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을 읽다보면 눈길눈길 가는 데마다 어찌나 셱스피어(셰익스피어를 줄였다)가 밟히든지. 그래서 양쪽 책이 다 궁금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20세기 미국문학의 3대 작가 중 한 사람이라는 너새네이널 웨스턴의 [미스 론리하트]에 대해서 블룸은

"뛰어난 문장과 패러디, 허무주의적 신랄함은 셱스피어의 [자에는 자로 Measure for Mesure]와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Troilus and Cressidar] 이후 유사한 예를 찾기 어렵다" 고 한다.

[미스 론리하트]도 셱스피어의 두 작품도 그냥 금시초문이다.

 

 

 

 

 

 

 

 

 

 

 

 

(건국대출판부의 [자에는 자로]는 원서강독용이다)

[자에는 자로]와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는 한번 더 나오는데 마르셸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함께 언급된다.

"마르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화자 마르셸의 대모험이 주는 최상급의 아이러니와 매혹적인 악취에 가장 가까운 것은 [자에는 자로]와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정도이다."

전예원에서 나온 신정옥 역의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는 당시 구입할 때 교보에 없었던 관계로 도서관에서 형설출판사의 이덕수 역의 책을 빌려다 읽고 있는 중인데, 영한 대역에 교재용 책처럼 편집된 책이다. 오탈자에다가 인물 표기법도 엉망이어서 내용이 대충 어떤지 읽어볼 생각으로 잡고 있으나 한숨만 나오는 책이다. 화도 난다.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는 일종의 '다크 코미디 dark comedy'로, 이런 식의 장르 구분에 예전 비평가들은 비판적이었다고 하는데 요즘 독자들에겐 재밌는거 아닌가. 트로이전쟁 동안 벌어진 그리스와 트로이의 왕과 영웅들 간의 '가치'논쟁이 흥미로운 것 같다. 자신의 신념과 주장을 연설하면서도 행동은 이를 배반하는 이중적이고 분열적인 인물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것 같다. 그러니 얼마나 정신사나운 극이겠는가. 아직 읽고 있는 중이다. 더 가자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까지 가야하는데, 갈 수가 있겠는가. 쯧.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 세권을 읽은 게 전분데, 생각보다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계속 읽고 싶었으나, 완독은 너무나 장구한 프로젝트를 요구했기에 중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권 '스완네 집쪽으로' 속 페이지에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인용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 책은 어떤 배움의 이야기이다. 더 정확히는 한 작가의 배움의 과정의 이야기이다"를 써놓았다. 이 말을 미스터리삼아 읽어갈 생각이었을 것이다. 지금부터 아주 오래전 일이다. .......

 

 

 

 

 

 

 

 

 

 

 

 

다시 셱스피어로 돌아가서, 새삼 내가 읽은 셱스피어 작품을 꼽아보니 4대비극(햄릿,오셀로,리어왕,맥베스)에다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샤일록이 나오는데다 여성 캐릭터(포샤)가 흥미롭다는 [베니스의 상인] 정도가 전부였다. 햄릿만 번역본을 달리 해 몇 번 읽었고 이번에 또 다시 읽었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박우수 역의 [햄릿]은 운을 중시한 것이나 지나친 고어를 피해 요즘 읽는 이들에게 편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문장을 쓴 건 이해할 수 있으나 맛이나 아취가 휘발된 것 같은데다 호칭도 통일되지 않은 채 사용된 것도 있고, 게다가 상감마마, 세자는 뭐냐? 에잇, 구입을 후회했어. 로쟈님이 여러 번역본 비교할 때 흥미롭게 본다는 1막 2장의 햄릿 대사,

"A little more than kin, and less than kind"는 "친척 이상이지만 친척만도 못하죠"로 번역했다. 친척 사이로 머물렀어야 하는데 부자관계가 되버린 상황에 대한 냉소적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읽었을 때 남의 다리 긁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읽는내내 조금씩 부족하고 헐겁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햄릿은 그렇고, 다른 셱스피어 작품에 관한한 무식하다고 해도 변명할 말이 별로 없다.

