 없지만 정치소설인 [올빼미 당 The chouans]은 한 번 보고 싶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2/0831/pimg_706336123784916.jpg)
프랑스 혁명기에 일어난 '반혁명적 반란'을 다룬 실제 사건에서 시작된 '올빼미', '올빼미 당'을 제목으로 하여 브르따뉴 지방의 한 귀족 가정을 배경으로 대혁명을 둘러싼 위태로운 정치사를 담았다고 하는데 '사업만큼이나 정치적으로도 언제나 실패했던' 왕당파 발자크가 어떻게 프랑스 혁명을 생각하는지 볼만하지 않겠는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과는 또 어떻게 다를까. ..... 뭐, 이런 궁금증까지 가지면 인생에 대책이 없어지는 것이다.
지난 여름에 읽은 헤닝 만켈의 [이탈리아 구두]에 나오는 한 구절, "더 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