블룸의 셱스피어 언급 대목 몇개만 더 들여다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과 [맥베스]의 친연성이라든지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 닉 캐러웨이는 [햄릿]의 호레이쇼와 같다고 비교하는 것 등이 재미있다. 

 

"호레이쇼/캐러웨이는 햄릿/개츠비의 고뇌와 의문을 감싸고 있는 까다롭고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인물이다. 개츠비의 실질적인 근거는 없다. 플라톤적 자아관에서 볼 때 개츠비는 실재하지도 않으며 우리가 알 수 있는 존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햄릿을 향한 호레이쇼의 자유로운 사랑처럼 개츠비를 향한 캐러웨이의 지독한 사랑은 감동적이긴 하지만, 개츠비는 단지 열망 뿐이고 정신은 없으며 의미없는 충동에 흔들린다."

 

또 [인형의 집]의 헨리 입센의 대표작으로 블룸이 꼽은 건 [헤다 가블레르Hedda Gabler]라는 희곡인데 주인공 헤다는 셱스피어의 클레오파트라와 이아고가 결합된 인물이라고 분석했다.

 

 

 

 

 

 

 

 

 

 

 

 

 

 

오셀로의 이아고야 알겠지만 [헤다 가블레다]는 번역서가 없는 듯하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대략 이 세 권 정도에 나온듯하다. 어떤 책이 제일 읽을만한지 하, 이거야 원 한 권만 읽고 말 것인가 세 권 다 읽어볼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여튼 블룸은 입센의 작품에는 셱스피어의 자취가 짙게 배어 있다라고 하는데 [헤다]와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Titus Andronicus]와의 친연성을 언급하고 있다. 이 작품 또한 금시초문아닌가.

  

 

 

 

 

 

 

 

 

 

 

 

이 작품은 유혈이 낭자한 소극이며 어쩌면 풍자극이라는데 전예원에서 나온 신정옥 역의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를 구입했었다(지만지는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다. '러'냐 '로'냐 이 한 글자의 차이가 신경을 긁는다. 왜 표기법 하나 통일이 안되냐.). 지만지 것을 구입하고 싶었으나 당시에 교보에 없었다. 젠장. 살 때는 다급하게 구했는데(읽고 싶어서) 아직 읽지 못하였다. 작품해설부터 읽어보니, 이 작품은 "악몽이라고나 할 세계에서 일어나는 그야말로 참혹한 비극"이란다.

"잔학, 폭력, 광기가 무성한 피비린내나는 복수의 비극"

1593년 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셱스피어가 원작자인지 의문이 무성하다고. 공연횟수는 셱스피어의 타작품에 비해 많지 않다고. 초기 습작기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높이 평가하는 측과 폄하하는 측의 주장이 팽팽하다나 어쩐다나.

내면적 갈등에 촛점이 맞춰진 후기 비극에 비해 이 작품은 외면적 비극이 핵심적인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는데 인간의 극단적인 잔학성을 드러내 보인다는 작품이다. 블룸은 소극이며 풍자극으로 정의했다. 여튼 읽어볼 일이다. [헤다 가블레르]는 번역서라도 있어야 읽어볼 것 아닌가.

 

코맥 맥카시의 [핏빛 자오선]에 이르러 맥카시는 셱스피어적인 고고한 문체를 구사하는 작가이며 작품의 홀든 판사는 이아고와 같은 인물이라고 본다. 비극적인 주인공인 소년이 이 불가사의한 이아고 같은 인물인 홀든 판사에 의해 끝내 파괴되는 작품이라고 해설했다.

 

 

 

 

 

 

 

 

 

 

 

더불어 셱스피어의 4대 사극이 한데 묶인 이태주 역의 범우사 판을 읽고 있는데....... .

 

 

 

 

 

 

 

 

 

 

 

 

헨리4세 1부, 헨리4세 2부, 헨리 5세, 리처드 3세 네 작품이다. 헨리 4세에 그 유명한 캐릭터 폴스타프가 나온다.

이아고와 버금가는 캐릭터로 꼽는 폴스타프의 매력을 어떻게 구해내며 읽어야할지 난감해 하고 있는 중이다. 폴스타프와 헨리 5세(헨리4세 때는 헨리(할)왕자였던)의 이중성이 흥미로운 주제라는데 아직 내게는 모호하고, 책 붙잡고 있기가 힘들다.

범우사 판이 아닌 다른 번역본도 구해봐야 할 것 같다.

 

 

 

 

 

 

 

 

 

 

 

 

이 외에도 전예원의 셱스피어전집에는 리처드2세, 헨리8세, 헨리6세 1,2,3부가 있다.

셱스피어 전집만해도 평생 읽어야 할 프로젝트다운 볼륨감을 자랑하지 않는가. 거기에 해설서나 분석, 비평서까지 넣으면 엄두가 안난다. 관심 갈 때마다 한 권씩 찾아서 읽으면 되지 욕심부릴만한 일이 아니다.

 

[맥베스]와 [오셀로]는 늘 헷갈리고(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비웃는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이번에 다시 [오셀로]를 읽으며 오셀로는 왜 그다지도 빨리, 순간에 의심에 빠지게 되는지 다소 의아했다. 지 아무리 이아고가 있었다해도 그건 오셀로 안의 뭔가가 있는 것은 아닌가. 오셀로 자체가. 이에 대해서도 수많은 해석이 존재한다. 연극상연을 위한 대본이었으니 대사만을 보았을 때와는 다른 공연상의 보완적 상황이 보태졌을 것이라는 것에서부터 질투라는 것 자체가 지닌 속성, 오셀로의 무어인이라는 인종적 설정에 기인하는 인종차별적 성격 등을 지적한다.

셱스피어의 작품을 흥미롭게 깊이 읽기 위해서는 너무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상연을 위해 내가 연출자로서 혹은 배우로서 어떻게 해석해서 표현할 것인가라는 절박한 입장에 서 봐야할 듯하다.

 

전에 읽었던 가와이 쇼이치로의 [햄릿의 수수께끼를 풀다]를 읽다가 햄릿의 그 문제의 문제,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다'에 대한 해석이 늘 맴돌곤 했는데,

 

"햄릿이 단순히 복수라는 행위가 아니라 자기가 존재해야 할 방식을 고민한다는 점이 이 극의 본질"이라고 쇼이치로는 정리했다.

 

 살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마음에 더 숭고한  태도는. 고통으로,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견디는 것인가,

 아니면 무기를 쳐들어 난관의 바다에 맞서는,

 그리고, 거부하며 그것을 끝장내는 것인가, 죽는다, 잠든다-

 그뿐, 그리고 잠든다는 말이 끝장,

 상심과 천 가지 당연한 충격,

 육신이 물려받은 충격의 끝장이라면 - 그건 완료지,

 몸 바쳐 바라 마지 않을. 죽는다, 잠든다.

 잠든다, 어쩌면 꿈군다. 아하, 그게 골치로다.

 그 죽음의 잠 속에 어떤 꿈이 올지

 우리가 이 필멸의 육신을 벗어 버린 다음에 말야.

 망설일밖에 그런 고로

 그토록 오랜 삶이라는 재앙이 생겨나는 거야.

 (이하 생략)

 

  김정환 역, [햄릿] 3막 1장, 아침이슬

 

'견디는 것'과 '끝장내는 것' 사이의 결정, 그런데 죽음 이후 올 꿈이 어떤 꿈일지가 두렵다는 것이다.

하, 이토록 생각많은 남자 같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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